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순이나마 당신 옛 시절로 돌아간 줄로만 알았다. 가게에서 처음에 했던 상스러운 말 혹 잘못 들은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지금의 태도 퍽 멀끔했기에. 하나 점잖던 행동 오래지 못하고 방종한 말씨 튀자 불초 될 제자 입에서도 피식 실소가 샌다. 그래, 차라리 이 편이 더 좋다. 정미精美하였던 과거라 한들 이제는 닿지 않는 때이기에 호시절인 법이다. 이제 와 정녕 그때로 돌아가고 싶으냐 묻는다면 그럴 리 만무하다. 돌아가지 못할 자 저뿐만이 아닌 듯해 서로의 방종 외려 기꺼운 데가 있다.
"…제 면 위로 뱉지만 아니하신다면야."
어차피 이곳 온통 향내로 가득하였으니 연초 더해진단들 그리 다르지도 않다. 그렇단들 입매 못마땅히 처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지만서도, 사군 꼴 보아하니 그것 없으면 대담할 정신 없어 보이기에 인내 조금 더 해 보기로 했다. 뻑뻑 뿜어져나오는 연기 보았음에도 사군의 멱살 쥐어잡고 싶단 생각은 들지 않으니 삼대 구 년 만, 아니 사토 집안 수십 대 내려올 동안 꺼내지도 않았던 경문 읊으며 답지 않게 심정 다스린 보람 있기는 한 모양이다. 한편 중이 가져온 다기 내려두기도 전에 제 몫의 잔 낚아채어 찻물부터 살폈다. 물에 담근 풀냄새 미처 배기 전에 서둘러 찻잎 대충 건져서 치웠다. 향 나지 않으니 그저 갓 끓은 뜨거운 물만 된 차 단번에 다 들이키고는, 탁 소리 나도록 곁에 잔 내려두었다.
"하면 그간의 사연 묻기 또한 탐탁하지 않으시겠지요. 예, 그것은 입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반면 제 사연엔 유별한 요기嶢崎 없사오니 혹 동하시거든 편히 존문해 주십시오."
물을 것이라면 많았다. 스승 미쳐가던 시기의 일 아니더라도 혼절한 인어와 그것 아주 진하게도 바라보는 시선 제법 낯선 광경이었으므로. 그러나 당장은 미루어도 될 의문이라 치부했기에 불쑥 치솟는 의문은 온차로써 삼켜내었다. 각별한 스승 광증에 시달린단 말에도 만면 유감 묻어나거나 애써 걱정하는 체하는 기색조차 없다. 그저 당신 그리 말한다면 저도 그리 알겠다는 정도의, 건조하기 짝이 없는 수긍. 성결한 신 노릇 하던 시절에도 종종 냉담한 본성 이리 드러나곤 했었다. 그러나 그런 무신에게도 일말의 됨됨이란 것은 있는지라, 선뜻 즉답하기 어려운 말에 불에 그을린 머리칼 끝이나 절로 만지게 된다. 찻물에 넣은 담배 물 먹어 처질 무렵 되어서야 마침내 무겁던 입 열렸다.
"과경에 고하였듯 제 성품 그리 좋지 않게 된 고로 아비 정도의 위威 아니고서야 앙금 오래도록 남을 것 같으니─ 좋습니다. 어찌, 이제부터 호칭도 달리 불러 드릴까요?"
말하는 투는 담담하기 그지없으나, 표정에는 미묘한 기색 묻어났으리라. 공경은 거짓 아니라지만 신으로서 제법 묵고 나서야 있어 본 적 없던 의부 생긴다 하니 기분 다소 모호한 터라. 그러나 미지근하게 굴기도 잠시였다. 무신의 눈 느릿이 내리감기고 뜨인다. 무엇이 어색한 것인지 제 머리 공연히 흐트러뜨리다, 격식 없이 천자하던 자세 천천히 고쳐 앉았다.
"무어, 이리 되었으니 마땅히 예를 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도 다소 어긋지더라도 너른 심근으로 유서하시길."
말과는 달리 무릎 꿇어 정좌한 채 두 손 차례로 바닥에 대는 동작 정갈스럽다. 팔꿈치 바닥에 닿을 만치 가깝다. 이어서는 깊이 고개 숙여 올리는 합수례合手礼. 짧은 시간 그리 정배頂拜하다, 다시금 고개 드는 동작까지 제법 숙정했으리라. 하나 꼿꼿이 앉은 채 사군이자 부주父主 된 신의 눈 똑바로 바라보는 눈빛만은 되바라지기가 보통이 아니다.
"제 손주 녀석들까지 이 불초녀 보살피듯 어여삐 여겨 달란 청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놈들의 무엄과 폐례는 모두 제 소갈머리 닮아 그리 된 것이니, 저를 딸로 여기실 것이라면 자금이후로는 그놈들의 방종 헐치로써 관용하여 주십사 언감히 청하옵니다."
비 갠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청명한 파랑, 말간 뭉게구름. 여름의 꽃, 마츠리 직전. 저마다 체육제 준비로 자리를 비워 한산한 부실, 활짝 열어놓은 창문. 불을 끄고 있으면 차양 아래 비쳐 들어오는 여름 볕에 밝음과 어두움 사이 그 어중간한 회색 바탕을, 소녀는 좋아했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섞인 청량한 여름 냄새를 좋아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웅성웅성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마음이 불안하면서도, 이쪽으로 향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 안심이 되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의 자그마한 수첩을 탁, 덮었다. 그리고 옆에 놓인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데. 이전에 사용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라서 조작이 어색했지만, 유심을 갈아끼우는 것으로 연동이 된다는 것과 인터넷에 백업해 둔 연락처가 그대로 돌아왔다는 것만은 반가운 일이었다. 그 요괴는, 역시 돈에 치이지 않는 것일까 따위를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그보다, 오늘은 계획했던 것이 있었는데. 슬 하교할 시간이 되었을까. 시간적으로 따져보면, 저번에 말해준 것처럼 두 시간쯤 여유는 있었고, 이후에 일을 가는 것과도 얼추 아다리 맞았으니까. 혹시 싫어하진 않을까 잠시 고민하면서, 핸드폰으로 향하는 어색한 손길. 누군가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던가를 떠올리면, 그런 일 같은 건 없었던 것 같다. 시누이 되는 요괴가 고맙게도 연락처까지 저장해 주어서. 망설이는 손가락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러버리고. 손에 든 것을 뺨에 착 붙이고서, 단조롭게 반복되는 연결음에 긴장했다. 반가운 정적, 여보세요? 한마디 쑥 들이밀어 보면서.
"선배. 바쁘지 않으면, 이쪽으로 와줄 수 있어요?"
어디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보다, 고친 머리카락은 어떻게 생각할까. 조금 신경이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