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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첨공 15주년 행사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며 거대한 행사였다. 이런 행사가 과연 거저 이루어졌을까. 아니, 그 뒤에서 부지런히 행사 준비를 한 인첨공의 거주민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의 연구소와 시설에서 역할을 수행한 수많은 연구원들의 노고도 없다곤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와 같이 좋은 날, 조촐하게 모여 그간의 고생을 서로 풀어보자는 모임의 초대장이 15주년을 일주일 앞두고 각 연구소에 도착했었다.
초대장이 날아간 곳은 각기 다른 대분류의 연구소들이었으나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모두 학생 친화적 커리큘럼과 교육을 진행하는 연구소들이었다. 그 중에는 물론 데 마레도 있었고, 그 소장의 지인인 바이오키네시스 연구소에도 보내졌다.
드물게도 아날로그 우편으로 도착한 초대장의 그 내용은 간결하고도 깔끔한 어휘로 모임의 취지와 날짜를 담고 있었다.
초대장의 발신인은 3학구와 2학구 사이 어디쯤 위치한 바이오키네시스 연구소, 영락榮落의 소장, 주 현성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15주년 행사가 개최되는 날, 방문객들 중 유독 거만한 아우라를 두른 중년의 남성이 그의 일행과 함께 인첨공의 지면을 밟았다.
"...여즉 꺼림칙한 곳이군."
첫 마디부터 심상치 않은 말과 함께.
성대한 퍼레이드로 시작되는 첫째 날과 다소 열기가 식었지만 그럼에도 붐비는 둘째 날을 지나 전체적으로 흐름이 느려진 셋째 날.
오늘이었다. 내가 속한 연구소에서 타 연구소 사람들을 초대한 작은 연주회가 열리는 날이.
하-
첫째 날과는 다른 의미로 무거운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겠냐고 물을 때, 안 한다고 할 걸 그랬다. 내가 뭐라고 그런 자리에 서겠다고 해서-
하으아-
한숨이 푹푹 나왔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실비실 일어나 느릿느릿 나갈 준비를 하러 갔다.
깨끗이 씻고, 긴 머리를 가능한 바짝 말리고 움직이기 편한 차림을 하면 외출 준비는 끝이었다. 연주용 드레스나 화장은 홀에 가면 해준댔으니까. 나는 집에서 묵직한 내 첼로 케이스나 들고 가면 그만이었다.
현관에서 운동화에 발을 꿰려다 말고 첫재 날의 흔적이 남은 하늘색 구두를 잠시 바라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구두였지만, 그것마저 잊을 정도의 하루를 보냈더랬지.
저걸 챙겨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관두었다. 이미 옷과 구두 다 준비되어 있을 텐데 괜히 변수를 일으키면 귀찮을 뿐이었다. 그래서 구두를 두고, 투박한 운동화를 신고 손때 묻은 첼로 케이스만 들고서 밖으로 나갔다. 타박이는 걸음 뒤로 철제 문이 묵직하게 닫혔다.
...오늘 연주회가 열리는 홀은 3학구에 있는 곳을 쓴다고 했다. 15주년은 4학구에서 열리지만, 초대한 연구소들이 여러 학구이기도 하고 늘 사람에 치이는 소장들과 연구원들이 오늘 만이라도 조금이나마 한산해진 분위기를 누렸으면 하기 때문이라 했다. 이런 것 보면 영락의 소장님은 학생 만이 아니라 사람 자체에 호의적인 것 같았다.
늘 웃고 있으니 그 속을 알 길은 없지만.
어쨌거나 나는 멀리 4학구에 갈 것도 없이, 3학구의 연주홀을 찾아갔다. 미리 착장이니 화장이니 해야 하니까 조금 일찍 갔는데 오히려 너무 일찍 왔다며 밖으로 내보내졌다. 정확히는 약간 시간이 남으니, 혈색 좀 끌어올릴 겸 산책이나 하고 오라며 나보다 일찍 와 있던 유준에 의해 내보내진 것이었다.
"가서 에이드나 한 잔 사 마시고 와!"
그 말과 함께 카드를 받았으니 어찌 안 갈 수 있겠냐만은.
밖으로 나와 근처를 둘러보았다. 이런 곳에 카페가 있을까 싶었는데, 연주홀 바로 앞에 작은 카페가 있었다.
하긴 없는게 이상한가?
이미 몇 손님 지나가는 카페로 들어가 샤인머스켓과 청사과 에이드를 한 잔 주문했다. 계산은 역시 유준의 카드로 하고, 곧 나온 에이드를 들고 다시 나와 느긋히 걸었다. 연주홀 뒤에 장미 정원이 있다고 했으니 거길 걸으며 마시면 딱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사실, 여름이지만 그렇게 덥지도 않고, 걷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연주회도 사실, 싫지 않았으니까 하겠다고 했고 그러니까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내 현실을 잠시 망각한 채.
유준이 알려준 대로 연주홀의 뒷편으로 가자 갖가지 붉은색으로 가득 찬 정원이 있었다. 규모는 목화고의 운동장보다 작았지만, 이런 정원은 크기보다 그 구성이 중요했다. 그리고 이곳의 화초 구성은 먼 발치에서 봐도 훌륭했다.
