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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장기간 학대 받은 동물이 훗날 학대에서 벗어나도 주변의 자극을 전부 학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다.
영상 속 동물은 상처를 치료해주려는 손길조차 공포와 아픔으로 받아들이며 애처롭게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지능이 낮은 동물이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이라고 다를까. 나라고 다를까.
아지의 불만 어린 눈을 어쩌라는 식으로 받아낸 것도 순간이었다. 내게 한 조각 먹인 키위를 저는 안 먹겠다며 내려놓는 아지를 보고 어이없어서 혀를 찼다.
뻔뻔한 한아지 같으니.
저래놓고 정말 그냥 두고 가면 짜증낼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오늘이 끝일지 모르는데 무슨 나중 생각이냐 자조했다.
아무리 한아지라도 내 말을 끝까지 듣고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데. 그게 사람인데 말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희야랑은 왜 갑자기 친해졌다는 말에, 섣부른 설명 대신 한 텀 뜸을 들였다. 그 설명은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아지랑은 크게 상관도 없고.
그러니 이제 내 말에 왜냐며 따지는 것을 기다렸으나 아차, 상대는 한아지였다. 정말 의심은 단 한 조각도 보이지 않는 웃는 얼굴을 보며 어이가 없고 좀 허탈하기도 해서 하하,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바보는 너지. 잘 생각해 봐.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너를 친구라고 부르거나 했었어?"
단언컨데 없었다.
웃는 건지 찡그린 건지 모를, 구겨진 표정으로 아지를 응시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 키위를 거절하지 못 하는 내가 한심했다. 새로 먹은 키위는 방금과 달리 혀가 녹아내릴만치 달았지만 끝맛은 씁쓸했다. 내 기분 탓이었다.
그 쓴 맛을 그대로 혀에 담아 말했다.
"이딴 곳에 전학 온 것도 기구한데 겉보기도 어벙한 애를 그냥 내버려두기도 그래서, 적당히 적응만 시킬라 그랬는데 네가 계속 치근댄 거야. 그 때 나는 네가 정말 귀찮았는데, 하지 말라고 할 기력도 없었어. 그래서 냅두고 좋을 대로 휘둘려 준 거라고. 그러다 나중엔 정말 귀찮아서 성적 핑계대고 멀리한 건데. 그런데도 넌 떨어질 줄을 모르더라. 그 때 너 진짜 웃겼어. 주변에 친구도 많았으면서 왜 나를 계속 귀찮게 건드려댔을까. 나는 너한테 해준 것도 없고, 항상 듣기 싫은 소리나 했는데 말야."
이제야 말해서 속 시원하단 듯이 말했다. 너 진짜 웃겼어, 라고 할 땐 고개를 비뚝 기울이며 조소를 지었다. 이래도 아니라고 착각할래? 모른 척 할래? 라고 하듯이.
기숙사 방에서 하루 종일 혼자 굴러다녀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나가질 못 해서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을까. 그저 갇혀 있는 것 만이 아니라 재미라곤 티끌 만큼도 없는 전공책을 눈 앞에 두고 있기 때문일까.
늦은 저녁이었다. 정규 커리큘럼 대신 이론 복습을 시작한지 한시간 후 결국 나는 전공책을 엎어버리고 그대로 드러누웠다. 옆에서 감시 겸 지도를 하던 유준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알 게 뭐냐.
"어째 잘 버틴다 싶더니. 아, 내 팔자 한 번 더럽네 더러워."
어이고- 하고 앓는 소리도 들렸지만 알 게 뭐야! 홱 돌아누워서 본체만체 하고 있으니 주섬주섬 책을 챙긴 그가 말했다.
"됐다. 오늘은 이쯤 하고 간다. 나오지 말고 얌전히 잠이나 자."
메롱이다.
나가는 뒷모습에 혀를 쑥 내밀었다가 결국 들켜서 꿀밤 한 대 맞았다. 얼얼한 정수리를 문지르며 투덜거리지만 곧 조용한 병실 만이 내 앞에 있었다.
...에휴.
여기는 혼자 남으면 할게 없다는 걸 이미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책을 읽거나 잠을 자거나 뿐이라, 오늘은 그냥 자기로 하고 누워서 눈을 감았다. 병실 불을 그대로 켜 뒀지만 상관 없었다. 옆으로 누워 하품 두어번 하고 눈 좀 깜빡이자 서서히 잠기운이 몰려왔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잠에 빠졌다.
...잠든 이후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늦은 저녁은 곧 밤이 되고, 밤은 새벽으로 이어졌다. 의국엔 당직인 의사와 간호사만 남아 간간히 병실을 돌거나 복도를 돌아다녔다. 조용하고, 고요하고, 기묘한 정막이 감도는 병원에
불청객이 들었다. 아무도 모르게.
끼익.
내가 뒤척인 것도 아닌데 침대 스프링 울리는 소리가 나서 눈이 떠졌다. 눈 뜨자마자 캄캄한 시야에 아 밤이구나 생각하기도 찰나 내가 병실 불을 끄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로 머릿속으로 치고 올라왔다. 동시에 누군가 내 위에 있는 것도.
[안녕?]
천장을 향해 똑바로 누운 내 위에서 사지를 짓누르고 있는 누군가가 말했다. 남자? 여자?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안광 두 알이 선명히 빛났다. 안광이란 말 밖에는 표현 못 할 색이었다. 그것이 다시 움직이자 다시 스프링 울리는 소리가 났다. 한층 가까이 내 얼굴로 다가온 안광이 말했다.
[오늘은, 살짝 장난만 치러 온 거니까, 너무 시끄럽게 굴진 마.]
장난? 무슨 장난? 오늘은 이라니? 설마? 당장 소리쳐 사람을 부르고 싶었으나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당황해하는 나를 보는 안광이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시시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재밌네. 나름 즐길 수 있겠어.]
잠에서 갓 깬 머리는 그것이 하는 말을 바로 바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밖에서 어서 이변을 알아차려주길 바랐지만 그것이 몸을 일으키는게 먼저였다.
[어쨌거나 용건은 끝났으니, 이만 가야겠다. 다음에 또 보자.]
그 직후 둔탁한 충격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쯤 지나 다시 눈을 뜨자 창 밖이 희게 밝아오고 있었다. 동 트기 시작하는 시간이었을까. 그에 따라 서서히 밝아지고 있던 병실을 둘러봤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뭐야, 그냥 개꿈을 꾼 건가 했지만...
섬찟할 정도로 절묘하게 자상을 입은 팔다리와 그로 인해 붉어진 침대가 간밤의 불청객이 현실이었음을 내게 직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