만용인 것을 알아도⋯⋯. 과거의 영광에 얽매인 자는 늘 회고를 탐닉할 수밖에 없다. 파도를 겹겹이 둘러 기어이 노도가 되어 돌아온 재앙을 떠올린다. 하나 둘 사라져가던 일족과 푸르름에 섞여든 불결한 붉은 것들. 우리는 울분과 비탄에 잠식되어 뭐가 뭔지도 모른 채 그저 뭍으로 나아갔지. 그리하여 허망하게 스러져 뭍에서 메말라버린 영혼들이 얼마나 있었는지. 잠깐이나마 눈앞 상대에게서 일족을 겹쳐보았다가 이윽고 퍼뜩 정신을 차린다. 요괴와 인간이 어찌 같으니, 웃기지도 않는 생각 말자고. 하여, 침잠하던 청보랏빛 눈이 가만 응시하다 이내 알았다는 듯 눈꺼풀을 느릿하게 한 번 깜박였다.
"해볼까. 근데 이 스미레 입맛이 꽤 고급인지라 너 그에 부응할 수 있겠어?"
문장에 섞인 농조를 잡아채곤, 다시금 되돌려준다. 삐죽 올라간 눈매가 날카로우나 그 안에 서린 빛 한없이 가벼우니 맞받아친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좋지. 기대할게."
하물며 '우미' 선배라고 처음부터 성을 붙이는 예의범절까지. 기개와 절조가 뚜렷하고 예의가 바르며 카와자토가 신뢰하는 이, 썩 괜찮은 인간.
"교실도 시끄러운 김에 겸사겸사. 그 아이는 늘 비가 올 때면 물 먹은 솜처럼 늘어지잖니. 아, 늘 네가 살피러 가던?"
"부응할 수 없다면 좀 더 노력해야죠. 그 입맛에도 인정받을 정도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게 된다면 저에게 있어서 좋으면 좋았지. 나쁘진 않잖아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그는 그녀의 말에 다시 반격했다. 농조로 이야기했으나 실상 정말로 그에게 있어서 나쁜 것은 없었다. 아야나에게 더 좋은 음식을 만들어주는 것을 떠나서 정말로 연인이라는 관계에 부합하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으나 제 여자친구에게도 맛있는 것을 만들어주고 그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해줄 수 있지 않겠는가. 자고로 맛있는 것을 먹으면 행복해지기 마련이었으니 제 주변에 있는 이들이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유우키는 생각했다.
"후훗. 기대에 부응하도록 할게요. 아야나님도 함께 먹게 될테니 더더욱."
그렇다면 오이는 빼는 것이 좋겠지. 편법을 쓴다는 생각을 갖게 하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저 선배가 오이를 좋아하는지도 알 수 없었으니 오이는 일단 빼는 쪽으로 생각해서... 하지만 역시 한두개 정도는 따로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천천히 머리를 굴렸다. 허나 지금 당장 만들 것은 아니었으니 그는 이후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결심하며 생각을 멈췄다.
늘 비가 올 때면 물 먹은 솜처럼 늘어진다. 자연히 유우키의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비는 주룩주룩,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며 일기예보로 판단하건데, 한동안은 계속 올 것이 분명했다. 이 나라 특유의 습기 가득한 비는 사람을 축 쳐지게 만들기 딱 좋았으며, 특히 아야나를 괴롭히는 가장 큰 요인이기도 했다. 일단 지금은 안정을 찾아 침대에 누워있긴 하지만... 올해는 어떻게 잘 보낼 수 있을런지. 조금 걱정어린 표정이 그의 얼굴에 살짝 드러나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가급적 가능한한 시간대에는 살피고 있어요. 특히나 지금처럼 비가 계속 내리는 장마철에는 더더욱 말이에요. 후훗. 지금은 조금 안정이 되었으니 만나러 가도 별 일은 없을 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컨디션이 온전히 괜찮은 것은 아니지만..."
