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금을 모티브로 하고있지만 잘 모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상황극판의 기본 규칙과 매너를 따릅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먼저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가집시다. 모니터 너머의 이용자도 당신처럼 '즐겁고 싶기에' 상황극판을 찾았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오고 가는 이에게 인사를 하는 자세를 가집시다. ※상대를 지적할때에는 너무 날카롭게 이야기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15세 이용가이며 그 이상의 높은 수위나 드립은 일체 금지합니다. ※특별한 공지가 없다면 스토리는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7시 30분~8시쯤부터 진행합니다. 이벤트나 스토리가 없거나 미뤄지는 경우는 그 전에 공지를 드리겠습니다. ※이벤트 도중 반응레스가 필요한 경우 >>0 을 달고 레스를 달아주세요. ※계수를 깎을 수 있는 훈련레스는 1일 1회로, 개인이 정산해서 뱅크에 반영하도록 합니다. 훈련레스는 >>0을 달고 적어주세요! 소수점은 버립니다. ※7일 연속으로 갱신이 없을 경우 동결, 14일 연속으로 갱신이 없을경우 해당시트 하차됩니다. 설사 연플이나 우플 등이 있어도 예외는 아닙니다. ※기존 모카고 시리즈와는 다른 흐름으로 흘러갑니다. 따라서 기존 시리즈에서 이런 설정이 있고 이런 학교가 있었다고 해서 여기서도 똑같이 그 설정이 적용되거나 하진 않습니다. R1과도 다른 스토리로 흘러갑니다. ※개인 이벤트는 일상 5회를 했다는 가정하에 챕터2부터 개방됩니다. 개인 이벤트를 열고자 하는 이는 사전에 웹박수를 이용해서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벤트를 진행하는 이는 계수 10%, 참여하는 이에겐 5%를 제공합니다.
슬슬 이 병원생활도 질려가는 참이었다. 은우는 가만히 수액이 흘러나오는 제 팔에 꽂힌 바늘을 바라봤다. 아니, 이미 모든 기력은 회복했고 잠도 푹 자서 낫긴 했는대 대체 언제까지 이걸 차고 있어야하는건지. 이거 과잉진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은우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애초에 따지고 보면...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근처에 있는 바나나를 하나 꺼내서 먹기 시작했다. 소예가 전해준 과일바구니의 과일은 이제 거의 다 떨어져있었으나, 아직 조금은 남아있었다.
역시 퇴원을 하면 어느 정도 보답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반대편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든 후에, 화면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블랙 크로우에 대한 정보들이 여럿 담겨있었다. 일단 웨이버쪽과도 공유는 하고 있었기에 ㅡ물론 웨이버는 웨이버대로 구르는 중이었다.ㅡ 그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역시 나온 정보는 없는 모양이었다.
'되게 깊게도 숨었네. 대체 어디인거야....'
역시 퇴원을 하면 다시 찾으러 다닐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은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는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은 후에 침대에 누운채로, 정확히는 살짝 머릿부분을 올린채로 눈을 감았다. 아마 문이 열리는 소리나, 노크 소리가 들렸다면 살며시 오른쪽 눈만 떴겠지만.
병문안이라는 걸 가 본 적이 없다. 당연히 뭘 준비해야 할 지도 몰랐다. 간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결심만으로 모든 게 착착 준비되는 건 아니라서, 리라는 급히 검색창을 열고 열심히 검색어를 입력해 사전 준비를 마쳐야 했다. [병문안 선물][병원 선물][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물건]... 따위의 키워드를 돌려 가며 고심하고 또 고심하면 그나마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리라는 지갑을 들고 기숙사를 나섰다.
