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금을 모티브로 하고있지만 잘 모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상황극판의 기본 규칙과 매너를 따릅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먼저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가집시다. 모니터 너머의 이용자도 당신처럼 '즐겁고 싶기에' 상황극판을 찾았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오고 가는 이에게 인사를 하는 자세를 가집시다. ※상대를 지적할때에는 너무 날카롭게 이야기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15세 이용가이며 그 이상의 높은 수위나 드립은 일체 금지합니다. ※특별한 공지가 없다면 스토리는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7시 30분~8시쯤부터 진행합니다. 이벤트나 스토리가 없거나 미뤄지는 경우는 그 전에 공지를 드리겠습니다. ※이벤트 도중 반응레스가 필요한 경우 >>0 을 달고 레스를 달아주세요. ※계수를 깎을 수 있는 훈련레스는 1일 1회로, 개인이 정산해서 뱅크에 반영하도록 합니다. 훈련레스는 >>0을 달고 적어주세요! 소수점은 버립니다. ※7일 연속으로 갱신이 없을 경우 동결, 14일 연속으로 갱신이 없을경우 해당시트 하차됩니다. 설사 연플이나 우플 등이 있어도 예외는 아닙니다. ※기존 모카고 시리즈와는 다른 흐름으로 흘러갑니다. 따라서 기존 시리즈에서 이런 설정이 있고 이런 학교가 있었다고 해서 여기서도 똑같이 그 설정이 적용되거나 하진 않습니다. R1과도 다른 스토리로 흘러갑니다. ※개인 이벤트는 일상 5회를 했다는 가정하에 챕터2부터 개방됩니다. 개인 이벤트를 열고자 하는 이는 사전에 웹박수를 이용해서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벤트를 진행하는 이는 계수 10%, 참여하는 이에겐 5%를 제공합니다.
다리 없이 땅을 기며 마치 굴종하듯 고개 내리고 다니는 짐승에게 주어지는 것은 조롱 밖에 없다. 인간들은 뱀을 보면 땅을 기는 것들이 독을 품었다며 코웃음을 쳤다. 조롱할 처지가 바뀌었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처절하게 망가진 당신은 빈정거렸고, 가장 화사한 태오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기분이 나쁜 걸 표현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태오는 달랐다. 당신을 내려다 보며 상처가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판단했다. 조롱이라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령 조롱이라 느꼈다고 해도 삭막한 감정은 무언가 느낄 새도 없이 금세 흩어져 초연하게 만들었을 것이 뻔했다.
"그런 시답잖은 앙탈은…… 네 정인에게나 가서 말해."
하지만 한 가지는 넘어가기 어렵다. 걱정이라니! 자의로 속을 긁고 싶든, 지친 탓에 아무 말이나 나오는 것이든 납득하기 어려워 당신의 말에 툭 반박했다. 누가 봐도 나 스트레인지랑 연관 있습니다 하는 사람에게 그쪽에서 가장 필요하지 않은 덕목을 걸고 넘어지니 썩 좋게 들리지 않았던 탓이다.
"축하는 해드리도록 하지요. 다만 빨리 끝내고 꺼졌으면 하는 바람이랍니다……."
태오는 당신을 부축하며 USB에 시선을 잠깐 두었다가, 이내 거두었다. 얻긴 얻었구나. 그러면 됐다. 어서 이곳에서 나가길 바랄 뿐이다. 태오는 이내 축축한 옷에 시선을 옮겼다. 당신이 가벼운 건 허약한 태오에게 있어 감사할 일이지만 옷은 영 감사하지 못했다. 이대로 바깥이라도 갔다간 어디 오해받기 딱 좋겠지! 스트레인지 구석에 처박힐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달리 불만을 뱉지는 않기로 했다. 인간의 삶이 언제는 덧없지 않은 날이 있었나.
"……목적지에 도착하면 두고 갈 테니 그리 알아요."
아는 병원이라. 굳이 따라가거나 보호자로 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당신도 그걸 바라지 않을 것 같아 적당히 말을 꺼내고는, 흐릿하게 웃으며 꺼내는 말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앞만 보고, 당신이 아닌 가야할 길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내…… 탓할 대상이 없는 게 애석할 따름이군요……. 네 느끼기엔 그런 것일까요."
