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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소년은 실감했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로 인해 그 순간에 못박힌 것은 자기 자신뿐만이 아니었다고.
4년하고도 절반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이 흘렀다. 그날, 인첨공으로 들어가던 버스를 타던 날 몇 년 뒤의 미래의 자신을 허황된 상상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자신도, 자신 주변의 세상도, 좀더 멋진 곳으로 변해있을 것이라고. 자신은 좀더 멋진 사람이 되어서 부모님과 함께하는 미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런 소년을 비웃듯 그 꿈은 갈가리 찢어진 채로 못박혔다. 그래서 소년은 그동안 편지를 한 통도 드리지 못했다. 능력 하나 개화하지 못하고 0레벨인 채로, 인첨공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나약한 육체는 전혀 성장할 생각을 하지 않고, 소년은 이 콘크리트 야생에서 가장 나약한 피식자로 전락했다. 당신의 아들이 이리 비참한 몰골이 되었소, 하고 연락드릴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연락드린다고 해도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은 이미 이 인첨공에 영영 매여, 그 누구도 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거늘.
그래서 소년은 자신이 떠나간 뒤 남겨진 어머니의 모습을 굳이 상상하지 않았다. 아니,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더 늙으셨을까, 더 야위셨을까, 그 팔팔하고 괄괄하던, 세상 누구보다도 듬직한 뒷모습이 혹시나 내가 알던 것보다 많이 작아지지 않았을까. 어쩌면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하시지나 않았을까.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나 않았을까. 원망하고 계실까, 분노하고 계실까.
하지만, 코너를 도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소년은 실감했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로 인해 그 순간에 못박힌 것은 자기 자신뿐만이 아니었다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엄마··· 엄마···!”
희끗희끗하게 세어버린 머리카락을 180cm가 넘는 키. 다부지게 벌어진 어깨, 새까만 곱슬머리와 하얀 피부, 콧등에 길게 그어진 흉터를 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초점 선명한 눈동자. 저음의 목소리, 그 괄괄한 성격에 감성은 충만해서 쉽게 눈물이 차오르곤 하는 눈가, 거칠지만 아들을 부를 때면 세상 무엇보다도 부드러워지는 목소리, 성큼성큼 달려오는 발걸음, 꽉 끌어안긴, 익숙하게도 따뜻하고 딴딴한 품. 이마에 해주던 뽀뽀, 오늘은 그동안 못했던 만큼을 가불받아 온 얼굴에 쏟아지는 뽀뽀 세례. 눈물이 와락 돋아 품에 얼굴을 파묻으면 어깨를 마구 뚜덕여주시는 커다란 손. 아들의 머리카락이 하얀색으로 바래고, 보라색이라 일컬을 수 없는 보라색으로 눈동자 색까지 변해버렸는데도 한 눈에 자신의 아들이 이 자리에 있음을 알아보는 것까지.
“성운이. 성운아. 성운아, 아이고, 내 아들, 내 새끼······.”
생애 가장 어리석은 선택의 결과를 마주했던 그날에서부터, 아들의 어리석음으로 아들을 잃어버린 그날에서부터, 자신을 최대한 그대로 유지하며 어머니는 4년 반의 세월을 아들을 위해 가로질러 지금 이 자리에 도달했다.
“어떡해, 어쩌면 좋아, 이 만리타향에서 무슨 마음고생을 얼마나 했길래 머리가 이렇게 다 새하얗게 바래서는··· 응, 엄마 여기 있어요. 아들. 보고 싶었어.”
그리고,
“야, 서헌오!!! 네 키 181cm, 내 키 185cm, 우리 둘이서 낳은 자식인데 얘 왜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때랑 키가 똑같아?!”
자캐식으로_네_곁에_있고_싶었어 "압니다. 나는 당신의 곁에 설 수 없다는걸 알았어요. 나로는 너무나 부족했으니까. 당신은 쭉 내가 아닌 그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감히 당신 곁에 설 수 있다는 생각조차 품지 못하고 고이 접어두었어요." "하지만... 난 여전히 당신 옆에 서서, 그 손을 잡아주고 싶었는데... 이젠 당신이 없네요..."
그 뒤 소소한 부부싸움(싸움이라기도 뭐한 게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퍼대고 아버지가 속수무책으로 몰리는 그림이었다)이 있었으나 그 또한 어디까지나 칼로 물베기, 두 분 금슬에는 영향이 없어 보였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성운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한때 꿈꾸던, 아버지와 어머니, 자신, 세 가족이 함께하던, 유년기의 그 이상적인 나날들을 오늘 한 번 다시 맞이했다. 재회의 기쁨과 설움의 눈물이 그치고, 성운은 다시 잠깐이나마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아들, 아까 오면서부터 봤는데 온 사방천지 별 이상한 데에 QR코드가 있던데 그건 뭐니?” “인첨공 내부 사람들 대상으로 행사하는 건데, 전용 앱으로 찍으면 포인트를 주는데 그걸 모아서 경품으로 교환할 수 있대요.”
건네진 수건으로 이마를 가볍게 두드린 리라는 멀어져 가려 하는 태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러다가 다시 성큼성큼 걸어가 앞서가는 태진의 팔을 붙들어 세웠다.
