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떡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가까스로 턱을 다시 끼워맞추고 되물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춥고 비오는 날에 골판지 박스에 여자애를 내버려두고 가다니...
미쳐... 돌겠어... 어질어질해 나 현기증 나는 거 같애
잔뜩 기가 죽은 듯 귀랑 꼬리를 늘어뜨린 여자애는 가엾어보였고, 내려다보면 젖어서 아니 잠 잠깐, 잠깐잠깐잠깐, 무녀복 아래에 아무 것도 없 안돼 안 돼 소수를 세야 해...! 나는 무심코 내려다봤다가 알면 안되는 것을 알아버렸다. 얼굴에 피가 쏠려오는 게 느껴져... 고개를 돌리고 필사적으로 딴 곳을 쳐다보며, 대충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알겠다 알겠다 해버렸다. 아니, 그치만. 여긴 대로변이고. 대로변에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고.
도, 동해물과백두산이...아..젠장...!!!!
"아 알겠다고 알겠어! 알겠으니까 일단...! 이거라도 입어!"
그렇게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 던진 건... 세탁하려고 가져가던 체육복. 내 땀을 흠뻑 머금은 체육복을 여자애의 얼굴에 던져버리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상상하지 않는 거다, 히다이 유우가...!
신경쓰지 말라고 하면 더 신경이 쓰이는 게 사람인 법. 고개를 돌리고 귀를 쫑긋이 세우고선 소리를 듣는데... 음음, 갈아입는 소리가... ... ... ...아니잖아... 저 스흐으으으읍하고, 하아아아아 하고 내쉬는 소리, 어딜 봐도 내 체육복을...
".........변태 계집애."
돌아선 사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 옷매무새를 갈무리했다. 이거로 조금은 안심. 다 입었다는 소리에 다시 몸을 돌려보면...
아, 젠장...... 사춘기 남중생에게는 너무도 강한 자극이었다. 갈무리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패배.
나는 결국 큰 한숨을 내쉬며 쭈그려 앉았다... 조금이라도 숙여서 가려야만. 아니,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여우라는 건 원래 다 저런 법이야? 아니... 그보다 대로변에서 결국... 아...................... ..................................죽을래..........................
사춘기 남학생 특유의 자의식 과잉...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것만 같은 굴욕감에 귀까지 새빨개졌다.
"하...........................................그럴거면 다시 벗... 아니벗지마벗지마벗지말라고당장중지."
"제기랄... 나 이러고 어떻게 돌아가냐고..."
이대로 어디 카페에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도 쟤도 푹 젖어선 어딜가나 환영받지 못할 비주얼이다. 넷카페도... 아니아니아니아니제발 그런, 그런 거 생각하지 말자고. 아무튼 쉬어갈 곳이 없... 아 진짜 생각 좀...!!!!!
내 뇌세포를 지지고 싶다 정말...
거의 울음섞인 한숨을 내쉰 나는......
"가자... 집으로......"
그냥 집에 가고 싶어졌다. 아니.. 근데 어떻게. 뭐... 책가방으로 가리나... 그래야겠지... 다들 이상하게 보겠지만...(자의식과잉)
그 말에 다시 반쯤 체육복을 벗으려다가 당장 중지라는 말에 또 멈췄다. 덕분에 대충 걸친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버렸지만 뭐 괜찮겠지! 그나저나 유우가, 어째서 그렇게 부끄러워 하는 거지? 쭈그리고 앉은 유우가를 잠시 보다가 그동안의 연륜(?)으로 깨달았다. 아하. 오호. 이런이런~ 히죽히죽 웃는 얼굴로 가만히 유우가를 내려다 보다가, 집으로 가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우가, 그대로라면 걸어가기 힘들겠지. 후후후후...
"에엣?! 환생한지 얼마나 됐다고 죽으려는거야 유우가! 그러면 나 다시 몇 백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그건 싫어!" "아무튼 집에 가면 되는 거지?"
유우가와 비슷하게 맞췄던 모습에서 본래의 모습으로 형상을 바꾼다. 유우가보다 키가 더 큰 모습으로. 아, 물론 키 말고도 여기저기가 더 크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대로인데 키만 커지면 대나무같고 이상하잖아(?) 어쨌든 그 모습으로 돌아간 채로, 그대로 유우가를 번쩍 안아들었다. 이 모습이라 그런지 유우가, 정말로 작고 아이같이 느껴지네. 후후, 귀여워라. 곧 성인이 되는 나이인데도(옛날 기준입니다)
"어때? 이렇게 가면 빨리 돌아갈 수 있다구? 자, 그럼 갈까. 아, 집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걱정마~"
유우가를 안아들고서 그대로 공중을 딛고 뛰어간다. 사람들 눈에 띄면 유우가가 곤란한 것 같으니까, 조금 높이 수직으로 올라간 후에 천천히 속도를 올려 가볍게 뛰었다. 음~ 엄청 옛날 생각나네.
