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진 순간에는 모든 것이 슬로우모션으로 보였다. 마군을 돌파하기 위해 다소 무리했던게 잘못이었나. 앞서 가던 아이에게 충돌하고, 그대로 그 아이의 발이 꼬여서— 누가 봐도 나보다 큰, 거구의 우마무스메가 균형을 잃고 넘어진다. 내 위로. 멈춰야 한다고 뒤늦게 든 판단은 이미 내딛은 다리를 따라가지 못했고, 넘어지는 아이에게 깔린 채 경기장의 주로를 뒹굴었다.
맨 처음에는 통증보다는 충격에 가까웠다. 무릎에서 느껴진 충격은 그대로 신경을 타고 올라와 눈 앞에서 하얀 빛이 되어 터졌다. 그리고 한 발 늦게 찾아오는 폭발적인 통증. 묵직하게 짓눌리는 상태라 팔을 뻗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무릎을 부여잡는다. 아니, 잡으려고 했지만... 아프다는 말로 감히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통증은 무릎에 손을 대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렴풋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더는 레이스도 달리기도 하지 못하게 될 거라는, 담담하게 내리는 선고와도 같은 생각이. 그럼에도 공포와 혼란과 두려움에 범벅이 된 시선으로 네가 항상 있었던 곳을 바라본다. 알고 있다. 거기엔 다른 아이들의 트레이너들 뿐이고 너는 없을 거란 걸.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사라진 이후로 너는 영영 떠나버렸다고, 그래서 나는 혼자서 트레이닝을 하고 레이스를 뛰는 거라고 알고 있는데, 알고는 있는데도 간절하게 찾아버린다. 그래도 현실은 변하지 않아서, 다급하게 달려오는 사람들 사이에 나의 미련만이 어른거릴 뿐.
"—유, 우가..."
미련하게 중얼거리고 나서야 의식이 꺼진다.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색이 덮어가는 시야에도 역시 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병실 침대 위였다. 어쩐지 멍한 기분이라 의사의 설명도 부모님의 오열도 현실감이 없었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정신은 어딘가로 가버린 것 같은 느낌. 내 일이 아니라, 나는 공중에 떠 있고 이 상황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보는 듯한 느낌조차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충동적이라고 해야할지, 묘하게 덤덤한 채로 핸드폰을 들어 네게 뭐라고 보냈더라.
그렇게 보내고 차단해버린 후에는, 현실감은 없지만 어쩐지 눈물은 멈추지 않아서 베갯잎을 축축하게 적신 채로 밤을 지새우다 커튼 사이로 어슴푸레하게 새벽 빛이 밝아올 때쯤, 수액의 라인을 잡은 팔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혈관통에 신음하며 간신히 잠을 청했던 것 같은데. ...별로 못 잔 느낌인데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이 깨버렸다. 회진인가... 귀찮아.... 어차피 다친 곳은 무릎 뿐이니까, 자는 사이에 슥 보고 가면 안 되는 건가. 피로에 절여져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을 들어 눈가를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 초점이 반은 나가있는 눈으로 문 쪽을 바라보면 거기엔 예상했던 의사라던가 간호사가 아니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있어서. 눈을 몇 번인가 깜빡여도 사라지지 않았다. 내 미련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선명하고, 생동감있는....
여기 히다이도 겨울에 떠났을 테니까... ....산마캔 직전이나 직후 일반 레이스 시점이 아닐까요? 다리부상 세계선 메이쨔는 대상경주는 못 나갔을 것 같고.... 그러니까 아마 가을쯤... 가을 후반 정도가 아닐지...🤔 이번에야말로 마구로에서 1착하고 중앙으로 레드카드 날리러(...)가려고 했는데 다리 뽀각했다는 느낌이겠네요
난 메이사를 떠났다. 내 생일 하루 전에. 자잘한 짐들은 다 본가 창고에 처박아놓고 챙길 것들만 챙겨 도쿄로 갔다. 이미 중앙 트레센에 취직은 해둔 채였다. 그다지 대단한 트레이너는 아니었고 그저 교관이었지만 충분했다. 내가 필요했던 건 메이사를 떠나는 거지 출세나 돈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왜 떠났냐고? 뭐 이런 저런 이유가 있다. 굳이 많이 말하고 싶진 않지만, 내가 메이사를 떠난 건 메이사를 위함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게 위선이라면 할 말 없지만.