똑똑. 노크 소리가 먼저 울린다. 리라는 병실 옆의 팻말을 바라본다. 맞게 찾아왔겠지. 생각보다 도착이 늦었다. 선물을 고르는 데에도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고, 병원에 도착해서 이 병실까지 도달하는 데에도 약간의 착오가 있었다. 병원이란 건물은 어쩜 이리 복잡한지. 잠시 내부의 입실 허가를 기다리던 리라는 머잖아 문을 살짝 열어젖혔다. 아는 얼굴이 비스듬히 누워 있다. 팔에는 링거 바늘을 꽂은 채. 문 틈으로 보였던 눈동자가 뒤로 물러나나 싶더니 사라진다. 그리고 느닷없이 웬 봉제인형 같은 게 손에 들린 채로 튀어나왔다.
"은우 선배님, 저예요."
들리는 목소리는 이리라 인데 어째 먼저 들어오는 건 양쪽 귀가 까맣고 몸체는 하얀 강아지 모양... 인형이 아니다. 자세히 보니 목쿠션이다.
"들어가도 될까요~"
한마디 할 때마다 마치 쿠션이 말하는 것처럼 살짝 흔들어 모션을 넣어준다. 허가받았다면 그제서야 리라가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레벨5가 사용하는 병실. 그건 철현 또한 느꼈겠지만, 상당히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일반적인 이들이 사용하는 8인실 6인실 느낌이 아니라 엄연한 1인실에, 그야말로 전용 병실이라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아마 일반적으로 병실을 본 적이 있다면 그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ㅡ그렇기에 시위대들이 그 난동을 부린 것이었고.
어쨌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갑자기 양쪽 귀가 까맣고 몸체가 하얀 강아지 같은 뭔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뭐야. 왜 강아지가 여기에 들어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은우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 그 모습에 은우는 아차 싶어 살짝 움찔했다. 사실 이곳에서 가장 만나기 껄끄러운 존재가 여기에 올 줄이야. 하지만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오지 말라고 해서 오지 않을 이들도 아니었다. 이후에도 저지먼트 멤버들이 여기로 오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은우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응. 안녕. 좋은 하루야. 그리고 들어와도 괜찮아. 이미 선생님들은 다 왔다갔으니까."
괜찮다는 듯,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은우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침대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으면서 링거가 걸려있는 받침대를 살며시 옆으로 이동시키면서 리라에게 이야기했다.
"며칠 쉬면서 이미 기력은 완전히 회복되었는데, 그래도 혹시 모른다고 강제로 이걸 놓고 있어. 하하... 정말 쓸데없이 레벨5에게는 과잉진료라니까. 어쨌든 여기까지 온다고 수고했어. 딱히 어느 병원인지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 세은이에게 들은거야?"
아니면 다른 이에게? 철현이에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은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어 그는 침묵을 지키다가 피식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정말... 그때와는 반대가 되었네. 나는 잠을 제대로 못 잔 것 때문에 잠들듯이 쓰러진거긴 하지만 말이야."
병실이라는 건 촬영 장소 혹은 응급실 정도만 봐 왔던 리라였지만 대충 봐도 이게 일반 병실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1인실은 모두 이런가.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병실의 공기는 고요했다. 어쨌든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은 떨어졌다. 리라는 냉큼 발을 들여 은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지먼트에게 귀는 어디에서나 있는 법이죠."
아마 그 중 하나에게 들었겠지만 리라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대꾸한다. 시선은 침대에 앉은 은우에게 줄곧 고정되어 있었다. 링거. 침대. 환자복. 근데 왜 앉아 있지. 뭐. 차라리 잘 됐다. 리라는 대뜸 은우의 목에 목쿠션을 걸어주려고 한다. 딱히 피하지 않았다면 말랑말랑한 목쿠션이 은우의 목을 감았을 것이다.
"선물이에요~ 뭘 가져오면 좋을지 몰라서 고민했는데, 마침 입원 사유가 수면부족이라니 딱 적절했네요?"
리라는 침대 주변을 둘러보다가 의자를 끌어와 앉는다. 계속 서서 얘기하기도 그렇고, 무엇보다.
"과잉진료라. 과잉진료일까요? 저 다 들었는데. 혼자 엄청 무리하다가 픽 쓰러지셨다고. 그러면서 우리한테는 무리하지 말라고, 자극하지 말고 조심하라고 전달하셨잖아요."