이런 곳을 미리 알아뒀다니, 유준도 가끔은 칭찬할 만한 일을 하는구나 생각하며 다가갔다. 가면서 한 모금 빨아들인 에이드가 상큼달달해서 마음에 들었다. 끝난 후에 한 잔 더 마셔야지 라고 생각했다.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갈수록 장미 덩굴 울타리 너머로 누군가의 머리가 보였다. 희끗한 남성의 머리, 아, 오늘 연주회에 온 초대객들 중 한 명일까 싶었다.
혹시 안 소장님은 아닐까?
나 답지 않은 기대감에 조금 걸음을 서둘렀다. 타닥 가벼운 발소리를 듣고 그 사람도 천천히 돌아섰다. 내가 가까이 가는 만큼 그 사람도 울타리를 따라 걸어나왔다. 이윽고 서로 식별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갔을 때,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 거기에 있던, 그 사람은, 매일 아침마다 거울로 봐야 하는 얼굴과 판박이처럼 닮은 그 얼굴은 꿈에서조차 잊을 수 없는, 차가운 저 검은 눈동자는 나, 나의,
내, 내...
"...어째서 네가 여기 있는 것이냐. 내 오겠단 말은 한 마디 전언도 하지 않았을 텐데."
아주 찰나의 순간, 내가 잘못 본 것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잔혹하게도 그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내던졌다. 꿈이 아니라며 나를 후려쳤다.
그 충격으로 정신이 멍해져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못 하는 나를 보고 그 사람은 혀를 찼다. 한심하다는 그 소리를 선명히 내며 나를 보는 그 시선은 소름 끼칠 정도로 달라진게 없었다.
이미, 12년이나 마주한 적 없는 시선 임에도.
"그래. 이제야 레벨 4인지 뭔지가 되었다지?"
그러나 차가운 시선과 태도에 비해 하는 말은 사뭇 다른 느낌이라 이제 겨우 한 마디 내려던 순간-
"이제서야 쓸모있게 되었다니, 이 바닥이 아니었다면 영 가치가 없었겠군."
내려치기 위해 들었다는 듯 낙차를 더한 말에 다시 말문이 막혔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 사람은 쐐기를 박았다.
"혜령은 날 적부터 영리했다. 그 나이가 되어서야 그 정도 밖에 되지 못 할 것이었다면 진작 죽었어야 했을 것을, 기어코 살아 나를 이딴 곳까지 오게 만드는구나. 자랑으로 여기지 그러냐."
그리고 그 사람은 뚜벅뚜벅 걸어 나를 지나쳤다. 완벽하게 닿지 않을 만큼 떨어져, 걸어가버리는 뒷모습마저 완벽했다. 나는 그 뒷모습에조차 아무 말도 하지 못 했고 들고 있던 에이드를 어느새 떨어뜨린 것조차 유준이 나를 찾으러 나와서야 깨달았다.
"ㅇ...야! 너 여기서 뭐해! 서서 조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연미복 차림의 유준이 내 어깨를 잡아 흔들고 있었다. 내가 정신 차린 듯 하자, 준비할 시간 다 됐다며 가자고 말하는 유준에게 그대로 끌려갔다. 돌아서는 순간, 달그락 하며 발끝에 치인 에이드 잔을 보며 한 모금 밖에 안 마셨는데- 라고 아쉬워한 기억이 남았다.
그 뒤는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그저 멍한 채, 헬퍼들의 손길로 인해 치장을 받았다.
촌스러운 옷에서 고급스러운 검은색 오프숄더 드레스로 바뀌고 발에는 투박한 운동화 대신 굽 낮은 구두가 신겨졌다. 머리도 얼굴도, 전문가들의 손길에 의해 완전히 딴 사람마냥 꾸며졌다. 거울 속 내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 되어서 어제 같았으면 사진 몇 장 찍어 보냈겠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앉아있는게 전부였다.
"...기운이 없어 보이네요. 초콜릿이라도 조금 먹어보겠어요?"
그런 내게 코디 한 명이 초콜릿을 주었다. 밀크와 다크가 적절히 섞인 초콜릿 조각을 하나인가 둘인가 집어먹었다. 평소라면 단 맛에 조금 더 먹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 이상 손대지 않았다. 입 안에 넣은 초콜릿이 다 녹자 삼키는 것으로 끝이었다. 그토록 진한 초콜릿이었는데,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대기실에 인형마냥 앉아있다가 내 차례라며 유준이 데리러 왔을 때 삐걱삐걱 일어나 나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와 그와 그, 그리고 그들이 초대된 3학구의 연주홀은 각자 지정석이 정해진 좌석들과 작은 무대가 전부였다.
그곳에 초대된 사람들은 각자 정해진 자리에 앉아 요구에 맞춰 나오는 커피, 차와 디저트 따위를 즐기며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거나 무대에 오르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거나 그런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무대에 오르는 연주자들은 대부분 영락의 연구소 학생이거나 연구원들이었다.