"방학 중이어도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들 때문에 사감 선생님은 항시 대기 중이시니까 내일이라도 공실 있는지 문의해보세요. 보통 이런 데에서 3학년은 우선순위를 주기도 할 거고, 사정을 말하면 당일 입소는 어렵더라도 집이 수리될 때까지 머물게 해주시거나 그럴 만한 장소를 소개시켜 주실 거예요. 그러니까 내일 학교 오세요. 저 기숙사 사는 거 아시죠? 이것도 그 김에 빨아서 돌려드릴 테니까 꼭 오셔야 해요."
꼭! 당부한 다음 손을 놓은 리라는 살짝 뒤로 물러선다.
"제대로 치료 받으시고 조금 쉬세요. 안 그러면 게시판에 메모 붙여서 다 일러버릴 거예요, 장태진 선배님이 아픈데 몸 관리도 제대로 안 하고 막 돌아다닌다고!"
이거 협박 아닌가? 정말 그럴 셈인지 아닌지 파악할 새도 없이 리라는 웃는다.
"그럼 저 가요, 내일 학교 오세요!"
그러고도 태진이 의무실 안에 들어가는 것까지 똑똑히 지켜본 다음에야 몸을 돌려 천천히 사라졌을 것이다.
/막레로 하면 될거같다! 태진아아아아아... 마음이너무아퍼... 학교안오면 게시판에 태진선배 길거리 방황 중 주워가세요 이렇게 써버린대 학교와(지이잉)
가만히 듣고 있던 은우는 팔짱을 끼고 호수인지 강인지 하는 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월광고등학교 저지먼트 소속. 아라가 알면 필시 난리가 나겠지만 그것까지 자신이 신경쓰고 알 바는 아니었다. 이런 부원을 빨리 못 발견하고 문제를 이렇게 크게 키운 아라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은우는 한숨을 약하게 내뱉었다.
"너, 설마 해서 묻는건데, 너희는 모르고 나만 아니까 내가 우월합니다. 엣헴. 그런 말 하려고 이런 말 하는 거 아니지?"
너희가 아는 리라와는 다르게 과거에 이런저런 말이 있었는데, 그것을 이야기해준 적은 있냐? 너희를 믿긴 할 것 같냐? 과거에서 눈돌리는데 이용되는 도구로 취급받는 것이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다 등등.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그것을 모두 들은 은우는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심정밖에는 들지 않았다.
"오히려, 네가 저 아이는 그리 당해도 싸다. 라는 말을 해서 어떻게든 현 상황에서 눈 돌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그런 말을 하고 싶으면, 너부터 과거에 무슨 일을 했고, 너의 지금 모습 말고, 진짜 모습을 말해야 공평한거 아니야? 왜? 그건 또 못하겠어?"
그는 가만히 자신의 앞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오른손을 펼쳤다가 접었다를 반복하며 마치 손을 푸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이가 세상에 어디있어? 다들 적당히 다른 이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조절하면서 살아가는거지. 진짜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주는 이는 짐승밖엔 없어. 어디서 무슨 만화를 보고 떠드는건진 모르겠는데, 이곳에 회피 목적으로 들어왔건 초능력을 바래서 들어왔건 그런 개인사정 따위 하나하나 따질 생각 없어. 비난하고 싶으면 걔의 지명수배서라도 가지고 와."
이어 그는 반대편 주먹도 펼쳤다 접었다를 반복하다가 두 손을 마침내 멈췄다.
"왜 오래 머물렀던 시절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하냐고 물었지? 내 답은 하고 싶지 않아서야. 가족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데 주절주절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부터 열까지 떠드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너는 나에게 네 과거 이야기, 여기에 오기 전의 이야기 하나도 빠짐없이 다 했어? 안 했으면 이 말은 더 할 가치가 없어. 자. 이 정도로 어울려줬으면 됐지?"
이어 그의 눈빛은 마치 독수리마냥 날카롭게 바뀌었다.
"지금부터 목화고등학교의 부원을 아무런 타당한 이유도, 명분도 없이 건드렸으니까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룰 시간이야. 내가 목화고등학교 저지먼트 부장이라는 것을 모르진 않았을테니까다 각오한 거겠지? 바로 쓰러지진 마라. 내가 끝나면 바로 아라가 기다릴테니까."
“─학교에선 정말로 잘 지내나 보네, 아들. 네 웃는 얼굴을 보니 알겠어.”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많기는 하지만, 네,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어요.” “자 그러면 여기서 서성운 군의 어머니로서 정당하고 합당한 질문을 하나 하겠어요.” “네, 엄마.” “우리 아들, 연애사정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으려나?” “푸흛?!?!?!” “어머, 반응이 다이내믹하다? 이건 뭔가 있는 맛이구나~ 어떤 아이니?” “그, 엑, 그, 그게에─!!!” “제 연인이랑 비밀연애를 하기로 했다는데 좀 봐주지 그래. 나한테도 말을 안 하더라고.” “어머어머. 학창시절 비밀연애. 낭만이지~ 나도 네 아빠랑 고등학교에서 처음 만났었는데. 아유, 우리 아들 온 얼굴이 새빨개진 거 봐. 어디서 토마토 하나 캐다놨다 해도 믿겠다 얘. 그러면야 네 마음 엄마도 아니까, 나중에 더이상 비밀로 하지 않기로 했을 때 살짝 알려주렴.” “그, 네, 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