그걸 읽고나자 메스꺼웠다. 아니, 그저 관심을 끌어보려고 한 말일 수도 있겠지. 메이사는 알잖아. 내가 무릎 때문에 달리지 못하게 된 거... 그냥, 중요한 대상경주 무렵이고 심란해서 장난 한 번 친 걸 수도 있다니까.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면서도 마음의 한 구석이 파르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어서, 나는 그 길로 비행기를 예약하고는 공항에서 밤을 지새다 새벽에 아무거나 타고 출발했다.
무슨 정신으로 츠나지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오고, 안카자카의 병원들을 일일히 찾아가 새벽동안 귀찮게 군 결과, 나는 피로와 불안에 찌든 채로 메이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담당 트레이너라며 츠나센 ID 카드를 보여주니까 쉽게 들여보내주더라. 버릴까 했던 게 이렇게 쓰일 줄은...
간호사에게 진단명을 물어보고, 가슴이 뻐근하게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고서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누가 나에게 질나쁜 장난이라도 치는 기분이었다. 어디서 '사실 몰래카메라였습니다!' 라며 놀래켜주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이지 최악이지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메이사를 위해서 떠나왔는데, 그래서 혼자 달리다가 다시는 레이스를 할 수 없게 됐다니. 아니, 말도 안 되잖아. 그러니까, 이 문을 열고 내가 깜짝 놀라면 그런 전개로 갈 거라니까. 아, 다 웃으며 넘겨주겠다고. 오늘만큼은 나도 대인배니까?
붕뜬 생각을 하며 병실의 문을 열면... 커텐 바깥에 놓여있는 익숙한 사이즈의 러닝화가 보인다. 내가 싫어하는 병원 냄새가 코를 찡하게 울렸다. 커텐을 젖히면 곤히 자고 있는 메이사가. 오랜만이라서 반가웠다. 회피하고 싶어하는 머리가 계속 다른 생각을 해댄다. 하지만 몸은 이미 이불자락을 들추고 수술된 자국을 바라보고 있다. 내 무릎이랑 똑같네. 어떻게 이렇게까지 닮을 수가 있나...
멍하게 보고 있다가, 네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툭툭 떨어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피로와 불안에 절은 머리가 말을 내뱉었다.
가까스로 초점을 되찾은 시야에 비친 건 우는 얼굴이었다. ...어쩐지 짜증이 난다. 그동안 몇 번을 연락해도 거들떠도 안 보더니 이렇게 되고 나서야 한달음에 달려온거냐고. 그것도 질질 짜는 채로. 말을 잇지 못한 채로, 어떤 감정인지 모른 채로 고개를 숙이면 이불 아래에 숨겨놨을 수술한 무릎이 드러나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눈에 담으니, 이제야 폭발하듯 절망감이 덮쳐온다. 병원에 실려올 때까진 덤덤했는데. 정말이지 이제와서...
"....부른 적 없어."
뭔지도 정확히 모르겠는 주제에 울컥울컥 올라오는 감정으로 떨리는 손을 뻗어 다시 이불로 덮어 가린다. 보이지 않게 가리면 조금이라도 진정이 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지라. 아, 그래. 부르긴 했지. 경기장에서 다친 직후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기억은 남아 있다. 하지만 그게 들렸을 리도 없고, 그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더 짜증이 났다. 내가 그렇게 부를 걸 알면서도, 그 정도로 잘 알면서도 너는.....
이불을 꽉 쥔다. 손등에 잡힌 라인으로 역류한 피가 빨갛게 번져가고 있었다. 다리가 멀쩡했다면 몇 번이고 이불도 너도 걷어차버리고 있었을텐데.
"다리가 부러지든 팔이 부러지든 이제 너랑은 상관 없잖아." ".....그러니까 당장 꺼져."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불 대신 수액걸이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 쥔 것을 그대로 내던진다. 손등에 꽂혀있던 나비침이 빠지고 꽤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바닥에 수액과 폴대가 나뒹군다. 병실 안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집중되는 것도 느껴진다. 근데 뭐 어쩌라고. 그거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이가 없는 말을 들었는데.