죽은 눈을 까뒤집고 아무 이야기나 하고, 책가방으로 꼴사납게 가리고서 출발. 하려고 했다. 그러나 시야 끝에서 무언가가 부쩍부쩍 자라고 커지고 아니 진짜 뭔가 쑥쑥 자라고 있지 않아?! 그제서야 의식하고 돌아보면 엄청 큰...
"..."
말도 못하고 놀랐다. 아까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야말로 허니듀 멜론이 바로 눈앞에. 책가방이 슬쩍 들어올려진다... 아니, 내 몸이 들어올려졌다. 아니 그래도 저 건장한 남중생인데 이건 좀?! 아, 아아니그보다 다 보이잖아 젠장!
그보다 나 지금 공주님 안기 당한 거야?!
남자로서의 이런저런 자존심이 몇 분 사이에 잔뜩 짓밟힌 기분이다. 적어도 그것을 훤히 보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책가방으로 덮어두는 게 낫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 미친 여우는 나를 안아들고 풀쩍 뛰어오르더니 몇십미터 상공을 부유? 비행? 하기 시작한다. 떠, 떨어지면 죽음이야... 결국 나는 존엄과 죽음, 두 ㅈㅇ 사이에서 전자를 택한 것이지.
"히, 히익..."
식겁을 해선 여우의 목을 껴안자 허니듀 멜론이 짓눌리지만, 그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저 아래를 내려다보면 오금이 다 저린다고. 그 그그그그보다 빨라지고있 있지않아?!
"아, 아와와와와와..."
마치 히다마리쨩이 낼 법한 소리를 내며, 나는 여우에게서 절대 떨어지지 않을 요량으로 꼬옥 끌어안았다. 허니듀멜론이 밀착되니 조금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아주 약간의 여유를 찾을 수는 있었는데, 그러자마자 든 생각은...
'...나, OO하고서 공주님안기 당하고 도시를 활보하고 있구나...'
Z축의 차이 정도는 있지만. 정말이지. 이런 경험 돈주고도 못한다니까. 하하...
그렇게 2층, 내 집 베란다에 도착했을 때는... 이것저것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자존심,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꼴이 된 마음 등으로 난 완전히 재기불능. 그럼에도 그것은 너무나 건강했다...
무사히 집에 도착했는데도 유우가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뛰어올때 꾹 끌어안던 유우가 귀여웠지이. 헤헤헤. 그런 생각에 흠뻑 젖은 상태라서 방에 들이닥친 불청객을 인지하는게 늦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내쪽이 불청객이긴 하다만. 아무튼간에 불청객-유우가의 가족-은 금방 문을 닫고 나갔다. 뭐야. 별 일도 아니었네. 하지만 유우가는 별 일이 맞는지 내 어깨를 붙잡고 애걸하기 시작했다.
"아우와아아아앗, 어, 어떻게든이라니. 유우가의 가족 아니야? 그럼 괜찮지 않아?"
짤짤짤짤. 어깨를 잡혀 그대로 흔들린다. 으음, 이 모습은 여기저기가 같이 흔들려서 은근히 힘들구만.... 다시 스르륵 유우가와 비슷한 나이대의 모습을 취하고선, 유우가의 양손을 잡고 말한다.
"어떻게든이라는건 정말 말 그대로 어떻게든이란거지?" "저 여자를 한입에 꿀꺽 삼켜서 방금 보여진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하면 되는거지??"
윤리관 엉망진창이라고? 어쩔 수 없잖아 나 요괴라고? 인간처럼 겉모습을 꾸미긴 했지만 인간은 아니니까. 인간의 윤리관이나 사고방식을 강요하지 말란 말이야?? ....물론 이번 건 장난이 맞지만. 설마 유우가의 가족을 잡아먹는 일이 있을까. 그냥 기억을 적당히 조작하려는 것 뿐이다. 하는 김에 겸사겸사, 다른 가족들의 기억도 좀 손을 대고.... 유우가랑 같이 지내기 위해서 말이지!
"—물론 농담이야. 유우가의 가족이지? 그럼 함부로 먹을 수 없지. 대신 기억을 조금 손보는 건 괜찮겠지?"
