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 학교는 좋아한다. 이름 뿐이지만 어딘가의 무언가가 날 인지하고 았다는 것 자체는 기분이 들어서. 하늘에 깔린 밤의 장막이 노을의 어스름을 집어삼킬무렵 나는 잠에서 깼다. 이제 곧 여름이 다가오는 탓에 날이 쌀쌀하지는 않았다. 조금 몸이 뻐근하기는 했지만. 인간의 몸을 쓴지 한달이 지났다. 남들이 나를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는 마음에 들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몸, 역시 단점이 더 많다. 기본적인 생리현상이라던가.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신으로 살때는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감각에 놀라는 한 편, 어디선가 느껴보았던가 싶은 기분이 들어 언제나 좀 싱숭생숭. 응, 솔직히 좋은 기분은 아니다.
"...가는길에 규동... 아니 편의점이 낫겠네."
이 몸의 원래주인...아니 정확히는 모티브가 되던 녀석. 하는 일도 그대로 이어받은 덕에 여러모로 돈이 조금 든다. 앨범가게에서 일하는 것 만으로는 돈이 부족할정도니까. 집세에 전기 수도. 내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집을 얻고 인세에 섞여사는 1년이니 최대한 법도를 따라야겠지. ...그래도 쉬는날의 맥주는 못참지.
"뭐야 저거."
...뭔가 이상한 사람있는데. 무시...무시하자... 그 노트에는 이상한 사람은 피하라고 되어있었어. 근데 저기 붙어있는 옆 자판기 못쓰면 한참은 돌아야하는데...
...에이
-달카당
신경쓰지 말자. 나쁜짓 하는 것도 아닌데. 차갑게 식혀진 작은 맥주캔을 자판기에서 뽑아들었다. ...눈은 맞추지 말자.
곤란했다. 무엇이 곤란했느냐면 스쿨 백에 욱여넣어둔 소지품들이 없다는 점이었지만 그중 가장 큰 난관은 학생증이었다. 어딜 가든 무얼 하든 학생증, 학생증, 학생증! 신분증 아닌 고작 학생증이 원래 이리도 쓰임새가 다양했었는지 최근에서야 알았다. 그깟 가방 따위 누가 찾으러 갈 줄 알고⋯⋯ 라 했던 생각을 철회해야 했다. 유감이게도. 왼쪽 눈을 가린 안대 위로 드러난 눈썹이 한 번 들썩였다. 요즘 들어 운수가 어찌 이리 안 좋은지 통 영문 모를 일. 물 흐르듯 흘러간 회상이 과거의 통증을 끄집어내 파스 붙인 턱 부근을 습관적으로 매만지며 3-A라 쓰인 교실 문을 열어젖혔다. 척 봐도 스미레 가방이요, 하는 물건이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기에 가져가려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가방이 지나치게 가볍다. 설마 하고 내부를 뒤적이려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뒤적일 무엇도 없었으므로. 단 하나, 웬 주소가 적힌 종이를 제하고.
삽시간에 모든 짐을 잃은 스미레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쥐어들었다. 가타부타 부재한 채 꼴랑 주소 한 줄. 무릇 신의 싸가지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처럼 어려운 법이지, 아무렴. 자못 침착하게 생각하였으나 낯빛은 전혀 침착할 수 없었다. 손아귀에서 종이가 무자비하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미간마저도.
여하튼, 스미레는 겨우 인내심을 끌어모아 적힌 주소로 향했다. 파르란 녹음이 드리우고 잎 우거진 나무들이 빼곡히 심어져 있는 정경. 불과 참새 정도의 청명한 울음으로만 공기를 메우는 적요함이 마음을 평안케 했다. 그래서 사찰에 다다랐을 때엔 제법 괜찮은 기분이었다.
차가운 녹차를 다 마시고, 만족스럽게 웃으며 쓰레기통에 남은 빈병을 넣으려고 하는데 옆에서 어떤 여성이 맥주캔을 자판기에서 뽑는것을 보았다. 그런데 아니, 그 맥주를 뽑은 사람이 어떻게 보아도 성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키는 160cm정도일까? 아니, 이 정도 키라면 성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심지어 옷 또한 고풍스러운게 평소에 보는 학생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음..."
턱을 어루만지면서 이걸 어떻게 해야하지, 하고 망설이다가 결국은 자신의 행동을 하기로 결정한 그 였다.
"이봐! 맥주는 일본법률 상 20세가 넘어야 마실 수 있다고? 그걸 모르는것은 아니겠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그 모습! 보아하니 역시 떳떳한 기분으로 맥주를 마시려는건 아닌 것 같았다!
>>339 찰칵, 치익... 목을 타고 넘어가는 황금빛의 액체. 지금 내 식도는 황금빛의 보리가 드넓게 펼쳐진 관동평야... 어지간한 일정도는 넘어가줄 수 있는 마음을 가졌다는 뜻이다.
"너, 몇살?"
순식간에 비어버린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놓고는 말을건 인간아이를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치면 귀찮은 일이 될테니 신경쓰지 않으려 했건만... 이렇게 먼저 들어와버리면 내가 뭘하든 소용이 없다. 이런 일에 대처를 잘했으면 이놈도 저놈도 누에퇴치라며 활을 들고 쫓아오는 일도 없었을테니까.
"아야카미고? 그 학교에서는 처음보는 사람한테 그런 말 하고 다녀도 돼?"
다시한번 덜컹, 찰칵, 치익... 선채로 벌써 두캔째. 이미 나를 막을 수 있는건 없다.
"그야 내가 동안인건 맞지만, 성인이야 성인. 너보다 한참 연상이니까 벌받을 일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