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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야, 난 이미 그런 것들을 썰고 있으니까. " " 썰리지 않는게 아니야. " "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 까진 아닐테니까. "
실체도 모르고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것. 그런것은 이미 동월이 착실하게 썰고다니는 중이었다. 철준이 괴이에 대해 알고있을진 모르겠지만... 굳이 직접적으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
"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 말한다 해도 추측뿐이야. " " 그래도, 아재가 그 인간을 아낀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어. "
그것은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것이니까. 동월도 그 기분은 알고있었다.
" 자꾸 에어버스터를 들먹이지 마!!!!!!! "
동월은 철준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멱살이 잡혀 공중에 들어올려지는 동안에도, 그의 하얀 시선은 철준의 눈을 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 아무리 에어버스터여도, 부장이어도 내 앞길에 간섭할 수는 없어!!!! " " 난 원래 이런 놈이다!!!!! "
남들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동월은 적어도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확립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잠시 인간불신에 빠졌었어도, 잠시 방황하는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누가 동월에게 간섭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 강한 놈들? 약한 놈들? " " 네가 패서 쓰러트릴 수 있는 놈들은 전부 약한 놈들인가? 그렇다면 넌 충분히 강한 놈이지. 인첨공의 3위까지 올라간 녀석인데! " " 그럼 그렇게 강한 넌!!!! 지금 뭘 하고있는거냐!!!!!! " " 강한 놈들에게 맡기라며! 그럼 그토록 강한 넌 지금 왜 이딴데서 경비나 서고 있는건데!!! "
...말은 이렇게 했지만, 동월은 딱히 철준을 탓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도 그만의 삶이 있고, 자신만의 방식이 있는 것일테니까. 그것을 동월이 정할 권리는 없었다. 단지 반박을 위해 말한 것 뿐이다.
" 약자가 자기자신을 지킬 권리를, 네놈이 짓밟지 마!!!!!!!!!!!! "
약자라고 해서 항상 강자들에게 짓밟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할 이유가 없다. 그들이 '약자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강자의 희생을 지켜보게 할 권리가 없다. 강철준이라는 강자도 자신의 삶을 자신이 정할 수 있는만큼, 동월이라는 약자도 자신의 삶을 직접 정할 수 있었다.
" 디스트로이어.... 아씨 이름 되게 기네. 아저씨 이름이 뭐야? "
철준이 본명을 동월에게 알려준다면, 동월은 디스트로이어나 아저씨가 아니라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 지금 중요한건 내가 뭘 지키고 싶어하냐, 그런게 아니야. " " 지금 인첨공은, 칼들고 있는 녀석이 자신과 대적할 히어로를 기다려주는 만화같은 세상이 아니야. " " 강자가 눈치채기도 전에 약자는 이미 썰려있어. 약자가 강자에게 기댄다는 말은 듣기엔 좋지만, 약자에겐 그저 공상같은 일이라고. "
낮게 깔린 목소리를 뱉으며, 동월은 자신의 멱살을 잡고있는 철준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려 한다.
" 그렇다면 당신같은 강자들은, '닥치고 나만 믿어라' 라고 하면 안되는 거잖아. 그건 우리한테, 죽으라고 하는거나 다름이 없잖아. " " ...뭐 그래도, 지키고 싶은 것 정도는 있네. 확실히. "
한참 말을 쏟아내니 지친 듯이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이 조금 늘어지는게 보인다.
" ....내가 그때 했던 말 기억해요? 뭐 사람으로써 너희들을 말리러왔니 뭐니 그런말 지껄였잖아. " " 그건 이거랑 결이 달라요. 그땐 놈들한테 '사람다운 삶을 살자' 라는 말을 하기 위해 뱉은거니까. " " 하지만 이번엔... 음. 당신한테 호소하는거겠네. '날 사람답게 살게 해줘' 라고. " " 강자들에게 보호만 받으면서 키워지는 약자는, 사람보다는 가축 같잖아. "
>>0 목조 테라스가 있다. 연구소의 한켠, 홀로 이상하게 시대를 엇나간듯한 근대 유럽 양식의 테라스에서는 아래로 축제의 물결이 지나가는 것을 관망할 수 있었다. 밑에서는 잘 보이지 않도록 주위를 관엽식물 따위로 장식하고 그 중간에는 테이블을 두어 휴게공간처럼 꾸며놓았지만 이곳을 이용하는 것 따위 두사람밖에 없었다. 첫째로 한쪽에 앉아 차를 마시는 오렌지색 머리의 소녀 이외의 다른 실험체가 없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애초에 이 연구소가 사실상 상위기관에서 문제를 일으킨 인간들의 유배지같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소녀의 반대편에 앉은 남자는 주름한점 없이 다려진 셔츠를 입은채 담배연기를 뻑뻑피워내고 있었고 소녀는 익숙하다는 듯 차를 홀짝이며 한 손으로는 홀로그램을 띄워 영화연구부의 예산신청서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남자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치며 소리를 냈다. 소녀가 그를 향해 주의를 돌리자 그제서야 남자는 입을 열었다.