아, 이건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거지만? 그런 의미에서 유우가의 손을 놓고, 그대로 일어서서 아까 그 가족이 나간 문을 열고 나갔다. 2층의 복도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가서——
————5분 정도 지난 후, 나는 다시 유우가의 방으로 돌아왔다. 의기양양한 미소와 함께.
"유우가! 전부 해결했어! 이제 괜찮다구!!"
아까 전의 일도 전부 잊게 만들고, 하는 김에 나도 가족의 일원-정확하게는 친척 정도-으로 생각하게 해뒀으니까. 이제 나도 이 집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말씀.
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데? 너... 여우잖아? 그러면 여우답게 눈치를 채달라고오... 간절한 눈으로 여우를 바라보지만 여우는 어느새 (비교적)어린 모습으로 돌아가 으?헤 하는 바보같은 표정이나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어물어물 귀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설명했다.
"...그러니까, 사, 상황이란 게... 누나가 보기엔 말이지. 그러니까 내가... 윽, 이 상태고 너...는..." - 성인이 된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건 당연하잖아? "으아아아악...!!!!! 그러니까 나는 성인이 아니래도?! 자, 다시 처음부터...!" . . . - 알겠어 유우가!
활짝 웃었다. 조금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해해준 거구나.
- 저 여자를 삼켜서 없었던 일로 만들면 되는 거지?
"겠냐고오.....!!!!!!!!!!!!!!"
이 거대한 보케와 츳코미가 있었기 때문에, 원래라면 기억도 '아니 절대 안 돼 미친 요괴야!' 라고 거절했겠지만 나는 그냥... 너무 힘들어서. 이... 이 모든 일들이 너무, 아스트랄해서 그... 현실의 히다이 뇌세포에게 무리였어서.
"아... 응." 하고 허락해버리고.
나 잘했지 하며 들어온 여우를 멍하니 바라보다 홀린 듯이 쓰다듬기 시작했던 것이다. 입씨름을 하다보니 어느새 건강했던 그것도 사그라들고, 쓰다듬다보니 그래도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나는 옷장에서 수건을 꺼내 촉촉한 머리에 덮어주고는 나도 물기를 닦아냈다. 겸사겸사 들러붙은 가쿠란도 벗어놓고.
"그나저나 어떻게 해결을 한 거야? 같이 지낼 수 있다니 그런 거 보통 납득하기 어렵잖아."
그... 그거로 납득하는 거냐? 다들? 아니... 하지만 이 요괴가 그렇게까지 호언장담을 한다면 그런 거겠지.
"같이 지내는 건 역시 친척이 낫... 지 않을까."
약혼자도 별거하는 시대. 결혼해도 각방 쓰는 시대. 그것이 현대니까. 그러나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무는 것이다. 아니, 같이 살던 친척이 자기 자식이랑 결혼한다고 하면 그건 족내혼...아닌가, 근친혼...이니까 에바 아니야?
"그보다 친ㅊ..."
그러나 같이 목욕하자! 라는 기세 좋은 제안에 나오려던 말이 턱 막혀버렸다. 게다가 체육복을 벗었는데, 내 손을 양손으로 꼭 잡고선 자기 가슴 근처로 끌어당기는... 아... 아까 불발탄으로 남아있던 게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여기선 안 돼! 라고 말하는 거야. 일단 우리 만난 지 하루도 안 됐는데 같이 목욕이라니 어불성설이라고. 그보다 옛날 사람이면 혼전순결주의여야 하는 거 아냐?! 이 속도라면 우린 이미 고딩엄빠가 되어버릴 거라고. 이게 맞아?! 이름도 모르는 상대랑 목욕부터 하는 게 맞냐고!
그러니까 안 돼 라고 말 하는 거야 유우가!
"...도와줄게......"
패배. ...아니 그치만. 손이 잡혀서 시선이 그쪽으로 가다보니까. 그리고 나는 한창 때의 남학생이니까.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고.
씻고 옷 갈아입는 거 유우나한테 걸려서 히다이 혼자 ..!!! 하면서 쫄았다가 "헤~ 메이사쨩이랑 같이 씻었어? 나도 불러주지~" 같은 상식개변 발언 들어서 🙄🙄🙄🙄🙄🙄⁉️⁉️‼️‼️⁉️ 하는 걸 계기로 통성명 했을 거 같아요 🤭 그리고 뭔가 메이사라고 부를 때마다 그리운 기분이 들겠지...😌 백귀야행 현판...진짜 재밌네요...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