태오는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네 내가 비꼬길 바라느냐고. 다만 태오는 그럴 마음은 없는 듯싶었다. 실로 그러했다. 인간의 삶은 덧없고 사사로운 것은 마음에 두지 않는다. 금세 승화될 감정이었기에 지금도 승화되어 지난 일에 불과하다. 다만 그 깊어진 골은 다시 수복하기엔 시간 걸릴 수밖에 없으니.
"누구도 부축해주길 바라지 않았다는 것도…… 같군요."
이런 것까지 닮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태오는 느릿하게 덧붙이더니 앞으로 계속 걸었다. 이제 보니 태오 특유의 달관한 듯한 무표정에서 귀찮음인지 성가심인지 모를 무언가가 아주 희미하게 서린 것 같기도 하다. 가까이에서 마주해야만 보일까 말까 한 감정도 감정이지만, 향이나 그런 것도 평시와는 다르다. 평상시 태오에게서는 샴푸 냄새를 제외하면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향수 냄새가 드문드문 섞여있다. 태오의 것은 아니었다. 아마 태오도 스트레인지에 볼 일이 있어 온 듯하다. 다행스럽고도 우스운 일이다. 당신을 조롱하고자 쫓아온 게 아니라, 그때처럼 빌어먹을 타이밍이 나빴을 뿐이라는 점이.
사실 처음에는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던 이름이었다. 리라 개인에게 있어 유익한 정보들이라곤 해도 어디까지나 12년 전의 낡은 기록. 매분 매초 새로운 정보가 업데이트 되는 21세기, 그중에서도 20년은 앞선 첨단 과학 기술의 시작점이자 연구자들의 요람인 인천첨단공업단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지금까지 이어지지 않는 과거의 이름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많은 정보는 그런 식으로 잊히고 묻힌다. 시간은 무엇보다 훌륭한 망각제니까.
하지만 가끔은, 우연찮은 계기로 하여금 잊혀 마땅할 것을 한번 더 들여다 보게 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어디 보자. 로벨, 연지, 마레, 시즈, 알터, 영락... 됐다. 다 옮겨 적었네."
가나다순으로 정리된 연구소들의 이름과 간단한 정보가 적혀 있는 커다란 노트 위에는 색색깔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그곳에는 그동안 리라가 공부해온 연구소들에 대한 정보가 고스란히 옮겨져 있었다. 데 마레, 로벨, 시즈, 알터, 영락... 랩탑의 포스트잇 위젯에 써 있던 내용들은 이제 종이 위로 옮겨져 고전적인 기록지의 양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건 타자기와 디지털 기록 방식에 익숙해진 현대인에게는 꽤나 큰 노동이었기에 리라는 포스트잇과 글자로 꽉꽉 찬 종이를 찬찬히 넘기며 뿌듯한 미소를 감추지 못한다.
물 흐르듯 글자 위를 지나가며 문장을 곱씹던 잉크 묻은 손가락이 문득 생소한 연구소 이름 위에서 멈췄다. 애시르. 시현의 기록에서 처음 발견했을 때와 같이 온전히 초면인 단어였지만, 그 곁에 쓰인 메모는 자꾸만 눈길을 잡아끌고 결국 이 부분을 다시 되짚게끔 했다.
[ㅇ] [애시르] 운영 시작 시기: 인첨공 발족 직후 비고: 연구소에서 운영하는 보육원 존재. 특이사항 없음. 연구 성과는 평범.
주소: 인천첨단공업단지 제 2학구 00로 000길 00 연락처: (12년 전 애시르의 공식 연락처)
비교적 단정한 다른 글자로 쓰여진 옛 기록을 보던 눈동자가 그 아래 유난히 더 날려 쓴 악필로 적힌 추가 메모에 닿는다. 다른 문장들보다 최근에 쓰인 것처럼, 신선한 잉크로 쓰여진 티가 나는 추가 메모.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 생존본능과 능력 계발간의 상관관계 ㄴ발표자는 애시르 연구재단? 신생인 듯 ㄴ이론의 기본 전제가 커리큘럼에 반영할 경우 능력 계발의 대상이 되는 학생에게 다소 위험하지 않은가? ㄴ과거 애시르 연구소와 이름이 같다. 따로 적기 귀찮(해당 부분 줄 그어져 대충 지워져 있음)기록상 편의를 위해서 이곳에 추가 기록. (둘이 관련 있는지는 ?)