"우리 코뿔소들은 평소엔 그렇게 돌진하면서 이럴 때는 입이 너무 가벼워서 탈이야. 물론, 이런 문제에서까지 입이 무거울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야."
리라의 장난스러운 대꾸에 은우 역시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누가 되었건, 일단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물론 필요 이상으로 많이 찾아오는 것은 조금 피곤하긴 했으나, 지금 같은 정도라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누워있을 수도 없는 일. 역시 조만간에 퇴원 요청을 해야겠다고 은우는 생각했다. 돌아갔을때 과연 얼마나 일이 쌓여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긴 했으나 그 또한 자신의 책임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한양이에겐 차후에 맛있는 것이라도 사줘야겠다고 생각하는 와중, 그는 그녀가 걸어주는 목쿠션에 살짝 몸을 움찔했다.
"아. 이거 뭔가 했더니, 목쿠션이로구나. 확실히 그런 모양이긴 했는데... 고마워."
일을 할 때 앞으로 이걸 끼고 하면 되려나. 아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은우는 이내 들려오는 말에는 몸을 움찔하며 시선을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지시한 것이 바로 어제이지 않았던가? 아니. 그저께였던가. 어쨌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 문제를 가지고 온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은우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회피하며 휘파람을 작게 불었다. 아마 지금 이 상황이 애니메이션이라면 식은 땀이 줄줄 흘렀을지도 모르고.
침대 머리맡을 톡톡 두드리면서 누우라는 그 말에 은우는 가만히 리라를 바라보다가 일단 조심스럽게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저 편에 있는 과일바구니를 손으로 가리켰다.
"누울게. 솔직히 과잉진료는 맞다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저거... 너네 동기 소예가 보내준거거든. 꽤 많아서 말이야.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먹어도 돼. 바나나라던가, 사과라던가 여럿 있으니까. 어차피 빨리 안 먹으면 다 상해서 버려야하기도 하고... 그래서 말이야."
방금 전, 강경한 무언가를 직접 목도한 그였기에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일단 묻는건데, 그 지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온거야? ...말해두는데, 그건 철회할 수 없어. 너무나도 위험해. 너희들을 못 믿고, 무시하고를 떠나서...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끼이지 말라고 하는 거야."
시선을 피하며 흘러나오는 휘파람 소리에 리라의 미소는 짙어졌다. 그게 평소처럼 별 의미 없는 미소였는지는 불명이다. 어쨌든 그는 웃고 있었다. 웃고는 있었다. 그래도 누우라는 대로 잘 누워줘서 다행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리라는 은우의 손가락이 향한 곳을 바라본다. 과일 바구니. 소예가 왔다 갔구나. 어쩜, 우리 소예는 선물 고르는 센스도 훌륭하니. 나중에 만나면 멋지다고 잔뜩 칭찬해 줘야지.
"네, 그럼 전 사과~ 맛있겠네요. 잘 먹을게요~"
선물용 사과는 말끔하고 반듯하게 생겼다. 붉은 껍질을 가만히 바라보던 리라는 한 입을 베어문다. 그리고 은우의 질문을 들었다. 아삭아삭. 과육이 씹히는 소리가 대답을 미룬다.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철회해 달라고 요청하러 온 것도 아니고요. 그냥 뭐~..."
한 입 베어문 사과의 단면을 입술에 뭉개던 리라는 곧 휴지 한 장을 뽑아 먹던 사과를 올려두고 말을 이었다.
"저한테는 무리하지 말고 몸을 아끼고 조금은 나를 생각해서 살아도 괜찮다고 하신 분이, 정작 본인 건강은 밑바닥까지 갈아가며 일하다가 입원까지 했다는 소식을 들어버리니까 한번 안 와 볼 수가 없어서요. 그래서 온 거예요. 걱정돼서."
리라는 은우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할 말은 많고 지시에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다. 문제는 이거다. 말도 안 되는 업무를 몰아 받다가 피로 누적으로 쓰러져 버린 저지먼트의 선배님.
