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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이 마주친 그 소년은, 작아도 너무 작았다. 유준은커녕, 혜우보다도 머리 한 개가 작았다. 올망졸망하니 젖살도 아직 덜 빠진 것 같은 이목구비에 순진한 미소까지, 이게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 하는 생각이 절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유준 역시 연구원이었으니 커리큘럼의 부작용으로 성장이 퇴행하거나 정지하는 케이스를 논문이나 사례집, 혹은 실제 피험자를 만나보는 등으로 접해본 적은 있겠으나, 연구원이 아닌 다른 신분으로 이런 케이스의 피험자와 접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새하얀 소년은, 황량하고도 장엄한 폐허에서 유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추홀구 백솔로 274길 14-9. 언제 사용되었는지 모를, 아니 언제 버려졌는지도 모를, 학교 몇 개쯤 되는 규모의 거대한 폐공장 사이에서 조그만 들꽃처럼 피어있는 새하얀 머리카락은, 그러나 유준의 시선과 마주칠 때 그 기묘한 색채의 눈을, 보라색 이외에는 그 색을 일컬을 수 있는 말이 인간의 언어에 없으나, 보라색이라는 말로도 채 다 일컫기 버거운 그 색의 눈을 하고서는 유준을 마주보고는 활짝 웃으며 예의바르게 인사해왔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감안하면, 어찌 보면 그것은 철벽방어의 일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가만, 이 황량하기 짝이 없는 폐허에서 「거주」라는 것을 한다고? 여느 폐허와 다름없는 어느 허름한 창문 앞에서, 성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선생님, 잠깐만 제 손을 잡으시겠어요?” 하고 말해오고 있다. 문도 아니고 창문 앞에서. 무슨 일인가 해서 손을 잡아보면, 부웅, 하고 보이지 않는 엘리베이터라도 탄 마냥 매끄럽게 솟아올라 2층 창문 앞에서 멈춰서는 조그만 소년과 유준. 소년은 마치 현관문을 열기라도 하듯 창문을 열어젖히고, 창문 안의 어설프게 덧댄 판자처럼 보이는 덧문을 떠밀어서 연다. 그리고는 그게 아주 자연스럽다는 듯이, 열어놓은 창문을 무슨 현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유준을 안으로 이끄는 것이다.
들어가서 보면, 이게 이 황량하고 휑뎅그렁한 거대 폐허 안에 갖추어진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투박하지만 아늑하게 잘 정돈된 생쥐굴이 꾸며져 있다. 그 창문이 진짜 현관이라고 강변하는 듯한 웰컴 매트와 그 옆에 놓인 줄사다리와 신발장(“신발은 여기 두시고 실내화로 갈아신어주세요, 선생님!”), 공들여 재정비한 나뭇바닥과 카펫, 구색은 갖춘 가구들, TV는 어디 팔아먹고 본체만 덜렁 있는 게임 콘솔, 그리고 정갈한 주방과 며칠치 스튜가 담긴 냄비. 너무도 온화하고 뚜렷한, 살기 위해 마련되고 정비된 아늑한 공간. 그리고 아직도 먼지가 더부룩이 앉은 업라이트 피아노. 일단 내부는 다 새로 조율을 마치긴 했다만, 폐공장 한가운데서 막 건져온 비주얼은 그대로다.
“원래 여기 제가 머무는 구 기숙사에서 반대편에 있는 다른 구획에 있던 거긴 한데, 조율사에 갔다오면서 여기로 옮겨뒀어요. ─거기가 참 분위기가 좋긴 했는데, 분위기 내자고 선생님을 고생시켜드리고 싶진 않으니까요···”
어느샌가 유준에 대한 경계심이 퍽 내려갔는가, 천연덕스럽게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늘어놓으면서 헤쭉 웃어보이는 그것의 가슴팍에 달려있는 파란 명찰- 목화고 2학년을 뜻하는 파란 명찰이, 참 안 어울려 보였다. 유준이 종이봉투에서 무언가 슥 꺼내주는 것을 받아들 때, 천진난만한 눈매 속에 실체를 감추고 있던, 우리가 알고 있는 보라색의 정의 밖에 발 한 짝을 걸치고 있던 보라색이 어찌나 뻔뻔하게도 선명한 보라색 제라늄으로 피어나던지.