두서없이 늘어져 있는 글자들은 제대로 된 기록보다는 혼잣말을 받아적은 느낌에 가까웠다. 리라는 그 부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search: [애시르 연구소]
검색결과 없음. 리라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검색결과가 없지는 않았다. 다만 기껏 나온다는 게 그가 바라는 방향의 정보와 일체 상관없어 보이는 지식들이라서 문제지. 이를테면 인터넷 지식백과의 신화 관련 정보에 붙어 있는 북유럽 신화 신족 애시르Æsir 에 대해서라던가.
"아무리 그래도 이게 끝은 아닐텐데... 으음..."
'연구' 키워드를 넣은 덕분에 뭔가 더 걸리는 정보는 있지만 그뿐이다. 노트에서 확인했던 애시르 연구재단이란 곳은 홈페이지가 존재하는 것 같았지만 이렇다 할 특이사항은 없었고. 모로 보나 유익한 정보값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노트에 적혀 있던 위험한 이론이라는 사족이 조금 신경 쓰이는 탓에 창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리라의 손가락이 이리저리 헤매다가 뉴스란을 누른다.
"그래도 뉴스가 있긴 있네?"
마이너 언론사의 글 한두개 뿐이지만. 간략하다 못해 성의 없는 타이틀을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리라는 곧 링크를 클릭했다.
신생 연구재단. 연구소가 조성되는 대로 신임 연구소장을 채용할 예정. 거기까지는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다. 이 작은 공간에서 재단이나 팀 같은 것들은 매일 다른 모양으로 피어났다가 사그라들고 융합되길 반복하니까. 그러니 시선은 자연스레 지루한 기사 중 그나마 독특한 대목에 꽂히게 된다.
(생략) ...연구를 위해 부지를 구매했으며 구매한 땅이 스트레인지 내에 있다.
연구소 자리 치고는 신박하다 못해 이상한 장소 선정에 리라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그러나 그 의문이 차마 더 깊어지기도 전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선 요란한 알람이 울린다. 아, 커리큘럼 시간이 다가왔다.
"으으으, 다 좋은데 커리큘럼실이 멀어진 건 조금 불편하네... 찡찡아, 언니 다녀올게. 간식통 꺼내면 안 돼. 알았지?"
노트를 가방 안에 넣고 핸드폰 화면을 끈 리라는 찡찡이의 등을 한 번 쓸어주고 집을 나섰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습하지 않아서 곧 계절이 바뀔 거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실감이 난다. 의문도 고민도 해야 할 일들도 잔뜩이지만 새롭게 다가올 시즌은 어쩔 수 없이 철없는 가슴을 뛰게 만들어서.
청산하지 못 한 과거는 언제까지고 뒤를 쫓아옵니다. 그저 눈을 돌렸을 뿐인 현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정에 없던 해수욕을 하고 돌아와 가장 먼저 한 건 샤워였다. 해안가로부터 집까지 젖은 채 걸어온데다 해수욕을 한 시간도 적지 않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행동의 대가를 치루듯 씻고 나와 취하려 한 잠을 지독한 어지럼증으로 인해 깨고 말았다.
어둑한 시야마저 빙글 도는 것에 설마 하며 이마를 짚자 내 손이 되려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의 열이 화끈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메마른 목에서 심한 갈증이 느껴져, 일단 뭐라도 마셔야겠단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세상이, 이렇게도 어지러운 것이었던가.
고작 방에서 부엌까지 가는데만 한 세월 걸렸다. 겨우 벽을 짚어 도착한 부엌에서 더듬더듬 불을 켜고 물을 따르기 위해 잔을 집어들었으나 그만 놓치고 말았다.
쨍그랑!
당연한 수순으로 깨져버린 컵을 보고 피하려고 했으나 되려 파편 하나를 밟아버렸다. 두꺼운 유리조각이 살을 파고드는게 느껴졌지만 지금 빼낼 재간은 없었다. 멍한 머리지만, 귀찮아 죽겠다고 생각하며 한 발을 질질 끌며 방으로 돌아갔다. 어찌어찌 폰을 켜 유준의 연락처를 누르자 신호음이 울렸다.