"덤으로 약간 뒷담화 좀 하려고?"
말투는 가벼웠지만 진심이었다.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열아홉살 짜리 둘에게 이런 막중한 일을 얹어두고 저들은 다른 곳에서 행사 준비나 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거든요."
철회해달라고 요청하러 온 것은 아니라는 말에 은우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이 관련으로 말싸움을 해봐야 불리한 것은 자신이었고, 저들의 불만을 모두 해소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돌아가면 경우에 따라서는 지시에 불응하고 제각각 움직일만한 이도 있을테니까. ㅡ적어도 은우는 한양이라면 필시 그냥 있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ㅡ 그런 이들까지 어떻게 잘 조율하고 잘 이끌어가는 것이 부장이 할 일이지만, 그건 자신에게는 아직 어려운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작년 부장과 재작년 부장은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을 한거람. 자신은 퍼스트클래스였으나 이 관련은 너무나도 미숙했다.
사과를 먹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은우는 팔을 뻗어 또 바나나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아주 조금만 상체를 올린 후에 바나나 껍질을 깐 후에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 당연히 껍질을 아래에 있는 쓰레기통에 잘 버리면서.
"고마워. ...하지만, 이번엔 사람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니 말이야. ...정하 정도라면 어떻게든 될 것 같기도 하지만 그 외에는...아직 위험해."
그나마 정하 정도라면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이들은? 물론 다른 이들이 모두 힘을 합쳐서 어떻게든 한다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르나 그런 지경까지 어떻게 간단 말인가. 그는 살며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어 뒷담화라는 말. 그리고 자신이 혼자서 조사를 하는 진짜 이유. 정확히는 안티스킬의 지원없이 혼자서 움직이던 이유가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고개를 살며시 아래로 숙이는 듯 하다가, 태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이야기했다. 물론 그것이 진짜 태연한 것인지, 아니면 태연한 척하는 것인지는 아마 그만이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인첨공 내에서 나는 제 7위의 능력자. 이미 열아홉이니 뭐니하는 문제가 아니야. 인첨공이 나에게 바라는 것은 열아홉살 남자애가 아니라, 7번째로 강한 능력자. '에어버스터'니까. 자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나에겐 그런 힘이 있고, 그에 대한 책임과 의무도 있어. 그러니까 맡기는 거야. 이 세상에 공짜는 없고, 처음부터 나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런 것들이니까."
누구보다도 강한 능력자. 누구보다도 뛰어난 실력자. 그 뒤에 붙어있는 이름표들을 하나하나 속으로 곱씹으면서 은우는 숨을 후우 내뱉었다. 그러더니 바나나를 우걱우걱 먹고서 완전히 내용물을 비웠다.
"하핫. ...라고 말하면 조금은 슈퍼히어로 같은 느낌처럼 보였을까? 뭐..그런 거지! 영화를 보면...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들 자신들이 어떻게 못하니까 막 전화해서 맡기고 그러잖아. 그런거야. 그런거."
진정하. 그 이름이 나오자 리라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어제의 일을 기억한다. 한순간 몸이 나의 의지대로 컨트롤 되지 않았던 상황. 그건 불쾌함을 넘어선 공포였다. 사실 정하의 의도 자체가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으니 본 목적은 훌륭히 달성한 게 되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리라에게 그 순간은 전혀 가벼운 헤프닝으로 끝날 수 없었다.
"정하 후배님은 강하죠. 어젠 깜짝 놀랐다니까요. 손이 말라붙어서 움직이지 않는 기분은 처음 느껴봤어요."
지나가듯 말을 흘린 다음 은우의 반응을 지켜보던 리라는 곧 태연한 얼굴이 돌아오자 저도 모르게 옅은 웃음을 흘렸다. 아니, 그건 웃음이라기엔 차라리 한숨에 가깝다.
