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전에도 생각했던 물음이지만 왜 그녀가 그를 신경쓰는걸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린은 아마 몇 개월 동안 피하거나 모르는 척 하거나 혹은, 더 이상 피할 수 없겠다 싶었을 즈음에 무의식적으로 답을 내왔다.
'나는' 아이들의 면면에 웃음이 피고 추운 바람이 잊혀지는 듯한 풍경에 린은 저도 모르게 긴장의 끈을 놓는다. '어쩌면 부족할지라도 끝없이 노력하며 선의를 향해가는 그의 모습에서 잃어버린 희망을 다시 꿈꾸려 했을지도 모르기에.'
힘차게 대답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고 그에 방금전 그녀의 앞에서 어색하게 행동하던 것과 달리 꽤 능숙하게 호응을 이끌어내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그에 맞추어 저도 어린 아이들을 안아주며 조금 더 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더 큰 아이들에게는 올 한해 좋은 일 있길 바란다는 덕담을 나눈다. '그 길을 옆에서 바라보고 어쩌면 돕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오랜 시간 추락하며 잠적해있던나시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현실은 보육원의 창 밖에 부는 바람과 같이 차갑기 짝이 없어 문득 머리가 아득해지기도 한다.
"아이들이랑 많이 친해보여요. 꽤 오래 다녔었나봐요." 하지만 지금은 그 현실에서 살짝 눈을 돌리고 이 분위기에 젖어들며 언제나 처럼 미소를 짓고 그에게 다가간다. 아이들이 쪼르륵 달려와 제 옷자락 근처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적당히 모르는 체 해본다. //14
이렇게 보니 또 저보다 연상이 맞긴 한데. 좋아하는 사람이여도 꽤나 가차없는 편인 린은 의외의 면모를 봤다는 생각을 한다. 동시에 얼굴 위로 알듯 말듯한 희미한 미소가 그려지다 평소대로의 표정으로 돌아온다. 하기사 그가 실생활에서 미숙하게 행동하는 것은 환경에 익숙하지 않아서였으니, 그의 말대로 과거에 선행을 하며 돌아다녔던 익숙한 환경이라면 충분히 미덥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익숙하게 머리가 굵은 아이들과도 소통하는 그를 바라보면서 옹기종기 모여 간식을 달라 혹은 누구냐며 물어보는 더 어린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앉는다. 슬쩍 신께 기도를 드리면 간식을 주겠다 타협을 하면서 은근히 신앙심을 모아가던 그녀는 이 곳이 교회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임을 다시 상기하고서 적당한 선에서 그만둔다. 어느새 저도 모르게 동화책을 꺼내들고 읽어주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컴퓨터에 눈을 빛내던 10대 소년들이 트리를 꾸미러 달려가고 있었다. 손에 들린 엽서에 편지라도 쓰나 생각하던 중 알렌이 제게 똑같은 종이를 건넨다.
"그럴게요." 살짝 입꼬리를 올려 답하며 무엇을 적을지 생각한다. 아마도 평소의 린이라면 올해는 교단이 융성하게 해주세요. gp보상이 좋은 의뢰가 떨어지게 해주세요 등등의 자낳괴에 광신도같은 답변을 써냈을지도 모르나 이 종이에는 그런- 어쩌면 절실하면서도 껍데기 같은 소원을 쓰면 안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원할까.
[부디 솔직하게 말할 수 있기를.]
"다 적었어요." 말하면서 투명한 물기가 남아있는 빈 종이를 그에게 건넨다. 소매로 입매를 가려 그 진의도 가린 얼굴에 장난기와 긴장이 그리고 미묘한 절박함이 어려있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뒤에 이어진 수많은 일들로 인해 아주 예전과 같이 아스라해진 기억이 떠오른다. 왕게임이었나 연달아 그가 걸려서 참여자들에게 꽤 웃음을 주었던 그 밤의 이벤트가 머릿속에 맺혀 희미하던 기억이 잠시 선명해진다. 그때도 저는,
"...예뻐요."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또 다시 벌칙에 그가 걸려 의념으로 빛무리를 만들었던 적이 있었었다. 그때도 무의식적으로 같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았다. 그때와 조금 다른 점이라면 자신은 제 감상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었다. 작게 혼잣말을 하듯 감탄을 했을 뿐이지만 경계를 하지 않고서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망념도 올라갔을 것 같은데 정말 많이 수고를 들이셨어요." 큰 코트를 여미며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트리를 바라보면서 린은 손을 살짝 휘두른다. 트리를 감싼 빛과 같이 따뜻하지는 않지만 마찬가지로 빛나는 크고 작은 결정 모양의 눈송이가 하늘하늘 투명하게 빛을 반사하며 그 주위로 내리기 시작한다. 만질 수 없는 허상이기에 차갑지도 않은 환각으로 이루어진 결정이 떨어지고 바닥에 닿으려 하자 투명한 알갱이로 분산되며 사라진다.
"..." 어느새 제 옆에서 담담히 얘기를 시작한 그를 린은 가만히 응시한다. 푸르게 빛나는 그의 쪽지에서 글씨가 비쳤으나 그녀는 굳이 읽으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종이에 담은 얘기는 지금 자신에게 전하는 이야기와 같을 것이므로.
"나는..." 순간 말문이 막힌 린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내렸다.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솔직하게 전하고 싶다.
나의 본명을 진실되게 누리고 싶다. 자신의 잃은 가족의 묘를 찾아가 솔직하게 원망하며 울고 싶다. 배신이 두렵고 항상 어두운 감정에 시달리는 저의 속내를 드러내고 위로를 받고 싶다. 그리고...제 모든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솔직하게,
"저는 그대의 말에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예스럽고 격식을 차린 표현이지만 거리를 두기보다는 그저 자연스럽게 갖춰진, 습관에 가깝게 예의를 차린 어조로 말하며 다시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한다.
"저도 당신이 행복했으면 해요." 내가 욕심을 낸다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의혹이 머리를 치켜들지만.
빛의 열에 탄화되기 시작하여 붉은 빛의 쪽지에 조금씩 글자가 그려진다. 독하고 착할 수 없고 솔직하며 비밀과 거짓이 많은 나니까 더 그렇기에
까르륵 어린 아이들이 웃는 소리와 두런두런 즐거운 감정에 젖어 떠드는 소리가 주위에 흐릿하게 울린다. 잠시 멍하게 제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새하얗게 머릿속에 날아가고서 올곧게 저를 바라보는 푸른 눈을 바라본다.
아름다운 눈의 무리와 예쁘게 빛나는 빛무리가 주변을 은은하게 밝힌다. 옛날에 이리 웃었을까. 잃은 줄 알았던, 지금의 린은 정의하기 힘든 감정으로 자연스러운 미소가 그 웃음이 얼굴에 그려진다. 창 밖으로 투명한 달이 은은한 빛으로 창을 비추고 이를 투과하여 실내에 빛을 하나 더 더한다.
"달이 아름답네요." 저는 지금 매우 기쁘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이 성탄절에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