"상황을 설명해주실까. 이 비디오는 어떻게 구한거야. 분명 그 여자의 개인실에 있었을텐데"
"좋아요."
남자는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훔친 것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건가. 현서가 몇주 전 정기보고를 위해 여자와 만난 이후부터 매일 몇시간 주기로 보내오던 연구결과에 대한 독촉이 사라졌다. 몇일 정도는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 해서 연락을 취해보았지만 상위기관에서도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않는다. 메일도 채팅도. 혹시나싶어 직접 가보기까지 했지만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을 뿐 상황에 대한 정보는 그 무엇하나 듣지 못했으니. 조만간 연락을 주겠다는 말을 믿고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른 연구소에는 폐를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현서는 스스로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성과에만 집착하는 그 여자와 현서는 제법 닮아있었다. 항상 내가 처리하기 어려워하는 문제만 들고온다는 점에서 그러했고 사소한 일에도 뒤처리를 남에게 맡긴채 자기 지위만 생각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했다. 그런 두사람이 마주쳐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미치광이로서의 진심을 드러내고 승부를 겨루었다면. 두사람은 몰라도 남들은 상당히 곤란해진다.
"이유는 여러가지 짐작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그 여자가 죽일만큼 짜증났다는 변명이나 저의 옛날 실험데이터를 원해서라던가. 뭐 이런저런 이유가 있긴 합니다만."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저희는 저희의 이야기를 하죠. 커리큘럼대로 하시는건?"
"대놓고 죽일 생각은 없었다는건가."
"의사지망생한테 못하시는 말도 없네요 그거. 아동학대로 고소라도 당해볼래요?" "얼마전에 제가 했던건 그냥 커리큘럼이었어요. 어릴때하던 '실험'의 연장선. 덕분에 그 아줌마는 몇달정도 요양이 필요하게 되었지만."
현서는 찻잔을 내려놓고 주머니를 뒤져서 SD카드 하나를 건냈다.
"미리 말하지만, 그 실험은 자기 선택이 없으면 진행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죠? 직접 고안한 실험이니까."
"그 여자, 결국 자기한테까지 한건가."
소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sd카드를 받아들기를 주저했다. 이것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안보고도 뻔했기에.
"어차피 곧 버려질 사람이었어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어직도 시대착오적인 실험만 하고 있으니까.."
"제 멋대로 되지 않으니까 화가 난거지."
"그리고 분에 못이겨서 거의 자결에 가까운짓도 했네요."
무슨 결과가 일어나도, 우리에게 책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와 현서의 사이가 최악이라는 것 쯤 그 연구소를 드나드는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고 동시에 그 실험을 진행한 것 역시 그녀 자신. 현서는 그날 특히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커리큘럼을 마친 뒤 곧바로 귀가했으며 그녀가 현서에게 하던 폐기된 통각치료에 대한 실험은 그녀 스스로 진행한 것이다. 그녀가 쇼크로 인한 혼수상태에 빠진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 스스로의 선택. 위에서도 지시하지 않았으며 설령 했다고 하더라도 뒷배가 없고 실적도 거의 없는 일개 연구원에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치 않을 것이다. ......그냥 그 여자도 알아서 처리해두란 거로군.
현서가 어깨를 으쓱였다.
"벌레에게 미래를 맡길 수는 없는 법 아니에요."
"그 여자가 했던 말이군."
"지금 제 절반 정도는 그 여자라서."
