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어색했던 봄과 치열했던 여름이 지나고 어느새 한겨울이었다. 일본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서울의 겨울은 마찬가지로 제법 추워 길거리에는 코트를 여민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마찬가지로 린 또한 점퍼를 입고 미리 알아본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어디론가로 향하고 있었다.
"실례하겠사옵니다." 딱히 누가 듣지는 않겠지만 습관대로 인삿말을 하고서 가게에 들어서니 겨울날에 길을 나서게 한 인물이 보였다.
"어머, 먼저 와 계셨나요." 자신은 초행이니 전에 와보아 길을 아는 그보다 더 늦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많이 기다렸는지 말을 건넨다.게다가 탁자 위에는 반 이상 마신 듯한 아메리카노가 놓여있으니 꽤 오래 앉아있던 모양이다.
흐음, 가끔 알렌은 엉뚱한 부분에서 솔직하지 못한 면이 있었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단 말에 의심스럽다는 듯 장난스레 눈을 굴리다 넘어가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얻어먹는 입장이라 많이 늦는다면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생겨 원래 생각했던 대로 파르페에다 디저트까지 시키지는 못할지도 모를 것 같아서요. 아무리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말이죠."
저 둔?탱이를 끌고 여기까지 오느라 너무 많은 계?산과 노?력이 있었다. 평소 둘이서 다니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왜인지 이상한 게이트에 떨어져 정신없이 헤쳐나가기 십상이니 간만의 기회에 어떻게든 알차게 시간을 오래 끌겠다는 그런 다짐을 하고 왔는데 제 느슨하기 짝이 없는 양심이 조금이라도 조여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저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모질게 굴기 힘드니까.' 어디까지나 그런 것 뿐이다. 마음이 약해지는 게 아니다.
상대가 얼마나 허?술한지 또 실시간으로 삽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열심히 머리를 돌리며 헛?수고를 하고 있는 린은 무의식적으로 외투를 벗는걸 도와주는 알렌에게 '고마워요.'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한다.
어라, 왜 자연스럽지? 마치 준비한 것처럼 따뜻한 차를 마시자고 권하는 모습에 린은 살짝 당황하여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녹차를 한 잔만...,알렌군께서는 춥지 않았나요?" 마침 다른 사람들 보다 가벼운 차림이 눈에 띄어 괜히 민망함을 덮기 위해 생각난 말을 바로 건넨다. //4
"아니에요. 러시아에 비하면 따뜻한 건 맞을테니까요. 일본에도 겨울은 오니 아주 추울 정도는 아니라 괜찮아요." 하기야, 그의 원래 고향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온이 낮았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서울의 겨울은 아마 러시아의 봄 정도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러시아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국가에 대해 생각을 해본다.
흰 눈으로 온 사방이 덮힌 척박하며 야생이 살아 움직이는 겨울의 나라가 그녀의 머릿속 러시아의 이미지였다. 물론 어렸을때 러시아의 사회상에 대해 아예 공부를 하지 않은건 아니지만 나이도 어리고 후계자도 아니였던 만큼 그저 상식삼아 붉은 곰 예카르의 모국이자 꽤 폐쇄적인 교육방침을 가진 가디언 아카데미가 존재한다. 정도만 대강 알고 있었다. 유의할 점이라면 정보전쟁의 존재일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배려에 알렌이 진동벨을 가지러 간 사이 조금 뾰루퉁해진 얼굴로 두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그의 뒷모습을 쳐다본다. 이내 그가 뒤를 돌아 다시 돌아오기 무섭게 고개를 돌려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는 척을 한다.
'그를 싫어하지 않지만.' 아니 어쩌면 꽤 좋아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지만 생각보다도 이 다정한 순간이 좋아서 그저 생각없이 흐르는 대로 행동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무심코 해버렸다.
척박한 어머니의 대지 러시아에서 아무런 연고없는 고아 소년이 어떻게 자랐을지는 굳이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려진다. 그 끝에 만난 구원이 얼마나 소중했을지. 그의 다정함을 느끼는 순간에 린은 얄궂게도 제가 사랑하는 그 다정함이 어디에서 왔을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사람이 자신과 얼마나 다를지도.
'아,싫다.' 이러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러시아는 꽤나 추웠을것 같아요. 저도 몇 년전에 항상 이때쯤이면..." 멍하게 따뜻한 기운에 젖어 비관적인 생각을 이어가다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추억을 꺼내든다. 단 한번도 심지어 지금 제 앞에 앉은 당사자에게도 자세하게 그때의 심정을 말해본적은 없었다.
강산은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같은 것을 봐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은 다르기 마련이니까.
"제주도에서요? 음...사람이 많이 죽었죠."
식인귀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목소리에 조금 기운이 빠진다. 강산은 주변에 다른 사람이나 듣는 귀가 있는지 몇 초간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살피고, 그것도 모자라 방음 배리어까지 주위에 치고서야 마저 입을 연다.
"뭘 어떻게 한 건지 하필 제주도 주변의 해양 게이트들이 난리일 때 되살아난 식인귀가 제주도에 들어오고. 그 이후 정체를 숨기고 있던 식인귀를 호의로 받아줬던 사람들이나 그 주변 사람들이 차례대로 당하고...그러다 나중에는 연쇄 실종 사건의 범인을 쫓던 가디언들과 헌터들까지 차례로 당했었죠. 심지어는 제주도의 큰 길드 하나가 전멸하기에 이르렀더군요. 저희가 도착했을 땐 저희에게 의뢰를 줬던 정보원분도 이미 당한 뒤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즐겁게 할 수 있을리가 없긴 했다.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였지만 인간이 아니라 식인 맹수였습니다. 인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존재였어요."
여전히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을 쥐고 놀듯이 태연하게, 웃듯 말듯 그리 행동하면서도 정작 이 상황 속에서 린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는 친구니까. 친구를 위해 즐거운 시간을 위해 여기까지 왔을텐데 자신은 제멋대로 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기실, 그녀는 언제나 저의 심술속에 갇혀 제멋대로였다.
"...그때 세상이 원망스러웠어요. 마치 이렇게 추운 날에 길거리를 오가다 온 세계가 저를 저주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니 제가 상대의 좋지 않은 기억을 불러왔음을 알며서도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해버린다. 비록 나는 당신을 그녀처럼 인도할 수도 앞에 서서 이끌어 줄 수도 없지만,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으로 함께 걸어갈 수는 있을테니까.
어느새 카운터에서 차를 받아든 알렌의 옆에 다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직원에 눈이 휘둥그레지던 말던 린은 생긋 웃는다.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런 추운 날에 한 명이라도 같이 있어줄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서로 기대어 체온을 나눌 믿을 이가 있었으면 좋겠다며 아직 어렸던, 두번째 배신을 당하지 않은 나시네는 모포를 두르고 제 손을 호호 불며 그렇게 생각했었다. 옆에 기대 졸던 이가 거짓 온기에 골아떨어져 얼지 않도록 손을 잡을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있었다면.
"지금은 있는 것 같아서 좋아요. 가끔 장난질을 받아줄 사람도 있으니까요." 종업원이 내민 녹차를 제가 가로채고서 아무렇지 않게 뒤를 돌아 한 걸음 테이블로 걸어가다 뒤를 돌아 미소를 짓는다.
"언젠가는 이런 얘기를 들어줄 사람도 있겠죠. 그렇지 않나요?" 먼저 나아가는 인도자가 아닌 곁에 걸어가는 사람으로서 서겠다며 그녀에게 지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마츠시타 린은 그리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해서 질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도 하지 못하고 대신 이런 식으로 실컷 속마음을 가리다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해버릴 뿐이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