"책임, 의무, 요구. 그걸 모르는 건 아니에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유명한 말도 존재하고, 선배님을 포함한 퍼스트클래스라는 집단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 않습니다. 다들 상식 이상으로 강하고 든든한 일당백의 전력이죠."
리라는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다.
"그렇다고 해서 선배님이 19살 고등학생이 아닌 건 아니잖아요. 인첨공이 학생들로 이루어진 학원도시고 그 중에서 고등학교 3학년이라면 성인에 가장 가까운 연장자인 거, 그래요. 그건 맞아요. 하지만 어쨌거나 미성년이죠. 우리 모두."
선경과의 대화를 기억한다. 그의 주치의는 인첨공의 이런 생리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고 너무 많은 고뇌와 스트레스를 안겨준다고. 때문에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지만 지독한 경쟁사회인 이곳의 곪은 부분을 똑바로 바라보고 치료하고 싶다고. 그런 말을 언젠가 들었다.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선배님 개인의 생각은 잘 보이지 않네요. 이거 뒷담화인데~ 편하게 말씀하세요. 여긴 저희밖에 없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왜...— 아. 혹시 일상적으로 도청당하시나요? 저 이런 말 하면 잡혀가나?"
그리고 리라는 고작해야 1년 전에 이곳에 발 들인, 아직까지는 바깥의 상식이 더 익숙한 인물이다. 적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흔들림 없다.
"강한 힘을 가졌다고 어른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건 기이한 일이예요. 바라는 것, 요구되는 것, 에어버스터는 강하니까 어쩔 수 없이 희생해야 한다. 그건 다 누가 한 말인가요. 선배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본인이 강하니까 희생해 마땅하다고? 그건 저에게 해 주셨던 말과 앞뒤가 맞지 않는걸요."
하지만, 흔들림 없는 시선과 달리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선배님. 혹시 레벨이 올라가면 불공정 계약서 같은 거라도 쓰게 시키나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그렇지 않고서야 뭘 믿고 그들이 이렇게 입맛대로 굴릴 수 있을까. 리라는 순수하게 궁금했다. 이곳의 어른들은 어떤 더러운 방법으로 그들보다 어린 아이들을 착취하고 있나.
막연한 생각이었다. 샹그릴라는 나쁘다. 비공식 단체가 유통하는 비인가 약물. 정확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복용 순간 이능력의 위력을 크게 상승시키나 약효가 끝나면 복용 이전보다도 더 하락시키는 오버클럭 약제. 그것이 뇌를 구워버려서 과부하를 거는 식으로 작용한다는 것도, 오늘에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끔찍한 약이야! 그런 것을 먹지 않아도, 나는 내 길을 찾아가보이겠어.
퍽이나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 앞에 놓인 길은 철저한 약자의 길. 개미의 길. 누구를 상대로도 열세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인첨공의 가장 밑바닥, 최하위 피식자, 불가촉 천민의 길. 인연과 유대가 쥐어준 몇 가지 힌트에만 의지해서 걸어가기에는 너무도 기나긴 길이었으니까.
그것을 먹은 이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것을 먹게 되었는지 성운은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이 뇌를 튀겨버린다는 것을 알아버린 지금 이 순간에 와서도, 성운에게 한 줌의 샹그릴라를 내밀며 물어보면 그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그 날 이 완장을 차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성운은 필시 지금 저들의 무리 중에 이미 섞여있었을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니? 너희끼리 싸웠니? 가벼운 싸움까진 어느 정도 눈감아주겠지만 사투는 안돼."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손이 말라붙을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은우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세은이에게 전화를 해서, 확인을 해봐야겠다고 은우는 생각했다. 그 애는 정하와 친하니까 어쩌면 숨길지도 모르지만, 일단 부장으로서 확인을 해야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약간 혼을 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나 그런 생각도 아주 잠시였다. 은우는 제 오른손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던 것을 멈췄다. 자신도 모르게 능력을 아주 가볍게 손바닥 위에서 펼치며 공기를 압축한 작은 공을 손바닥 속에서 굴리던 것이 멈췄고, 작은 바람이 그곳에 살짝 불었다.