"—담당이라고?" "그 담당이 이렇게 될 때까지 어디에 있다가 이제 기어나와서, 상관 있다고 하는 건데?"
손등에서 나는 피를 막을 생각도 안 하고, 분을 삭이지 못한 채로 결국 왼발로 침대 난간을 거칠게 차버렸다. 항상 쓰던 발이 아니라 다소 어색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침대가 덜컹거릴 정도는 됐다. 그래도 역시 격양된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차라리 입다물고 꺼졌다면 금방 가라앉았을텐데.
"이제 담당도 뭣도 아니잖아! 어차피 이제 레이스도 못 나가니까 담당 같은 거 필요도 없고!!" "그러니까 그냥 꺼지라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나서,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고른다. 머리로 쏠렸던 피가 조금 진정되고 나서야 생각났다. 그냥 너스콜이나 누를 걸, 괜히 일을 크게 만들었나. ...모르겠다. 잠이 부족해서 그런지 더 생각하기도 싫고 머리도 아프고.... 그대로 돌아누워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무시하면 알아서 돌아가겠지. 한바탕 큰 소리를 냈으니 간호사가 와서 데리고 나갈지도 모르고. ....부모님이 오시면 알아서 막아줄테니까, 오실 때까지 무시하고 있어도 되겠고.
이마에 수액걸이가 부딪혔다. 그리고 와장창 소리를 내며 튕겨나갔다. 수액이 퍽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물을 줄줄 흘렸다. 머리 한 구석이 싸늘하게 아팠다. 그걸 다스릴 틈도 없이 쨍한 목소리로 소리치는 메이사. 그건 선명한 원망이다.
격앙된 질타. 침대를 걷어차서 덜컹거리는 철제 소리가 전부 정신 없다. 안경도 어디론가 떨어져버렸고, 보이는 거라곤 실루엣과 피범벅인 메이사의 손 정도.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다가섰다. 뭐가 또 날아올지도 모르지만.
"...미안해."
내 피가 묻은 손으로 메이사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미안해 다음은 뭘 말해야 하나 고민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다. 머리가 완전히 바보가 된 기분. 피로 축축한 손을 당겨 메이사의 몸을 끌어왔다. 그리고 껴안았다.
찡그리고서 말한다. 독한 술이 목에 걸린 것처럼 뜨겁고 쓰렸다. 이 느낌을 알고 있다. 유성우 아래에서 이적신청서를 받던 때 꼭 이랬다. 나는 지금 슬픈지도 몰랐다. 아니, 슬프겠지. 생각해보면 슬픈 게 당연하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목소리가 떨렸다.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니까 메어오면서 말이 끊긴다.
축축해, 기분나빠서 손을 떨치려던 찰나, 그대로 손이 당겨지고, 누우려던 몸은 다시 일으켜진다. 당황한 머리로 어떻게든 상황파악을 하면 어째선지 그대로 끌려가서 품에 안겨있었다. 또 다시 무언가가 울컥 올라온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이렇게 끌어안고 사과하면 끝날 일이냐고. 그런다고 내 다리도, 망해버린 그 레이스도, 나빠진 내 실적도, 그 무엇 하나도 달라지는 일이 없는데. 어쩌라는거야.
"시끄러워, 그냥 꺼지라고. 가버리란 말이야!" "진짜 꼴도 보기 싫어. 이거 놔. 저리 가! 나가! 나가라고!!"
마음 같아서는 바닥에 던져버리고 싶지만, 손등도 아프고, 잠이 부족해서인지 손에도 힘이 별로 안 들어간다. 그래서 아까 던질 때도 좀 삐끗한 감이 있었지. 아무튼 휘감은 팔을 떼내려고 해보거나, 어깨를 치거나 해보지만 아무래도 조금 전에 침대를 걷어찬 게 마지막 힘까지 짜냈던 건지 영 힘을 못 쓰는 채였다. ...짜증나. 치밀어오르는 짜증에 무심코 평소 습관대로 오른쪽 다리로 확 걷어차려고 하다가—
"——윽, 아으..."
눈 앞에서 또 하얀 빛이 터진 느낌이다. 무릎에서부터 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몸은 저절로 움츠러든다. 젠장. 젠장.... 내가 왜 이런 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