뚜르르 하는 소리가 대여섯번 이어지다가 달칵, 받는 소리로 이어졌다. 필시 자고 있었을 잠긴 목소리가 왜, 라고 들려왔다. 나는 필사의 목소리를 끌어 대답했다.
"나, 열 나, 는데... 지금..."
그 말만 했을 뿐인데 바로 알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전화가 뚝 끊어지고 그대로 침대에 기대어 기절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든 건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깊게 박혀 있었는지, 쑤욱 빼내는 순간 신경이 팽팽히 긁히는 고통에 절로 눈이 떠졌다. 덕분에 조금 맑아진 정신으로 자상을 회복시키며 주변을 보자 장갑 낀 손으로 집게를 든 유준이 침대 발치에 있었다.
오자마자 나를 눕히고 유리조각 제거부터 한 모양이었는데, 이걸 참, 고마워 해야 할지...
그 불만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미간을 구긴 유준이 투덜댔다.
"이 새벽에 처불러놓고 표정 봐라. 이걸 확 그냥."
그래봤자 그의 담당 소관인데 어쩔 것인가. 없는 기력 끌어다 오른손 중지를 들어보이자 분에 받쳐 씩씩거리면서도 이내 한숨을 푹 내쉬는 유준이었다.
다시금 잔소리가 목 끝까지 올라온 듯한 유준이었지만, 이번에도 한숨으로 삼켰다. 나는 그런 유준을 별 것 보듯 빤히 보다가 링겔을 가져오는 모습에 잠자코 팔을 내밀었다. 발바닥으로 인한 여파로 팔뚝에 바늘 꽂히는게 둔하게 느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침대 옆에 간이 링겔대가 설치되고, 투명한 수액이 관을 타고 조금씩 몸 안으로 주입되기 시작했다.
"지금 시간이... 어, 두 시간 후에 한 대 더 맞출 거니까 얌전히 있어라. 어차피 꼼짝도 못 하겠지만." "어어..." "아프다고 은근슬쩍 말 까네, 이게."
유준은 내게 꿀밤 먹이려는 시늉만 하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준 뒤 방을 나갔다.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얼핏 보였는데,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집에서나 입을 후줄근한 차림새였다. 평소라면 당연한 거라며 금방 눈 돌렸을 것이 어쩐지 시야에 걸렸다.
나로 인해, 주변의 누가, 얼마나, 저런 상황에 처했었을까.
고열로 끓는 머리는 깊은 생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곧 돌기 시작한 약효로 인해 다시금 의식이 끊겼다.
그녀에게 일차적인 해열제를 투여하고 나온 유준은 거실 한 가운데 서서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본디 저 열병은 가만히 있어도 연중 몇 번 정도 찾아오는 것이기에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어쩐지, 문제는 달리 있을 것이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역시, 목화고로 진학하는 것부터 막았어야만 했는데.
너무 늦은 후회가 유준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제와 되돌리기엔, 너무 많이, 늦어버렸다는 생각도 함께.
"아흐- 진짜."
방에는 들리지 않게 한숨과 투덜거림을 흘린 유준은 소파에 걸터앉아 폰을 꺼냈다. 생각난 김에 연락이나 보내둬야겠다 싶어서였다. 화면을 켜 한 개인과 연결된 톡방을 열고 망설임 없이 메세지를 작성해 전송하기 시작했다.
>[성운 학생, 이런 시간에 미안하다. 생각난 김에 전해둬야 할 것 같아서. 일전에 혜우의 이상반응에 대해서 얘기했었지. 그것 말인데, 측정된 뇌파를 가지고 모든 데이터 베이스를 뒤졌지만 일치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어. 겨우 알아낸 것이라곤 측정된 뇌파가 적어도 셋 이상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 내 쪽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뇌파의 개별 분리도 시도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어. 그걸 검증하느라 시간이 제법 들었다. 혹시나 기다렸다면 소식이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 >[그렇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는 건 아니었어. 관련 분야에 조언을 구해보니 한 가지 방법이 나오긴 했다. 톡으로 얘기하긴 그렇고 다음 레슨 때 만나거든 직접 얘기하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
장문의 메세지 두 건을 보내고 폰을 끄려던 유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건을 덧붙였다.