한편 이어지는 말들에 은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리라를 바라보다 살며시 시선을 옆으로 치웠다. 지금은 그녀의 눈빛을 마주할 수 없는 탓이었다. 19살 고등학생이 아닌 것은 아니라는 말은 꽤나 당연한 말이었음에도 낯설게 들려왔다. 물론 제 동기들에게 이런저런 말을 듣기야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기이기에 가능한 것. 그나마도 매우 적었다. 아니. 동기를 떠나서 저런 말들이 은우에게 있어선 상당히 낯설었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버린 그 시점부터 쭉...
"일단...도청당하는 것은 없어."
그건 그나마 퍼스트클래스들이 얻어낸 작은 권리였다. 따라주긴 하겠으나, 우리들의 행동. 즉 일거족일투족을 감시하진 마라. 엿듣지 마라. 그렇게 하면 우리들도 따르겠다. 어떻게 보면 교섭 끝에 얻어낸 작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대놓고 감시하진 않겠다라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즉, 이 병실에 누가 왔고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높은 이들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네가 잡혀갈 이유가 뭐가 있겠니. 세상에 불만을 가지는 것은 개인의 권리이자 자유인데. 나도 불만이나 그런 것들은 있어. 하핫. 살면서 어떻게 불만 하나 가지지 않고 살겠어? 하지만..."
하는 말이 틀린 것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또한 자신도 완전히 그런 삶을 살 생각이었다. 만약 이 선을 넘지만 않았으면... 그런 자유도 있었겠지. 물론 지금이라고 해서 자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따라오는 지령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모든 능력자들은 다 자신의 행복과 권리를 위해서 살아가야 하고, 자신을 우선하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이기적이 되어야한다는 내 생각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아. 하지만, 선을 넘었냐, 넘지 않았냐의 차이는 생각보다 큰 편이야. 그러니까 나는... 누구도 '선'을 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 것을 넘지 않아도... 충분히 자신의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으니까."
불공정 계약서 .그 말을 들으며 은우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가 결국 작은 웃음소리를 이었다. 그리고 두 눈을 깜빡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만약, 내가 그런 것을 썼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 이 상황을 조금 눈 감아주고... 넘어가줄 수 있으려나? 혹은... '선'을 넘지 않을 거야?"
그건 어떻게 보면 작은 경고였다. 직접적으로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이야기. 그 누가 물어도 비슷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었다.
"싸운 건 아니에요. 얘기하다 보니 어쩌다 일이 그렇게 흘러갔네요. 정하 후배님 의도도 나쁜 건 아니었어요. 은우 선배님 주장이 옳다는 걸 알려주려고 한 거였으니까."
그렇다고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이미 지나간 감각은 애매한 환상통으로 눌러붙어 지금도 이따금 손바닥을 저리게 했다. 그게 너무 싫다. 하지만 지금의 메인 토픽은 이게 아니다. 리라는 그쯤에서 어제 있었던 일의 불쾌함을 애써 털어낸다. 그리고 시선을 피하는 은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성장이 거의 종료된 십대의 끝물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앳된 얼굴이다. 우리와 다를 것 없다.
"그건 다행이네요. 퍼스트클래스의 특권과 의무가 어디까지 닿아있는지는 잘 모르고, 경찰 병력 지원도 안 해주는 윗선이 저지를 수 있는 상식 밖의 일이 어디까지인지 감이 잡히지 않기도 해서요. 잡혀갈 일은 없다니 안심이에요~"
은우가 하는 말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리라와 방향이 다르지만 확고하고 나름대로 건강한 가치관.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혹사시켜야 할 이유가 뭘까. 단순 의무라는 올가미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좀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뭔가가 존재하지 않을까. 그게 뭔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지만.
"그 '선'은 레벨인가요?"
