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요괴를 대하고 있자면 옛적에 버려둔 맑은 이성 다시금 되찾을 듯한 기분이 든다. 쉽게 말해 곤란한 문제는 죄 때려부숴 해결하는 무신께서도 골치가 아플 지경이라 이 말이다. 또 그 괴상한 웃음소리 듣자마자 그대로 손 놓아 떨어뜨려버릴 작정이었는데, 이어지는 말은 그 행동 재고하게끔 하기에 충분했다.
"신앙이라. 네 녀석이?"
요괴도 무언가를 신앙할 수 있으니 그 점은 차치하더라도, 신앙할 거리 주지도 않았건만 무슨 소린지. 의뭉스러운 행태에 가늘어진 시선 쏘아 보낸다. 어린 요괴 따위에게 휘둘려 이 녀석 깨물기도 싫고, 뜬금없는 신앙 이야기에 관한 설명도 들어야겠다 싶어진다. 무신은 근처 창턱을 향해 요괴 모습을 한 아야나를 툭 던졌다. 알아서 착지하라는 듯. 여전하게도 퉁명스러운 행태였으나 적어도 신발장에 쑤셔넣었을 때보단 신사적인 손길이었으리라.
한데 이 요괴 녀석, 허락하지도 않은 제 이야기 갑자기 늘어놓는다니. 그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제법, 못 들은 체 마냥 넘기기엔 옛 시절의 추상이 떠오르게끔 하는 '화두'를 닮은지라. 무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큰둥히 귀찮아하던 기색 조금은 사그라들었으리라. 눈 마주치기 귀찮아 아야나에게 시선도 제대로 주지 않았던 것마저 그만두었다. 한때는 현묘한 천계의 이치가 머물렀던 두 눈이, 어린 요괴에게 향했다.
"물음 돌려주겠노라. 너는 어찌하여 살아 있느냐? 무엇을 위해서란 방향성이나 표목 따위가 아닌, 네 생명 그 자체의 이유를 묻는 것이다. 너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어미의 배에 수태되어 태어난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너라는 데에, 응연한 이유가 있느냐? "
네코바야시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처음으로 인지한 것은 자신이 포목점 뒤편의 거실 한복판에 누워있다는 것이었다. 기모노를 시착하기 위해 주인장의 안내를 받아 들어왔던 평범한 가정집의 모습 그대로다. 창밖에서는 따스한 봄볕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몽롱한 정신을 겨우 붙들고 차가운 마룻바닥을 짚어 몸을 일으키려 하면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통증. 미간을 좁히고서 손을 바라보면 손톱이 꺾인 자리에 무언가 질척한 것이 발라져있다. 그를 보고 스멀스멀 떠오르는 공포스런 기억들. 가슴팍을 내려보면 교복 명찰이 붙었던 자리가 뜯겨져 있고, 이어서 패닉에 빠진 채 누군가에게 살려달라 처절히 빌었던 것이 어슴푸레 떠오른다. 일들은, 꿈이 아니다. 호기심에 들어갔던 경고문 붙은 방문을 홱 돌아보면 처음부터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던 것처럼 굳게 닫혀있을 뿐이다. 언제 빠져나왔지.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하고 다시 그쪽을 돌아보면 포목점 주인장이. 공포스러웠던 그 얼굴이. 흠칫 놀라 앉아있는 채 뒤로 물러나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살아있는 것을 보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이겠지. 그저 꿈이라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터무니없는 공포마저도 고양이의 호기심을 잡아둘 수 없었으니. 두려움 서린 눈으로 주인장을 올려보며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벌려 무언가 말하려 했다.
"저기..."
아까 보았던 것은.
들려왔던 소리는.
방 안에 자라나있던 나무는.
새까맣게 타버린 시체는.
무엇이었나요?
그런 것들을 말하려는 순간,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목소리가 목구멍을 넘어오지 못하고 턱 막혀서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저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릴 뿐.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정신이 들기 전, 몽롱함 속에 들려왔던 목소리, "씀씀이를 다해라." 그건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제가 무얼 했는지도 당했는지도 모르고서 잔뜩 당황스러운 시선으로 포목점 주인장을 올려보고만 있는 네코바야시였다.
꽃같이 살아본 적 없으니, 실상 네가 무얼 요구하던 그를 따다가 바칠 재간은 전무하다. 우리 사이의 낭만은 온갖 욕설처럼 구질구질했고 자정 지나면 그늘질 시한부와 같았다. 이렇든 저렇든 동이 트면 사라질 것이라, 밤사이 무엇을 행하던 이후 책임은 얄팍하다. 다음을 기약할지언정 다가올 재회를 확신하지 않음에 기대 또한 무상했다. 너도 이를 알리라 믿는다. 어차피 하루만 사는 인연인 김에 말로는 무엇이든 못 해줄 것도 없었다. 따라 대답에 자신하며 고개를 주억거림도 당연하다. 꽃에는 무지해 히비스커스의 색조차 알지 못함으로 너는 영영 나에게서 여름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렇듯 후일이 오지 않으리라 확신했으나, 내 기질은 불같이 변덕만 그득해서, 미련에 네 손을 글리긴 했다. 내일 이맘쯤엔 속이 지긋해져 인을 지워줄지 모르는 일이니 이랬다저랬다 하는 성질에 희망을 둬도 좋다. 물론 그조차 네 성에 차지 않음을 알아 머리채 쥐어지고도 마냥 저항 없이 목을 내줬다.
"하도 개새끼 개새끼 하니까 좀 전에 멍멍 짖어줬잖아? 그 와중 개짓거리 하나 못할까."
실실 웃지 말고 저주나 해라. 순정은 내 분수에 안 맞다. 허리 반쯤 꼬꾸라져 손에 끌려가다시피 몸을 기울였다. 너와 비견해 한참 위에 있던 눈높이가 이제야 한 데 맞춰진다. 더욱 가까이 내밀었다. 지척을 막은 간극은 틈새라고 칭하기에도 협소하다. 네가 분을 삭힐 때마다 숨이 닿는다. 이 선만 넘으면 너는 내 것이다.
머리맡에서 성질부리는 손목을 틀어잡았다. 뿌리치지 못하게 힘주어 조였다. 서서히 아래로 내렸다. 일련을 행하는 동안에 시선만큼은 네게 주었다. 여분의 팔만 움직여 네 남은 손도 단단히 부여잡는다. 호흡이 선명하다. 노기가 잔뜩 꼈으나 상관할 바 아니다.
"앞으로 나 없이는 못 살게 만들었다, 왜. 나 버리고 떠날 때 천 리도 못 가서 발에 붙 붙어 뒤져버려라. 제발."
대답은 필요 없다. 곧 먹혀들어 듣지도 못한다. 마지막 경계를 넘는다. 앗아갔으니 내 것과 마찬가지다. 묵언하며 입술 맞대 숨을 포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