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쪽지를 거실에 남겨두고 현관으로 발을 옮긴다. 크리스마스 이후, 신발장의 자리 하나를 차지한 채 가지런히 놓인 워커에 잠시 시선이 머물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아껴서 신고 싶기도 했고, 모래사장을 걷기엔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결국 늘 신던 신발을 골라서 신고 집을 나서는 내 손에는 쇼핑백이 하나 들려있었다. 이 쇼핑백이 갈 장소는 예전부터 정해져 있었지만 발은 선뜻 그곳으로 향하지 못했다. 집 앞을 나와 조금 걸으면 나오는 갈림길에서 잠시 머뭇거리지만, 결국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리고 만다.
츠나지의 겨울은 흐리고, 눈이 많이 온다. 두터운 구름이 빽빽하게 들어찬 하늘은 낮의 태양도, 밤의 달과 별도 꼭꼭 숨겨서 겨울을 더 춥고 쓸쓸하게 만드는 것 같아. 그리고 그건 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다. 흐린 하늘만큼 짙고 탁한 색으로 물들어 있는 겨울의 바다. 파도에 지워져버릴 발자국을 남기며 천천히 향한 곳은 자주 별을 보러 오는 비밀 해변. 하지만 이곳에 온다고 날이 기적적으로 맑아지는 일 따윈 일어날 리가 없다. 당연하게도 말이지. 여전히 두터운 구름에 가려진 하늘을 보다가 그대로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위의 감촉에 몸을 한바탕 부르르 떨고, 조금이나마 따뜻해질까 싶어 쇼핑백을 무릎 위로 올려 끌어안았다. 그래도 앉은 곳도 차갑고, 정면에서는 매서운 바닷바람이 칼같이 날아든다. 하지만 오히려 이게 머리를 식혀주는 것 같기도 해서.
아이 취급 받는 게 분해서. 좋아하는 마음이 전해졌으면 해서 다소 충동적으로 움직였다는 건 인정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소가 아니었어. 그래도 전해졌으면 했어, 받아줬으면 했어. 그랬는데. 그 뒤에 돌아온 것은 명백한 거절로 보여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더 솔직해지자면... 그냥, 슬펐다. 그리고 후회하고 있었다. 이것때문에 프리지아가 해체하게 된다면, 어떡하지. 그냥 애매한채로 계속 두는 게 나았을까? 그치만, 그치만....
"앗..."
투둑, 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쇼핑백에 떨어진 눈물을 조심스레 소매로 닦아낸다. ...안쪽까지 스며들진 않았겠지? 아무리 그래도 일단은 선물로 준비한 건데. 축축한걸 건넬 수는 없으니까. ...아니, 건넬 수는 있을까. 건네지도 못할 선물을 소중히 하고 있다니. 스스로가 바보같아서 헛웃음이 나온다. 물기어린 뺨은 빠르게 식어서, 이제는 묘한 간질거림과 함께 따가움이 느껴진다.
별도 안 보이고. 다른 곳으로 갈까.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도, 보일 리가 없겠지만.