“─아!”
고맙습니다, 하고, 유준은 성운에게서 90도 인사까지 받았다. 온 얼굴에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그리고 무엇으로 답례해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로, 성운은 레슨을 받기에 앞서 그것을 가장 먼저 자기 방의 침대 머리맡에 가져다 두고 돌아왔다. 레슨은 그 뒤에 진행되었다.
바람 없고 잔잔한 겨울날이네요. 발 크기보다 큰 부츠를 신고 있어서 뒤뚱거리며, 안 미끄러지게 균형을 잡아 간신히 벤치로 다가가 눈을 치우고 앉아요. 멀리서 언니 오빠들이 눈사람을 만드는 것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 머그컵 하나 가득 찬 코코아를 건네주네요. 보면 마쉬멜로까지 녹아 있어요. 코코아를 건네준 사람은 옆에 앉아서, 머리카락을 리본으로 묶어줘요. 그렇지만 달콤한 코코아의 맛도, 따뜻한 온기도 느껴지지 않아요. 그때 꿈이라는 걸 알면서, 머리를 묶어준 사람에게 기대면 꿈에서 깨어요. 아득한 기분 속에서, 초침 소리만 째깍째깍. 시간을 보면 애매한 새벽이에요. 여름에 뭔 겨울의 꿈을 꾸는지. 이상하게 추운 것도 같으니, 피곤해져와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고 다시 잠을 자려 한다네요. (독백으로 쓰려던 걸 그냥 풀어요) (?)
이런 자리니까.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만은 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본능에 가까운 불만.
분노라고 하는게 맞을 지도 모르지만.
"...글쎄요."
능력과 소망이 달라 모순적이지 않냐길래 그냥 툭 내뱉었다. 이데 대해서는 조금 할 말이 있었으나 일단 얘기를 들은 다음에 하기로 했다.
그렇게 슬슬 먹을 준비를 하며 태연히 대화를 나누었다. 밑반찬들이 깔리자 젓가락으로 오뎅볶음을 한두개 집어먹고 화로의 불조절을 살짝 건드리며 월의 얘기를 들었다.
"흐음, 그러게요. 천운이었네."
다 들은 끝에 내 대답은 고작 그거였다. 뭔가에 의해 탈출된 것도, 내가 제때 도착한 것도, 운이 좋았네- 라고 하며 갓 나온 고기를 불판에 올렸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고기가 익어가기 시작했다.
"고마운 줄 안다니 다행이에요. 내가 기숙사 나오게 된 계기 중에 하나가 선배 같은 사람들 때문이었으니까. 그런데 좀 전처럼 다쳐놓고 말을 안 하면 이게 또 순순히 흐뭇할 수가 없단 말이죠. 어?"
그렇게 말하며 한 손에 든 가위를 까딱거렸다. 고기를 자르기 위한 가위지만 어쩐지 수술도구 같다면 기분 탓이라 생각하자. 금방 손을 내려 고기를 살피기 시작했으니.
"그래서 아까, 모순적이니 했던 말 말인데."
불판 한켠에 기름장이 담긴 스탠 접시를 올려놓고 거기에 마늘 슬라이스들을 담그며 말했다.
"딱히 모순적이지도 않아요. 내 능력은 엄밀히 말하자면 세포를 활성화 시키는 거지 재생이 아니라서, 쓰면 쓸수록 세포가 열화되어 갈 가능성도 있어요. 아마 레벨 5 쯤 되면, 노화로 죽이는 것도 가능할 걸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딱이지 않나요. 죽고 싶은 사람에게 빠르게 죽어갈 수 있는 능력이니까."
언젠가 연구소에서 들었던, 내 능력의 미래 예상도를 얘기하며 슬슬 맛있는 냄새가 올라오는 고기를 뒤집었다. 기름기 흐르는 삼겹살과 살코기 두툼한 목살이 참으로 먹음직스러웠다.
"그런데 뭐, 아직까지는 내 능력으로 회복된게 열화되었다는 결과는 없었으니까 걱정 마요. 선배 말대로 사람 쉽게 안 죽더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