오늘 하교때는 간만에 가방 속에 넣어서 하교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유우키는 생각했다. 나중에 하교할때 어쩔지를 물어보기로 그는 결심했다.
우선 수위를 상당히 낮게 잡았던 이유 중 하나가 접때도 비스무리한 말을 한 적 있었지만 특히 선정적인 발언이 구성원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워서다. 여기가 처음부터 성인 전용 어장이었다면 또 모를까 미성년자 참여자도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참여하지 않더라도 딸깍 한번에 중학생이나 초등학생도 들어올 수 있는 오픈된 사이트니까. 또한, 높은 수위를 덮어놓고 허용했다가 일상이며 관계며 죄다 자극적인 방향으로 치달아 청춘을 지향하는 어장의 정체정이 묻힐 것 또한 염려하였다.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있는 청소년들의 아슬아슬한 청춘. 뭐 나도 좋아하지만서도, 한 사람이 아슬아슬한 선타기를 시도하면 다른 사람이 어라 저 정도는 되는구나 하고 슬쩍 더 위험한 선타기를 시도하고, 이게 악순환에 가까운 연쇄작용을 한다는 것을 너희도 잘 알 테니까. 그리고 수위가 높아진 어장이 폭발한 사례도 있기에 더더욱 이런 쪽으로 조심하는 경향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선비같이 반응했던 데에는 이러한 구구절절한 사정이 있었다.
일단 내 의견을 말하자면 나는 지금 이 분위기에 불만없어. 처음부터 그렇게 할 거라는 거 알고 시트 낸 거기도 하고, 그렇게 즐길 생각으로 온거거든. 물론 나도 수위 아슬아슬한 거 싫어하는 것은 아니긴 한데 캡틴이 그렇게 하겠다고 정한거잖아? 그렇다면 나는 캡틴의 뜻대로 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 참치상판에서 토론을 해서 정한 수위선을 넘어버린 것아 아닌 이상 캡틴의 생각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캡틴이 만들고자 하는 것도 고등학생들이 할법한 청춘스토리지. 막 아슬아슬하게 흘러가는 위험천만한 스토리는 아니잖아? 그러니까 수위는 굳이 높일 것 없다고 생각해.
수위를 높게 하고 싶다면 나중에 이 스레가 끝나고 독립을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둘이 서로 협의하고 합의해서 높여서 즐기면 되잖아? 물론 그것도 참치상판 수위를 넘어서면 안되니 말이야.
내 개인적으로는 공중파에 나올법한 수준은 괜찮은데 좀 더 명확한 기준선은 있는 것이 좋지 않나 싶네.
상대 심기 거슬리지 않게 부드러이 받아치는 솜씨가 제법이다. 하도 별의별 인간 군상과 빌어먹을 인외들을 맞닥트려 안 그래도 가느다랗던 신경줄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만 비로소 약간의 여유를 되찾는다. 먹구름이 태양을 가려 마을을 뒤덮은 회명과 공중에 떠 있는 습기, 후두둑 낙하하는 빗물이 그것들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래. 나도 해보지, 기대라는 거."
산뜻하게 대꾸한 뒤 본래의 목적지로 걸음을 다시한다. 우중충한 복도길에 단화 굽이 울린다. 다각,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힐긋 그를 일별하면 낯에 염려가 떠오름을 발견하고. 이 애, 진심으로 카와자토에게 헌신함을 확신한다. 그러나 카와자토가 카와자토가 아닌 그저 아야나라면, 하는 의문이 문득 수면 위로 올라왔으나 뒤로 묻어두었다. 그녀가 카와자토가 아닐 일은 없으니 굳이 상정할 필요 없는 짓.
"성실하네. 안정되지 않을 땐 어떠하길래, 별 일이 있었던 적이 있어?"
시선이 그를 향해 모로 굴렀다. 이내 자조섞인 웃음으로 입매를 부드러이 올린다. 상냥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