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 기척에 입이 곧장 다물렸다. 인자 가득한 승려의 낯에 다시금 이곳이 신성한 절임을 깨닫는다. 인간 불신자래도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남을 교리 삼는 반듯한 신의는 썩 마음에 들어서 단정한 목례로 맞받아쳤다. 고개 듦과 동시에 어깨에 오르는 작은 것. 사뭇 풀린 마음에 고개를 기울여 참새 머리통에 뺨을 살풋 대었다가 이윽고 달아나자 아쉬운 마음을 목 한 번 문지르는 것으로 달랜다. 좋긴 하지, 절은. 탐욕을 기피하고 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자신의 뜻과 일치하여. 짙은 산림 향 실은 바람이 젖은 상념을 말렸다. 그러나 이어 그것을 행한 게 바람이 아님을 알아차려서, 삽시간에 감성을 뒤로 밀어두고 이성을 앞세운다. 자신은 이곳에 수행하러 온 성결한 승려가 아니라 한갓 빼앗긴 것들을 되찾기 위해 걸음 한 요괴였으니. 다각, 말발굽 소리에 어쩔 수 없이 시선을 올리면 일시에 눈을 찌푸릴 듯한 황금빛 광명. 일순 세상 위로 앉는 태양빛처럼 퍼진 관념을 떠올린다. 태양, 해, 빛, 광채. 그것들은 곧 희망이고 영광이 된다. 일명, 희망이자 영광을 두른 것이 정반대의 것을 뱉어냈다. 어둠, 절망, 오명 같은 것들. 발치에 죽음이 넘실거렸다. 비로소 태양임을 받아들인다. 만물을 살라 먹는 겁화, 지옥에서 끓는 용광로. 그것들과 같은 류의. 암만 종족 다툼이 심하대도 자신도 요괴다. 절로 시비 거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기분이 팍 나빠져 심기 거슬린 기색을 숨길 새도 없이 와락 표출한다. 으레 그렇듯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지나치는 인영을 시선으로 쫓았다. 신계의 탕아가 따로 없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비우듬히 기울였다. 지나치게 어이가 없으니 말문이 막혔다. 제 물건을 멋대로 가져가놓고, 마치 돌려줄 것처럼 주소 적힌 종이를 넣어뒀으면서 하는 말이 고작 저거다. "진심이야?" 할 말이 겨우 그거야 겨우? 히무라 나기? 속으로만 한다는 게 그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하도 기가 막혀서. 별로 나와도 상관은 없었지만, 황당하단 티를 너무 냈단 점이 좀 거슬리고. 본디 눈앞 상대가 신이라면 경외나 존경은 불가해도 경어 정돈 썼으나 어쩐지 이놈에게 써주긴 자존심이 상한다. 애초에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으니 마음대로 하기로 했다. "그 낯짝 익사시켜주고픈 심정도 포함된다면, 그래, 옳겠지." 이리도 비아냥댈 의도는 없었다. 단순하게 가져간 것들 어딨냐, 내놓으라 말해 받아 가고 끝. 그럴 심산이었는데, 이놈. 목전에다가 요괴 머리통이나 와르르 쏟아놓고 시큰둥하게 구니 꼭지가 당장이라도 나갈 것 같다. "세목은 집어치우고 내 것이나 내놔, 탕아 자식아. 지금 저 요괴 꼴로 만들고 싶은 걸 참고 있으니." 눈이 심해 부근을 더듬듯 가라앉았다. 기껏해야 노래로 사람 홀리거나, 격 쌓은 인어들은 어느 정도의 미래 예지가 가능한. 수중전을 제하면 전투력이 그리 높지 않은 인어건만 분노란 무엇이고 귀속감이란 무엇인지⋯⋯.
살려 주시와요! 아야나는 착하게 산 캇파인 것이와요! 먹어도 맛 없는 것이와요! 아이구, 조금 겁만 주려던 것이 아무래도 지나치게 잘 먹혀 들어간 모양이다.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음흉한 속내 지닌 좌부동은 짐짓 근엄하게 턱을 괴는 체 했다. 그리고는 또 말을 이어가는 것이다.
"듣자 하니, 어린 갓파가 그리 몸 보신에 좋다 하던데..."
일부러 눈 앞의 동그란 갓파를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물론 사실 무근인 이야기지만(게다가 다른 요괴를 입에 대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 없지만) 이리도 반응을 귀엽게 하는데, 어찌 여기서 그만둘 수 있을까.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비죽비죽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더는 숨기기가 힘들다. 상대에게 이 웃음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으나...
"해서, 어찌 해 주랴?"
이대로 메챠쿠챠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먹이로 삼아 주랴? 아니면... 그냥 놓아 주랴? 여전히 턱을 괸 상태 그대로, 시선만 눈 앞의 아기갓파와 맞추어 빤히 바라본다. 능글거리는 특유의 웃음은 여전했지만, 이미 눈빛은 완전히 어린 손녀를 귀여워 해 놀려먹는 사람의 그것이다.
날 선 목소리에도 물먹은 머리나 묵묵히 만졌다. 사찰에 인접할수록 탄내 사이로 웬 물 향 섞여 드나 싶었더니, 오늘이야 저를 바다 깊이 밀어 처넣을 심산인 듯 맞은편에서 풍기는 기의가 심상찮다. 저 반반한 낯짝 아래로 한을 묵혀둔 것이야 익히 들었다마는, 저 개인을 향한 격노까지 덧대지니 안 그래도 곤죽인 얼굴 더욱 보기 흉했다. 다만, 저는 그 속을 달래주기보다 없던 부아마저 만들어 긁어둘 존재이기에 마냥 실소 한 줌 내뱉기나 했다. 축 쳐졌던 머리칼이어느 정도도 건조해졌음에 승복을 다시 걸친다. 여상 앞섬 열린 행색으로 다섯 걸음 움직여 전처럼 스미레와 저 사이 간극을 좁혔다. 가까워짐에 되처 실감했다. 오늘도 우미 스미레에게선 넉넉한 바다향이 멤돈다는 사실을. 시선 두어 살피니 속 뒤틀려 일시 주름진 이맛살이 우스워 작게 키득였다. 한차례 어깨 으쓱댐으로 능청을 겹쳤다.
"내 위상이 실추했을지언정 힘은 저 위에서 노닐던 시기와 다를 바 없는데, 나 죽이고 싶걸랑 해부터 떨어뜨리고 와."
태양의 불변성에 무궁히 영위할 격을 넌지시 귀띔해주었다. 이어 짧은 한숨 뱉으면 구렁이처럼 휘어졌던 상판이 무미해진다. 일순 정적에 동자승 불경 외는 소리가 청명하다. 펼친 곳 전부 읽고 합장 드리는지, 그마저 사라지고 적요만 올곧이 남으면 닿기 직전까지 고개 가져갔다. 좀전좀 전엔심 두지 않았던 안대 덧댄 눈가가 그제야 시선에 잡혔다. 손 뻗어 닫힌 부근을 바닥으로 덮었다.
"소중히 여기라 했었잖아. 왜 말을 안 듣지."
일 보 멀어져 제 주머니에서 인이 새겨진 부적 집어 꺼냈다. 다리 반 접어 몸 굽힌다. 널브러져 궁상 떠는 머리통 하나 들어 이마에 부착해주니 곧 불살라 재로 변했다. 제 손으로 떼어낸 것을 빠짐없이 사화해주다 이내 스미레를 마주보고 선다. 제 한마디, 행동 하나에 저리도 격한 반응 보여주니 절로 심기가 뜰뜸 역시 당연한 수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