그렇게 한참을 여기저기 서성였다. 산으로 가기도 하고, 국립공원을 괜히 한 바퀴 돌기도 하고. 다시 바다로 돌아와 다른 비밀 해변을 가거나, 그냥 해안가를 무작정 걷기도 하고. 늦은 오후에 집을 나와 늦은 밤에서 새벽으로 접어들 무렵까지 계속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만 했다. 아무리 단단히 껴입었어도 반나절이 넘을 동안 찬 공기와 바람을 쐬고 있으니 저절로 코를 훌쩍이게 된다. 땀이 나고 식기를 반복해서 그런가, 손으로 뺨을 더듬어도 별 감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신발 안의 발끝도 지금은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다. 분명 얼음처럼 되어 있겠지 이거. 집 앞으로 향하는 갈림길 앞에서 다시 발이 멈춘다.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알면서도 여전히, 바보같이, 미련하게 하늘을 한번 더 올려다 본다. 구름이 가득 낀 먹빛 하늘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고, 조용한 길을 비추는 가로등의 빛만이 눈을 따갑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바보같아. 망설이던 발 끝이 기어코 집을 등지고 만다. 초조함일지 긴장일지 모를 감정에 핥짝인 입술은 겨울 바람을 단단히 맞아 갈라지고 터져 있어, 조금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도착한 곳은 몇 번인가 왔었던 유우가의 자취방 앞이었다. 주차되어 있는 스쿠터를 한번 흘끔 보고서 조용히 현관문을 향해 걸어간다. 평소보다도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선 문 앞에서 쇼핑백을 들어올린다. 문고리에 걸어두고 돌아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주머니 안에서 느껴지는 열쇠의 가벼운 묵직함에 망설인다. 밖에 두면 차갑게 식겠지. 하지만 뭐어, 식어도 상관없는 물건이긴 하지만. 그치만... 그렇게 망설이는 나의 등을 떠밀듯, 흐린 하늘이 기어코 눈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제법 굵게 내리기 시작한 함박눈이 바람에 날려 손과 쇼핑백을 두드린다. .....그래. 밖에 걸어두면 눈 때문에 젖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애써 변명하며 열쇠를 꺼내 꽂고, 돌린다. 가능한 조용히 돌려서 잠금을 풀고, 신중하게 문을 열었다. 새벽에는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리는 것 같아서 긴장하게 된다. 조심조심 신발을 벗고, 까치발을 들고 발소리를 죽인다.
자고 있는 유우가의 옆까지, 그렇게 조용히 다가가 슬쩍 내려다본다. ...어째서 안방을 두고 거실에서 자고 있는 걸까. 춥지 않을까. 잠시 그렇게 보다가 천천히 쇼핑백을 유우가의 머리맡에 내려두었다. 보라색 바탕에 노란 줄무늬가 들어간 목도리. 크리스마스 선물로 돈을 너무 써버려서 생일선물은 조금 심심한 느낌이 되었지만, 그래도, 축하하는 마음은 진짜니까. 비밀 해변에서 흘렸던 눈물이 생일 카드에 떨어져 번짐을 만든 것조차 모른 채로, 나는 그렇게 선물을 두고서 돌아섰다. 살금살금 걸어서 신발을 신고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나서서 닫는다. 다시 열쇠를 꽂아 문을 잠근다. 잠금쇠의 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그렇게 닫아두고, 잠시 문에 등을 대고 기대섰다.
"...생일 축하해, 유우가."
직접 전하지 못한 말을 이곳에 털어놓고서야, 그제서야 발길을 돌렸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집에 도착하니 그제야 피로와 추위가 맹렬하게 덮쳐온다. ....일단 잘까. 얼음장 같은 몸도 이불 속에 들어간다면 금방 녹을테니까. 하늘은 잔뜩 흐리고, 눈까지 내리고 있지만. 그래도 결국 딱 하나, 별을 보고 들어왔으니까. ...분명 잘 수 있을 거야.
결과적으로 레이니가 원한 대로 붙잡았던 팔을 풀었으나 레이니는 여전히 다이고에게 붙어 있었다. 오히려 자세를 바꾸는가 싶더니 다이고의 심장 소리를 들으려고 하고 있었으니... 당연하지만 다이고의 심장은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
무어라 말을 하기 전에 비틀거리면서 느릿하게 일어난 레이니가 화장실로 들어가고 나서야, 다이고는 몸을 천천히 일으킬 수 있었다. 살아오면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레이니에게 조바심을 느끼게 했구나 싶으면서도 여전히 트레이너의 본분이 떠올라 머리가 아프려고 했다. 그동안 세수를 하고 나온 레이니가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서는 등을 돌리고 누워버렸으니, 다이고는 토라졌나 싶어서 조금 착잡한 마음으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레이니..."
삐졌어? 라고 말을 하려던 차에 몸을 뒤집어 옆 이부자리에 누운 자신을 바라본 레이니가 억지를 받아달라고 안 할 테니 끌어안아 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왜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이 이어지는 이유, 따뜻해서 정말 기분이 좋다는 그런 말에 다이고는 레이니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빙긋 웃었다.
"물론이지, 이리 와."
이불 속에서 옆으로 누운 채, 벌려지는 팔을 따라 이불이 들어올려진다. 레이니가 우물쭈물 한다면 이번엔 다이고 쪽에서 덥썩 안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