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싶어서 바라본다. 한태호가 맞다면 이렇게까지 긴장하지는 않을텐데, 분명 신한국 사람답게 급한 면이 있는 태호라면 이미 탈을 집어던지고 한탄을 하든 널부러지든 뭔가를 하기는 했을것이다. 그제서야 상황을 눈치챈 린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제대로 생각을 굴려 다시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기도 전에 상대가 탈을 벗는다. 젖은 금발에 날카로운 벽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단정한 얼굴이 휭설수설 변명을 시작하지만 린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 "......" "왜..." "왜, 어째서?" 정말 제일 들키기 싫은 사람인데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난 항상 왜 당신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 얼굴부터 달아오르기 시작한 린은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치맛자락을 꾹 눌러잡고 잠시 멈춰서 있는다.
"...이 바보 용사가." "당신 이런 거 좋아해요?" 차림새를 가리고 싶다는 것처럼 방어적인 태도로 애써 물어본다. 평소의 린이라면 알렌이 언제나 그렇듯 맹하게 있다가 곤란한 일에 휘말렸다는 것을 금방 파악하고 놀려댈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린은 그럴만한 정신상태가 되지 못했다. //20
강산은 토고의 탄환이 마치 창과 같고 자신이 만드는 방패는 그의 창보다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로 그는 파도가 자신의 몸을 가릴 때쯤 진작 자세를 낮추고 거의 엎드려 있었다. 멀티 캐스팅으로 앞에는 자신과 대충 크기가 비슷한 흙덩이를 세워놓고서, 바닷물이 얕게 차오른 바닥을 짚은 채...
중첩 캐스팅으로 시전하던 마도를 완성시키며 바닥을 양 손으로 꾹 누른다.
그리고 토고가 서 있던 자리를 노리고 거센 물기둥이 솟아오른다. 물이 시원하게 터져나오는 소리와 함께.
-임시 망념 카운터 : 170+30/210 엎드린 채 멀티 캐스팅 사용. 흙 속성 마도로 자신과 크기가 비슷한 흙덩이를 세워 대신 념 탄환을 맞게 합니다. 동시에 망념 10을 쌓아 중첩 캐스팅으로 물 속성 마도에 '고압' 키워드를 중첩해 세차게 솟아오르게 하여, 토고가 선 자리를 기습합니다.
탈력감, 차오르는 망념의 무게, 어지러움이 생각을 흐트러놓았나보다. 자신의 발 밑에서 치솟는 물기둥, 진동에 허탈한 웃음과 함께 토고는 날려지고 주변 풍경은 무로 변해갔다. 꿈이 승판이 났다. 고 판단하여 모든 걸 다 초기화 시킨 것이다. 어쨌든 토고는 바닥에 내려앉았다가 다시 일어나며 한숨을 팍 내쉰다.
"에고고고 마도사는 역시 쪼까 짜증난데이. 멀티 캐스팅? 니 고걸 남발하는 상위 마도사인거 아나?"
토고는 헬멧을 매만지며 이야기한다. 패배의 허탈감? 무력감? 그런 것보단 다음엔 이렇게 해보자. 저렇게 해보자. 하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만이 날 뿐이다. 나아간다. 그러한 확신도 들어 즐겁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분명 눈도 못 마주쳤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된 걸까. 언제부터? 왜??? 언제 위치가 바뀐거냐고?! 이럴리가 없어. 왜 귀엽다는 듯이 웃는거야. 이 바보가. 마음의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생각했던 쥬도님과 돈이 가득쌓인 제단과 저를 믿는 신도들과 그런 일련의 생각들이 하릴없이 끊어진 이성의 실 틈으로 빠져나간다. 마침내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gp의 산마저도 사라졌을때 린은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얼굴이 쉴새없이 화끈거렸다.
"바보 멍청이 변태 용사..."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자각하지 못한채 그대로 마음속에서 입까지 머리를 거치지 않고 단어가 흘러나온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과 왠지모르게 기쁜마음과 그 기쁨으로 더 큰 부끄러움이 마구 공존하여 혼란스러웠다.
"...다시는 안 입을 거에요." 왜 그런 눈으로 보는거야. 왜...
"오늘은 봐 드릴게요. 다음은 없어요." 겨우 정신차리고서 내놓은 말이다. 평소의 싸늘함이나 매서움 보다는 그저 도망가고 싶은 마음만 한가득이다. //22
"다들 큰 싸움을 겪어서 이겨내고 나면 부쩍 강해지더라고요. 영월 습격작전 때도 그렇고 대운동회 때도 그렇고. 특별반이라 그런가...?"
강산은 토고의 답을 듣고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전쟁스피커 관련 의뢰로 꽤 고생한 듯 보였으니 고생한 만큼 강해졌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중간에 형님이 깨부순 방어막 그것이, 그냥 방어막이 아니라 제가 중첩 캐스팅으로 만든 '반탄' 방어막이었습니다. 일반적인 탄환이었으면 튕겨나가는 걸 의도한 거였죠. 그런데 이야...반탄이고 뭐고 그냥 깨부수는 걸 보니 념의 경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것 같습니다. 아무튼 바깥이라 하면...현실에서요? 저는 좋습니다."
이제야 잠시 화성까지 갔다온 이성이 조금이나마 되돌아 왔는지 정상적인 말들을 하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무슨 방법이라도 생각해 내려하지만 이미 때는 지나갔고 나오라는 외침에 그대로 나오는 수 밖에 없었다. 우정이건 미움이건 어떤 관계이던 간에 사람사이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나는 법이고 그건, 이런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승패는 이미 정해졌고 린은 어쩔 수 없이 수긍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