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은 그 곳에 주둔해 있던 가디언의 호의로 장비 하나를 무료로 수리받을 수 있었지만, 그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고 넘어가려 한다. 자신의 친구에게까지 상대가 그런 호의를 베풀어줄 것을 기대하긴 좀 그렇긴 했다. 마침 그 장비가 그 가디언의 모교와 연관된 장비이기도 했고.
그러니 그 대신....그는 잠깐 걸음을 멈추더니 빈센트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한다..
"형님 이것 수리비에 보태 쓰십시오."
[주강산 님이 150,000GP를 송금하셨습니다.]
"원래 형님이 못 돌아오시면 대타로 오실 분에게 드리려던 돈인데...어쨌든 형님이 무사히 돌아오신 게 어딥니까."
강산은 인터넷 뱅킹으로 돈을 입금하고는 바보처럼 웃는다. 이러려고 우주해적 토끼들의 아지트를 헤집어 벌어놓은 돈이라, 이 정도는 아쉬울 것 없었다.
빈센트주는 15만 GP가 꽂히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뜬다. 15만GP? 절대 작은 돈이 아니다. 특히 지금 같이 거지꼴 일보직전인 상황에서는 더더욱. 빌려준다는 말도 없이 주는 돈이 뭔가 꺼림칙했지만, 그래서 당장 대안이 있느냐?하면 절대 아니오였기에 빈센트는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정확히 십오 만 GP다.
"...하."
빈센트는 헛웃음을 터뜨리면서, 감사를 표한다. 돌이켜보면 빈센트의 인생에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있었던가?
"정말... 감사합니다. 강산 씨. 솔직한 말로 요즘은... 강산 씨가 제가 여태껏 만난 모든 이들 중에 제일 친절한 것 같습니다. 정말로요."
"이러려고 벌어놓은 돈이기도 하고요. 결국 제가 형님을 제주도까지 데려와서 의뢰와 별개로 게이트에 휘말리는 고생을 하게 되신 건데,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진 제가 챙겨야죠. 저희가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이 만만찮기도 하잖습니까. 각자의 이익만을 챙길 때가 아닙니다. 협력이 필요할 땐 협력할 줄도 알아야 해요."
당장 파티의 장비가 부실하면 빈센트가 죽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요, 적과의 대결이 지나치게 길어지면 다른 파티원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상대가 전우이기 때문에 쾌척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이다...라고 강산은 생각해본다. ...그것도 있지만 친구를 또 잃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고.
"몸이 회복되시면 장비 수리를 바로 알아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언제 어디서 게이트나 몬스터, 혹은 빌런이 나올지 모르는 세상 아닙니까. 그나마 신 한국 본토는 홍왕 전하께서 계시니 낫지만 아무래도 여긴 섬이고...상황이 상황이니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돈을 챙기더라도 반푼이라고 한 마디 얹던지, 아니면 그냥 그건 네 잘못이라고 선을 그었을 겁니다. 사실 그래도 할 말이 없는 건 제 쪽이고요."
장비 관리는... 그래. 기본이다. 자기 장비도 못 챙기는 정신머리로 동료 목숨은 어떻게 챙기냐고 질문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 이타심이 성직자 수준을 넘어 너무 극단적으로 가버린 나머지 자신은 안중에도 없고 남만 보이는 미친 놈이라면 모르겠지만, 빈센트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이타심'을 논하기에는 좀 부족함이 심각하게 많은 인간이었으니까. 빈센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좋은 데에 쓸 것임을 다짐한다.
"약속하겠습니다. 이 돈은... 절대 강산 씨가 이야기한 목적 이외에 다른 거로 쓰일 일이 없을 겁니다. 어차피 그거 아니면 당장 쓸 일도..."
철퍽!
"..."
빈센트의 얼굴에 귤이 날아왔다. 딱히 데미지는 없었지만... 눈에 귤즙이 들어가서 눈이 시렸다. 대체 뭔 놈이 이랬나 살펴보니...
"잠 좀 자자! 이놈들아!"
귤나무 나무껍질에 무슨 할아버지 얼굴 같은 게 있었는데, 조용히 좀 하라고 소리를 지르며 가지를 털어 귤을 던지고 있었다.
빈센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빈센트는 그 이상한 게이트를 돌면서 어쩌면 자신과 엮인 운명적인 무언가가 심각하게 잘못된 탓에 자기가 이런 고초를 겪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게이트를 빠져나올 때가 되자, 빈센트는 그 운명이 어찌 됐건 어쨌든 빈센트가 사는 세계의 논리대로라면, 빈센트는 어쩌다가 빨려들어가서 어쩌다가 탈출하거나 죽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죄송하게 됐습니다. 편히 쉬십쇼."
빈센트는 그렇게 말하면서 강산과 함께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좀 걷자마자 픽 웃는다.
"아무래도 이성적인 사람과 계속 함께 있어서 그런 걸까요? 딱히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먼저 공격을 받았는데도... 저 나무를 태워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었습니다. 그냥 사과하고 갈 길 가고 말아야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11
빈센트는 자신이 사냥했던 많은 빌런들을 생각해보았다. 지금 쫓는 이들과는 비교안 되게 약했고, 다윈주의자 때 상대했던 이들과 비교해봐도 약했지만(그도 특별반에 들어가기 전의 빈센트가 혼자서 추적하고 사냥했던 이들이었다.) 빈센트는 그들의 흔적을 추적하면서 혀를 찼던 적이 몇 번 있었다. 나라에서 정신병 약만 그럭저럭 챙겨줬어도 미치지 않았을 사람, 옆에 친구만 한명 붙어 있었어도 저렇게까지 굴러떨어지지는 않았을 사람... 뭐, 어쨌든 지은 죄가 죄인지라 전부 끝은 냈지만, 그런 사람들은 초인의 주먹과 의사의 수술칼이 아닌 주변 사람들로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거는, 슬퍼하겠죠. 당연한 겁니다... 하지만, 강산 씨라면 거기에 영원히 매여 있지는 않겠죠."
저벅저벅 발걸음을 계속하며, 빈센트는 강산을 격려했다. 아마 잃어버린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을 거다. 구할 수 없었건, 또는 있었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