>[이건 별개다만 오늘부터 한 사흘 정도 그 녀석이랑 연락이 잘 안 될 거다. 고열에 시달리는 지병 비슷한게 있는데 마침 이번에 터지는 바람에 드러누웠거든. 옮는 건 아니니까 들락거리는 건 상관 없다. 알아두라고.]
"...내가 왜 이것들 연애질까지 중개를 해줘야 하나 싶구만."
전송된 톡을 보며 투덜거린 유준은 폰을 꺼 소파에 툭 내려놓았다. 넉잡아 두시간은 있어야 하니, 잠깐 눈이나 붙이기로 했다.
도착한 커리큘럼실이 평소보다 깔끔하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리라는 캔버스나 종이, 색연필이나 물감, 연필, 펜, 팔레트나 물통 따위의 그림 도구가 없는 커리큘럼실 내부를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뭐가 없네요?" "아, 이리라 학생 커리큘럼 스케줄 새롭게 갱신하느라 세팅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어차피 오늘은 그쪽 도구들 쓸 일 없으니 신경 쓰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요. 스케줄표 확인하고 들어가죠."
정인의 대답에 리라의 고개는 다시 한 번, 몇십 분 전 기묘한 장소 선정을 한 연구소에 대한 의문으로 기울어졌던 방향과 반대로 기울어진다. 그의 담당 연구원은 주기적으로 커리큘럼 스케줄을 바꿔보곤 했으니 갱신은 딱히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다만 도구들을 쓸 일이 없다는 말은 확실히 의아했다. 저번주부터 진행했던 '도구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탐구'는 이미 막을 내렸으니 오늘부터는 의료용 메스 대신 각종 그림 도구를 손에 쥘 거라고 생각했는데, 쓸 일이 없다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건네진 프린트물에 쓰여 있는 커리큘럼 스케줄표를 훑어내리던 옅은 라벤더색 눈동자가 정인의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이거 꽤 오랜만에 하네요?" "네. 오랜만이죠."
고저 없는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딱딱하다. 리라는 안경 너머 냉정한 눈빛을 몇 초 정도 응시하다가 다시 프린트물로 시선을 돌렸다. 전기충격요법, 전극을 활용한 뇌신경 활성화, 창의적 사고 확장을 위한 영상 시청, 집중 스피드 드로잉... 뒤의 두 가지는 최근까지도 해 오던 것들이지만 앞이 문제다. 이건 급격히 레벨이 오르면서부터는 진행하지 않았는데.
"레벨 4로 올라오면서 이리라 학생의 발전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고 있다는 얘기는 한번 한 적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때문에 레벨 0에서 2까지 올라올 때와 같은 발전 속도를 끌어내보기 위해서 초기 커리큘럼을 다시 도입했어요." "......이제 안 하는 줄 알았어요." "기본적인 거잖아요. 필요하다면 해야죠."
리라의 시선이 커리큘럼실 한켠의 또 다른 문에 닿는다. 지독한, 지독했던, 비명소리가 사면에 부딪혀 메아리 치던, 어둡고 차가운—
"연구원님은 지금의 저에게 이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네. 이리라 학생은 아닙니까?" "그!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글쎄요. 전 이제 레벨 4잖아요. 기존 과정대로도 느리지만 꾸준하게 발전하고 있었고요." "조금 전에 말했는데 제대로 안 들었습니까? 느린 게 문제입니다. 레벨 0에서 2까지 올라올 때에는 이것보다 훨씬 빨랐어요. 이리라 학생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살짝 굳은 리라의 낯을 응시하던 정인의 마른 입술이 느릿하게 달싹이다가 재차 열렸다.
"이제 더 발전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 건가요?"
실망스럽군요.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귓가에 들려온 책망의 목소리에 리라는 한순간 언어를 잃어버리고 만다.
"아닐 거라고 믿습니다. 이리라 학생은 처음부터 야망이 있었으니까요. 자, 이만 들어가죠. 옷장에 있는 옷으로 환복하고 오세요."