이것만큼은 어렴풋이 알겠다. 지난 대화에서도 들었던 선이라는 단어. 그렇게 지칭될 만한 건 몇 가지 없다. 선. 넘을 수 없는 선. 레벨 5와 레벨 4 사이의 간극. 레벨 5와 레벨 0의 차이. 넘을 수 없다고 여겨지는 짙은 선.
"정하 후배님, 한양 선배님, 세은 후배님은 선을 넘어갔나요?"
눈 감아주고 넘어갈 수 있느냐. 혹은 선을 넘지 않을 거냐. 그에 대한 대답은 지연된다. 섣불리 그러겠다고 답할 수 없었던 탓이다. 당연하지 않나. 전자는 같은 저지먼트의 일원을 향한 걱정이 근원이고 다른 하나는 이 사회에 살아가는 대가로 요구되는 것에 응하지 않는 행위다. 그리고 리라는 아직 요구되는 것에 응하지 않고 자기 마음 가는 길을 따라 걷는 법을 몰랐다. 요구에 맞춰주지 않아도 되는 삶은 무엇일까. 나도 모르지만 눈 앞의 이 사람도 모르는 것 같아서 심경이 복잡해진다.
"아마 세은이는 넘지 않겠지. 남은 둘은... 어떻게 되려나. 그대로 나아간다면, 어쩌면...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느 순간 넘어버릴지도 모르지."
그 선이 레벨이냐는 말에 대해서는 은우는 대답하지 않고 그 다음 말에 대해서만 은우는 대답했다. 레벨5가 된다고 해서, 뭔가가 바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변덕이 생기고, 혹은 거기서 더 나아가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8번째 퍼스트클래스를 만들지도 모르고, 혹은 기존 퍼스트클래스 대신에 그 둘을 집어넣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그런 예시는 없었다. 자신은 레벨5가 된 이후에도 조금 더 강해지고 싶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노력했고, 여기가지 온 것이었으니까. 어쩌면 그때 멈추는 것이 제일 좋지 않을까...라고 은우는 생각했다.
"여기서만 하는 이야기지만, 퍼스트클래스는 인간이 아니야. 병기야. 인첨공의 상징이자, 그와 동시에 많은 능력자들의 정점이기도 하며, 우상의 대상이며 목표가 되기 쉬운 존재지."
어떻게 보면 그것은 전혀 뜬금없는 말이었다. 이전에 철현이 물은 질문에 대답하는 것처럼. 그것만 놓고 보자면 그야말로 '나는 정점! 상징! 우상! 하하핫! 멋지지!' 이 정도의 자뻑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은우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고 꽤나 무겁고 진지한, 무표정한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심장이 있는 분위를 살살 손으로 끌던 그는 손을 아래로 자연스럽게 내렸다.
"병기는 인간의 말에 거역할 수 없고, 의문을 가질 수도 없으며, 의사를 표시할 수도 없지. 총이 왜 저 녀석들을 죽여야해요? 라고 의문을 표기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이전에 들었던 말.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런 말을 떠올리면서 은우는 피식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는 상체를 아주 조금만 들어올렸다. 그리고 조금 올라가있는 침대의 윗부분에 살짝 걸쳤다. 반은 몸을 일으켰으나, 반은 누워있는 자세. 그 자세를 유지하며 은우는 리라를 가만히 바라봤다.
"병기에는 뭐가 되었건 안전장치가 있어. 사용하는 이를 해치면 안되니까. 당연한 거야. 자신을 죽이려는 병기 따위가 이 세상에 필요할리 없잖아. 그리고 점점 사랃믈은 그 병기에 많은 것을 바라게 돼. 그건 사용하는 자만이 아니라 옆에서 보는 자들 또한 마찬가지야. ...저 병기라면 당연히 이런 것도 할 수 있을 거야. 당연히 저런 것도 할 수 있을거야 이런 것, 저런 것, 다양하게 이것저것 다 해줄 수 있어. 와. 최고야! 우린 무적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은유법이었다. 그것을 듣고 납득을 하건, 납득을 하지 않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은우는 다시 덤덤한 목소리를 이어나갔다.
