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기소침하다고 해야할까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을 겪은 사람 치고 덤덤하다고 해야할까. 눈을 내리고 반쯤 한탄이라 부를 수 있을 독백을 듣다 머뭇거리는 낌새로 고개를 살짝 돌려 먼 곳을 잠시 바라본다.
"바티칸이 직접 나서 몇 번이나 봉신을 시도했음에도 실패한 상대에요.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아요." 그 바티칸이 원흉의 서포트를 받아 침입한 적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당했으니 한 개인이 무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신도, 운명도 인간의 의지로 거스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상대에게 말해서 좋을 건 없어보였다. 더군다나 그렇지 않아도 평소와 다르게 묘하게 예민하고 의기소침해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고 얘기를 건넨다.
"미안해요. 하지만..." 다시 머뭇거리다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말을 잇는다.
"제겐 중요한 일이라." 바티칸의 심문에 진저리를 쳤음에도 저도 어쩔 수 없는 종교인이라고 린은 죽은 심장과 관련된 일에는 상당히 예민해져있었다.
위로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지만. 사실 정말 그럴 생각이 없는지는, 스스로도 잘 모를 일이다. 나는 지금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습격 직전에도 에브나랑 비슷한 얘기를 나눴던 것 같다. 요 근래에는 나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연달아 부딫혀오고 있다. 어른처럼 유능하게 사태를 해결할 수도 없고, 아이처럼 무책임하게 울 수도 없는 위치인 셈이다.
".....뭐. 이해 해. 딱히 의심받고 있다고 생각한건 아니고. 자그마한 심술을 부려봤을 뿐이야."
생각보다 망설이면서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썩 마음이 불편해져선 창가로 시선을 돌리며 농담을 거뒀다.
"그렇군. 특별반의 길드화가 성립되었어. 내가 UHN지부에 찾아간김에 담당자와 교섭을 좀 잘 풀었거든."
단톡방에도 올렸던 것 같은데, 아무도 관심이 없나보다. 뭐 이해한다. 나 포함 다들 바쁜 시기니까.
조금 망설이기나 할 것이지. 전혀 찔리지 않는것마냥 어깨를 으쓱이는 소년 앞에서 린은 순간 다시 한숨을 쉬거나 아니면 팔짱을 끼고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망설였다. 그 사이에서 그녀가 택한 답은 그저 눈을 굴리며 알겠어요. 라고 전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어조로 한 마디를 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녀도 남들에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이미지로 보이는 건 매한가지였다.
"...최근에 축제를 즐기시고 있다고 들었는데 소식을 받지 못한 사이 꽤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바티칸에 적이 기습침공하고 도시 전체가 마비되어 연락을 볼 틈이 없었다 말하면서 다시 차분한 얼굴로 돌아온다. 심술을 부렸다 토로하며 창가로 몸을 돌리며 평소 보지 못한 모습을 보이니 지쳐도 많이 지쳤나보다 싶었다.
"정말 고생하셨다고 말하고 싶지만...솔직하게 말해서 의외에요. 대운동회까지 가지 않더라도 최근 사건이 있으니 그들이 저희의 독립을 허가할거라 생각하지는 못했어요. 아무리 그 뒤에 암묵적인 조건이 걸렸다고 해도 말이죠." 다시 말을 끊고 아주 짧은 침묵을 유지하다 한마디를 남긴다.
"어머," 가볍게 나긋나긋한 어조로 감탄사를 작위적으로 터뜨리며 웃는 입가를 가리려는 것처럼 손을 올린다. 이내 바로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뀌었지만. "이유는 안정을 취하시는 동안 시윤씨께서 스스로 생각해보세요."
괜찮을거라 약속했던 게 누구였더라. 하나도 괜찮지 않아보이는 모습을 앞에 두고서 부루퉁한 얼굴을 하다 표정을 푼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지쳐보이는 사람 앞에서 불만을 드러내는 건 좋지 않은 행동이었다. 위선을 꾸며내며 위악적으로 구는 린도, 가면 뒤에 숨은 나시네도 각자 다른이유로 그렇게 행동할 성격은 되지 못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다르긴 다르군요." 크게 놀라는 기색없이 그저 한숨을 쉬려다 삼키며 눈을 내려 살짝 아래를 응시했다.
"아마 그 과정에서 가지치기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미 그 인원을 산정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라도 우호적인 제스처를 확실히 하긴 해야겠네요." 아니 정확히는 겉이라도 어느정도 숙이고 들어간다는 표시를 해야하려나. 무의식적으로 조소를 지으려다가 말고 담담한 얼굴로 바구니를 뒤진다.
"음료 드릴까요?" 심각한 얘기가 계속되니 목이 막힐것 같아 작은 음료를 두 병 꺼내들고 하나를 건넨다. //11
부루퉁한 얼굴에 쓴 웃음을 지으면서 돌려줬다. 그녀의 앞에서는 나름 어른스러움을 유지해왔던 나다. 지난번에 서로 심각한 얘기에 대한 정보를 공유 했을 때, 건투를 빌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러고 나선 엉망진창 패배하여 병실에 누워 궁상을 떨고 있으니. 친한 사이로써, 다소 속상한 몰골이긴 할 터이다.
"....."
가지치기와 그 인원의 산정에는 아까와 다른 느낌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직접적인 동의 표시를 낼 순 없으나, '뭐어.' 같은 느낌으로.
"그래서 그 사람들은 우리가 일방적으로 이득을 취한 뒤에 목덜미를 물어 뜯어 배신할 맹수라고 여기더군. 슬슬 힘도 붙었겠다, 과연 그런 녀석들을 내버려두면 위험하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곤,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녀가 건넨 음료를 조금 홀짝여 목을 축인다.
"나는 우리가 그 정도로 영리해보이냐고 물었어. 우린 그냥 철없고 미숙한 학생이라 그런걸 잘 모를 뿐이랬지."
신랄하지만 꾸밈 하나 없는 평가라고 새삼 생각하면서, 나는 웃음을 작게 터뜨렸다.
"그랬더니 원하는대로 자율성을 존중 해줄테니, 나보고 말을 알아들을 아이를 잘 키워보라더군."
"아신다면 그걸로 되었어요." 새침하게 그러나 딱히 이의를 제기한다는 속뜻없이 받아들였다는 듯이 말한다. 혼자서도 괜찮다고 말하고 돌아섰던 사람이 디버프를 잔뜩 달고 병실에 있으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네요. 일리 있는 추론이에요. 저희는 어찌보면 UGN의 의뢰를 받아 그쪽 입장에서는 어느정도 적대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으니까요." 대충 시윤의 비언어적인 뜻을 알아들었다는 것처럼 역시 그런가요. 라 작게 중얼거린다.
"..." 이번에는 린이 침묵한다. 다소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의심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시윤씨는 중학생이에요. 적어도 내막을 모르는 그 쪽이 보기에는요. 물론 그 자리에서 솔직하게, 그러나 피해는 가지 않게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을 '중학생'을 Uhn도 보통으로 여기리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이없다는 눈빛을 거두고 참았던 한숨을 내쉰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네요 잘 넘어오셨고 고생하셨어요. 그러니 저희는 길드화를 허락받은 대신 저희의 존재의의에 대해 설득할 유예기간을 가지게 된 셈이군요." 어쩌면 자유를 주며 그 자유를 틈타 불온한 뜻을 드러내거나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을 솎아내려는 의도일지도 모른다. 또한, 린은 일부러 살짝 지친듯한 얼굴을 만들어 그래도 잘 되어서 다행이라는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uhn의 말은 마치 윤시윤에게 반항적인 학생을 솎아내라고 말한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