게다가 알고 있었다. 어차피 반박해봤자 커리큘럼의 진행 방식은 연구원의 손에 달려있으니까. 잉크 묻은 손가락이 철제 캐비닛을 열자 서늘한 소독약 냄새가 밴 천쪼가리가 그를 반긴다. 입술을 꾹 깨물어 울렁이는 속을 잠재운 리라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캐비닛 안에 넣고 실험복에 팔다리를 꿰었다.
"하지만 정말 자취를 원하는 걸까?라는 질문에는 전혀 답할 순 없었네요." 그 이유는 자취를 시작하고자 하는 요인에 외부의 압력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타인에게 말할 수 있을리가요. 스스로가 깨닫지도 못했는데. 수없이 많은 별이 밤하늘에 수놓아져 있다고 해도. 결국 사람이 인지하는 것....일까요? 그렇기 때문에 수경은 산책을 계속하겠다는 말 대신.
"물 속은 빠져야만 들어갈 수 있긴 해요." "제게 있어서는 그 점이 조금 다를까요." 그런 느낌으로 물수제비처럼 통통 될수도 있을까. 라고 생각해봅니다. 혜우를 바라보면서. 물에 빠져버리면 아프게 될 수도 있나? 라고 생각하지만. 움직이지는 않네요. 그뿐입니다...
목으로 손을 올리며 느껴지던 간지러운 감각을 기분 탓으로 넘길 수 없다. 괜히 머리를 올렸을까. 그렇지만 그냥 풀어두고 있자니 몇번 다듬는 것 외 건드리지 않았던 긴 머리카락은 분명 답답하게 보여질텐데. 생각이 멈춘다. 태연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던 네가 먼저 시선을 돌려서 다행이다. 혜성은 목에 대고 있던 제 손을 내리고 냉동실에 봉지를 집어넣으며 자신이 저 시선을 의식해버렸다는 사실을 인지하니, 그리 덥지 않던 자취방이 갑자기 더워졌다고 혜성은 생각했다.
음료수로 하겠다는 금의 말에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있느냐고 혜성은 말로 하는 대답 대신 고갯짓을 해보인다. 평소보다 조금 정리된, 평소와 똑같은 풍경의 자취방에 사람 한명이 늘었을 뿐인데 신경이 온통 등 뒤로 쏠려있는 기분이 생소하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둘이 누우면 좋을 크기의 침대 한켠을 채우고 있는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인형들을 보고 있을까. 음료수를 따르던 혜성은 곧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등 뒤가 신경쓰이는 이유가 금이 때문인지, 아니면 누구도 찾아온 적 없는 자취방에 자신 외의 사람이 있기 때문인지 지금으로선 도통 판단할 수 없다.
주스가 담겨 있는 머그컵을 들고 돌아보면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은 금의 모습이 보여 혜성은 키득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왜 바닥에 앉아 있어. 침대가 불편하면 책상 의자에 앉아 있어도 되는데."
음료가 담긴 머그컵을 건네며 말하던 혜성은 입에 물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더 베어문 뒤 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잠시 눈동자가 도록 굴러간다. 보고 싶었다는 말 때문이고, 제 앞에서만 짓는 웃음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였나. 당연하다는 양 지어보이는 쑥쓰러워하는 미소를, 말로 하지 않더라도 좋아하고 있음을 증명하듯 보여주는 행동이 간간히 떠오르기 시작하던 게.
"보러 와줘서 고마워."
카라멜 맛 스틱형 아이스크림을 베어무느냐고 차가워진 입술까지 열이 오르는 기분이였지만 혜성은 느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입 안이 달게 느껴지는 건 아이스크림 때문이겠지. 금이 앉아있는 방향 침대에 올라가 앉아 말랑거리는 촉감이 좋은 인형 하나를 당겨서 무릎 위에 올린 뒤 혜성은 주스가 들어있는 머그컵을 잘 들고 있는 걸 확인하는 것처럼 시선을 준다.
"잠깐 시간 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으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금이 네가 찾아와줘서 쉬는 거기도 하고."
금의 등 뒤에서 고개를 들이민 혜성은 금의 뺨에 카라멜 맛이 나는 입맞춤을 아주 짧게 남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