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불 대신 수액걸이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 쥔 것을 그대로 내던진다. 손등에 꽂혀있던 나비침이 빠지고 꽤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바닥에 수액과 폴대가 나뒹군다. 병실 안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집중되는 것도 느껴진다. 근데 뭐 어쩌라고. 그거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이가 없는 말을 들었는데.
"—담당이라고?" "그 담당이 이렇게 될 때까지 어디에 있다가 이제 기어나와서, 상관 있다고 하는 건데?"
손등에서 나는 피를 막을 생각도 안 하고, 분을 삭이지 못한 채로 결국 왼발로 침대 난간을 거칠게 차버렸다. 항상 쓰던 발이 아니라 다소 어색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침대가 덜컹거릴 정도는 됐다. 그래도 역시 격양된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차라리 입다물고 꺼졌다면 금방 가라앉았을텐데.
"이제 담당도 뭣도 아니잖아! 어차피 이제 레이스도 못 나가니까 담당 같은 거 필요도 없고!!" "그러니까 그냥 꺼지라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나서,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고른다. 머리로 쏠렸던 피가 조금 진정되고 나서야 생각났다. 그냥 너스콜이나 누를 걸, 괜히 일을 크게 만들었나. ...모르겠다. 잠이 부족해서 그런지 더 생각하기도 싫고 머리도 아프고.... 그대로 돌아누워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무시하면 알아서 돌아가겠지. 한바탕 큰 소리를 냈으니 간호사가 와서 데리고 나갈지도 모르고. ....부모님이 오시면 알아서 막아줄테니까, 오실 때까지 무시하고 있어도 되겠고.
이마에 수액걸이가 부딪혔다. 그리고 와장창 소리를 내며 튕겨나갔다. 수액이 퍽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물을 줄줄 흘렸다. 머리 한 구석이 싸늘하게 아팠다. 그걸 다스릴 틈도 없이 쨍한 목소리로 소리치는 메이사. 그건 선명한 원망이다.
격앙된 질타. 침대를 걷어차서 덜컹거리는 철제 소리가 전부 정신 없다. 안경도 어디론가 떨어져버렸고, 보이는 거라곤 실루엣과 피범벅인 메이사의 손 정도.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다가섰다. 뭐가 또 날아올지도 모르지만.
"...미안해."
내 피가 묻은 손으로 메이사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미안해 다음은 뭘 말해야 하나 고민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다. 머리가 완전히 바보가 된 기분. 피로 축축한 손을 당겨 메이사의 몸을 끌어왔다. 그리고 껴안았다.
찡그리고서 말한다. 독한 술이 목에 걸린 것처럼 뜨겁고 쓰렸다. 이 느낌을 알고 있다. 유성우 아래에서 이적신청서를 받던 때 꼭 이랬다. 나는 지금 슬픈지도 몰랐다. 아니, 슬프겠지. 생각해보면 슬픈 게 당연하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목소리가 떨렸다.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니까 메어오면서 말이 끊긴다.
축축해, 기분나빠서 손을 떨치려던 찰나, 그대로 손이 당겨지고, 누우려던 몸은 다시 일으켜진다. 당황한 머리로 어떻게든 상황파악을 하면 어째선지 그대로 끌려가서 품에 안겨있었다. 또 다시 무언가가 울컥 올라온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이렇게 끌어안고 사과하면 끝날 일이냐고. 그런다고 내 다리도, 망해버린 그 레이스도, 나빠진 내 실적도, 그 무엇 하나도 달라지는 일이 없는데. 어쩌라는거야.
"시끄러워, 그냥 꺼지라고. 가버리란 말이야!" "진짜 꼴도 보기 싫어. 이거 놔. 저리 가! 나가! 나가라고!!"
마음 같아서는 바닥에 던져버리고 싶지만, 손등도 아프고, 잠이 부족해서인지 손에도 힘이 별로 안 들어간다. 그래서 아까 던질 때도 좀 삐끗한 감이 있었지. 아무튼 휘감은 팔을 떼내려고 해보거나, 어깨를 치거나 해보지만 아무래도 조금 전에 침대를 걷어찬 게 마지막 힘까지 짜냈던 건지 영 힘을 못 쓰는 채였다. ...짜증나. 치밀어오르는 짜증에 무심코 평소 습관대로 오른쪽 다리로 확 걷어차려고 하다가—
"——윽, 아으..."
눈 앞에서 또 하얀 빛이 터진 느낌이다. 무릎에서부터 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몸은 저절로 움츠러든다. 젠장. 젠장.... 내가 왜 이런 꼴이.....
품 안에서 이리저리 버둥거리는 메이사를 더 꼬옥 껴안으면, 제풀에 지친 건지 잠시 잦아든다. 조금 진정된 건가. 생각하며 한숨을 내쉴 즈음― 옆구리를 툭 치는 느낌. 그리고 얼굴을 온통 찡그리고 식은땀을 흘리는 메이사.
내가 포옹을 풀고 너스콜 버튼을 찾을 때, 아니나다를까 이미 소란스러운 소리에 간호사 여럿이 도착한 참이다. 떨어진 수액걸이와 이마가 찢어진 내 꼴, 수액도 빠지고 무릎 통증으로 끙끙거리는 메이사라는 개판을 마주하게 만들어버렸다.
"...죄송합니다."
의사를 불러오러 가는 간호사과 떨어진 수액 등을 수습하는 사람, 그리고 나를 응급실로 처치하러 이끄는 사람 등. 북적거리고 혼란스러운 상황 가운데에서 메이사를 곁눈질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간다.
"메이사."
말해도 되나. 그렇다고 이대로 말도 없이 떠나는 게 맞나. 아니, 하지만.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없이 떠나는 것 가지고 메이사가 신경쓰겠나. 그렇지만 아까 소리치던 메이사는... 내가 느낀 게 맞다면, 메이사는 나를 다시 만나서 조금은 기뻐보였는데. 내가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지도 모르지. 그래도...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집어들었다. 이제 제대로 보이는 메이사의 눈을 마주 본다.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