차례가 되어서 나간 무대는 작았지만 아늑한 분위기를 품은 자리였다. 앞서 연주를 마친 연주자들이 웃으며 인사를 하고 나갈 정도로 이 자리는 분명 심적인 부담이 적은, 유희에 가까운 자리였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 했다. 반주자인 유준과 함께 무대 가운데로 나와 인사를 한 순간, 피아노와 적절한 거리를 두고 놓인 의자에 앉아 첼로를 내 품에 기댄 순간,
그 모든 순간에 시선이 있었다. 시선 뿐일까. 화창한 여름 햇빛 아래 나를 힐난하던 목소리가 다시금 귀에 쟁쟁했다.
- 쓸모없는 것 - 진즉 죽었어야지 - 기어코 살아서
연주를 위해 활을 들어야 하는데, 들을 수 없었다. 작은 홀 안이 점점 그 목소리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다. 사방 어디를 봐도 그 사람의 얼굴만 보였다. 호흡이, 숨이 막혔다. 점점 더 많은 목소리가 들려 끝내 귀에 이명까지 울리기 시작했다.
덜커덩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였는지 첼로가 쓰러지는 소리였는지 혹은 내 몸이 바닥으로 널브러지는 소리였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의식은 거기까지였으니까.
연주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정식 콩쿨이나 대회가 아니니 연주자들 모두 가벼운 마음으로 즐거운 연주를 했다. 무대를 오르는 학생들이나 연구원들은 모두 오늘 초대된 이들이 한 명이라도 얼굴을 아는 이들이었다.
그녀 또한 그랬다.
검푸른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한, 천혜우라는 이름의 그녀는 오늘 초대된 이들 중에서도 명성으로 손 꼽히는 데 마레 출신이었다. 또한 그녀의 첼로 실력 역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소문이 자자했으니 그녀의 순서를 기다린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그 순서가 왔으나 누구도 그녀의 연주를 들을 수 없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로 첼로를 안고 무대로 나온 그녀는 위태롭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기까지는 했으나 활을 채 들지도 못 하고 전형적인 공황장애 증상을 내비치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가녀린 몸이 맥없이 흔들리더니 차가운 무대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예정에 없던 돌발상황에 갖가지 소리가 터져나왔다. 반주자였던 유준이 달려들듯 그녀를 안아 상태를 살피고 영락의 소장 현성도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개입은 일절 차단하고 그들 자체적인 판단이 끝나자마자 유준이 그녀를 들어올려 무대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사람은 없이, 악기만 남은 무대에서 현성이 마이크를 들었다.
"아, 아, 갑작스러운 상황에 죄송하단 말씀부터 드리지요. 아무래도, 저희 학생이 긴장을 과하게 한 모양입니다. 잠시 쉬게 하면 나아질 것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물론 그 뒤에 다시 부를 것은 아니니 다들 안심하시고, 자, 분위기 환기할 겸, 새로운 차를 한 잔 들이도록 할까요?"
현성이 그렇게 말하며 홀의 입구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차를 서빙할 홀 직원들이 들어왔다. 잠시나마 어수선했던 홀의 내부는 새롭게 내려진 푸르스름한 차 한 잔에 슬그머니 분위기가 바뀌어갔다.
하지만 그렇지 못 한 이들도 있지 않았을까. 그들 중 누군가는 그런 중얼거림을 들었을 지도 않을까.
"...저러고 살아있다니, 정말 한심하군..."
그 말을 한 인물이 방금 쓰러져 실려간 그녀와 소름 끼치게 닮았다는 사실도 누군가는 알지 않았을까.
...이곳에 홀로 던져진 그 날부터 줄곧 그들의 그림자는 나를 쫓아왔다. 나는 계속 그들로부터 도망치며 도망치고 도망쳐서...
- 기어코 살아 나를 이곳에 다시 오게 만드는 구나 - 죽었어야지 - 가치도 없는 것이
결국 그들의 말에, 시선에, 짓눌러 끝나는 것이 나의 오래된-
우웩!
구토와 동시에 잠에서 깼다. 먹은 것도 없어 위액이 대부분인 토사물이 엉망으로 쏟아졌다. 시큼하고 비릿한 냄새에 질식할 것 같아 겨우 눈을 뜨자, 낯익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 들락날락 하는, 연구소의 한 사무실이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일으키자 남은 토사물이 한차례 더 게워졌다. 예쁘게 치장되었던 드레스도 머리도 얼굴도 전부 엉망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눕혀져 있던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니다, 바닥을 기었던가, 어떻게든 움직여 사무실 주인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가장자리에 기대, 아니 걸쳐서, 질척한 손으로 그 위를 더듬어 아무거나 잡았다.
끝이 뭉툭한 볼펜 하나가 쥐어졌다. 이거면 충분했다.
검은 볼펜으로 팔뚝에 붉고 긴 선을 긋는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리며 고함이 들렸다. 아마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상관 없었다. 부들거리는 내 손에서 볼펜이 뜯기듯 떨어질 때까지 줄곧 내 팔뚝에 박고 있었다. 나를 붙잡으려는 행동을 내치며 발악했다. 내 것이 아닌 듯한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