찻잔이 식었다. 폐기되었던 실험이었다. 이곳에서조차 아동에게 하기엔 과하다는 말이 나와서. 확실히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아이가 제안한 '통각재현' 실험. 외부에 유사신경을 연결하고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는걸로 고통을 느끼게한다...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아이가 그냥 죽으려고하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던 것이었기에. 혹시라도 자기가 살인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지레 겁먹어서 멈추자는 의견이 나왔었지. 그리고 그것에대해 실험을 계속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쳤던 것이 나와 그 여자였다. 덕분에 둘이서 사이좋게 이 아이만 맡게된데다 나는 좌천까지 당했지만. ...원본보다는 하향 조정했는데도 사람이 혼수상태에 빠질정도의 실험을 몇배의 강도로 아이에게 했다는 건 숨길수 없는 치부였기에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여유가 생기고 나서야 윤리를 챙길 수 있었다. ...그녀는 되려 출셋길이 막혀 히스테리가 늘었지만. 어쩌면 이것도 예정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름을 알려줄 생각은 없으며, 자신은 지금 디스트로이어로서 여기에 있다는 것을 그는 분명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월이 하는 말에 귀를 조용히 기울였다.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어필하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철준은 작게 혀를 찼다. 이어 그는 동월을 아래로 내려주면서 멱살을 뿌리쳤다. 겁도 없는 애송이 자식이. 그런 말을 작게 중얼거리면서그는 입을 열었다.
"눈을 감고 살아가면, 네가 그토록 바라는 사람다운 삶으로서의 삶은 보장되지. 울타리 안이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것을 벗어나겠다는거냐? 네놈은?"
하. 생각보다 더 골치 아프네. 그렇게 생각하며 철준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축 같으니까 지금의 삶은 싫다. 그렇다면 어쩌겠다는 것인지. 정말로 위험에 맞서서 뭐라도 해보겠다는 것인가. 뭘 믿고? 퍼스트클래스조차도 할 수 없었던 것을 저 녀석이 뭘 믿고 한다는 것인지.
"많이는 못 알려준다. 나는 여전히 너희 같은 애송이들이 어둠에 끼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림자는 '총 3명으로 이뤄진 과학자 집단이 주축이며, 누군지는 모르지만 강한 능력자 하나를 아군으로 데리고 있다는 것 같더군. 그리고, '제로'라는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다. 뭐... 듣기로는 인첨공 최고의 AI라고는 하지만, 나도 자세히 아는 것은 없어. 그 관련은."
구성원 정도만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하며 그는 동월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서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진짜 짜증나는 놈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괜히 오른발로 땅을 있는 힘껏 쿵쿵 쳤다.
근데 개인적으로 지금 은우가 위크니스의 해방법 찾아내겠다고 혼자서 조용히 그림자 추적하고 있으니까... 은우가 조용히 자료를 정리하려고 부실에 개인 노트북 가지고 왔다가 피곤해서 깜빡 잠들었는데.. 그 늦은 시간에 부실에 뭐 놔두고 와서 잠깐 들렸다가 켜져있는 은우 노트북을 본 누군가의 일상도 솔직히 조금은 끌립니다.
결국 여기에 온 이들의 숙명이자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일축하며 철준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적어도 자신은 아직 이 학생들이 그런 삶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 못했다. 어느 정도 동월의 패기는 인정하나,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영 마음에 안 드는지, 그는 괜히 발길질을 하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꺼져. 형님은 무슨 얼어죽을 형님이야. 필요없어."
형님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그는 반사적으로 꺼지라는 말을 내뱉으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자신을 놀리려고 그런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유에 대해서 철준은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쨌든 동월이라는 그의 이름을 들으면서 그는 피식 웃었다.
"네놈에게 있어서 인첨공은 겨울인거냐. 하긴. 봄은 아니긴 하지. 지금은 여름이니까."
과연 이 학생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조금 지켜볼 필요는 있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죽으면 죽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또 다른 제안이 들려왔다. 나중에 자신들이 위험해지면 한번은 도와줄 수 있겠냐는 물음에 철준은 피식 웃었다.
"개소리는 키우는 강아지한테나 가서 해. 내가 왜 너희를 도와줘야하지? 그림자랑은 얽히기 싫냐고? 암부와 얽히는 것이 싫은 것 뿐이다.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놈들과 얽혀서 좋은 일이 없으니까. 핫. 네놈들이 별난거다. 건방진 저지먼튼 놈들 같으니. 간댕이가 배밖에 나와서 퉁퉁 부은데다가 제발 죽여주세요라고 외치고 다니는 녀석들은 이 일을 하면서 처음 본다. 별종들만 모인거냐. 저지먼트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그는 고개를 강하게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씨익 웃어보이더니, 동월의 눈동자를 잡아먹을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임무 관련으로 근처에 있고 임무와 얽혀있다면 조금은 생각해주지. 어디까지나 임무와 연관된 거니까 말이야. 자. 이 정도로 어울려줬으면 된거겠지? 할 말 더 없으면 꺼지고 바나나 아이스크림이나 먹어. 그거야말로 아이스크림의 정점이자 완전식품이다. 학생들은 완전식품만 먹고 자라야 나중에 병 안 걸리고 건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