"그와 동시에 병기의 자세한 작동원리나, 기밀. 그런 것을 알아내려고 하는 이는 처단되는 법이야.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를 넘어서서 실체를 알려고 하면 그건 유출이라는 명분 아래에 처단돼. ...알겠니? 그 이상은 알려고 하면 안돼. 그냥,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줘. 부탁이니까. ...그 병기가 너를 겨냥하게 하지 말아줘."
조용히 입을 다물던 은우는 두 눈을 깜빡이더니 피식 웃어보이면서 두 어깨를 으쓱했다.
"...라는 표현. 꽤 그럴싸하지 않니? 하핫. 정말... 누워있으면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양하게 나온단 말이야. 졸업한 후에 부업으로 책이라도 써볼까. 자서전이라던가...꽤 나올 것 같은데. 아. 하지만 그건 너무 이른가. 하핫. 아무래도 좋지. 뭐."
Q.아니. 그런데 퍼스트클래스에게 위크니스가 있다는 거 조금 알려진다고 처단까지 될 일인가요? A.높으신 분이라는 작자들이 학생들 붙잡아서..(혹은 학생이었던 이들 붙잡아서) 인질극을 펼치고 그걸 이용해서 도구로 써먹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과 근거가 알려지면 인첨공의 시스템 자체가 무너져내릴 수 있기에... 자기의 소중한 이가 인질이 되고 평생 도구가 된다는데... 능력을 키우려고 하는 이는 많이 없겠죠? 아마?
대답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리라의 시선은 오른쪽 심장 부위를 쓸어내리는 은우의 손을 향한다. 저런 행동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그건 조금 전 언급되었던 사람이 언젠가 지나가듯 보여주었던 반응이라, 자연스럽게 연결짓고 마는 거다. 그저 지나칠 수 있는 작은 행동이지만 눈에 띄어버린 이상 상상은 멈추지 않는다. 에어버스터 최은우. 혈육인 최세은. 에어버스터는 선을 넘었지만 야누스는 아마 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두 사람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세은은 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알고 있는 걸까.
"선배님은 사람이에요."
병기에 빗대는 은우를 가만히 지켜보던 리라는 문득 그런 말을 내놓았다.
"병기네 괴물이네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는 물건 취급하는 사람들이 문제 있는 거죠. 물론 선배님이 가진 능력은 위험해요. 수많은 목숨을 구할 수도, 앗아갈 수도 있는 힘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힘이 있다고 사람이 아닌가요. 피가 돌고 심장이 뛰고 자아가 있는데."
어느새 그는 웃고 있지 않다.
"도청은 안 한다는 게 정말 다행이네요. 영화처럼 병실 문 열자마자 머리에 빵! 당하는 건 사양이니까요."
리라는 그 이상 말하지 않는다. 저 말은 경고다. 확실한 경고. 죽기 싫으면 그만 캐물으라고.
"그래도 이건 말해두고 싶네요. 세상이 병기라고, 물건이라고, 너는 사람이 아니니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말해도 자기 자신만은 스스로를 사람으로 여겨야 해요. 인간이라는 정체성은 생각보다 우리 정신에 큰 영향을 미치거든요."
리라는 허리를 펴고 등받이에 기댔다. 시선은 여전히 은우에게 고정된 채로.
"스스로를 인간 아닌 것으로 정체화 하지 마세요. 타의로 그런 취급 당하는 것만 해도 충분히 괴로운 일인데 나까지 나를 옭아매면 안 되죠."
주제 넘는 소리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사실상 없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들지만 은우가 그 때 의무실에서 했던 말도 지금 그가 하는 말과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조금은 당돌한 발언을 해 본다.
>>154 아 그거! 연산방해 당하고 있으니까 아마 못할거 같긴 한데ㅋㅋㅋㅋㅠㅠ 무력충돌 하는 경우 성운이 빗자루 태우고 날아서 공중에서 지원사격 도와달라고 하려고 했어 뭐 던지거나 쏘거나~ 리라가 혼자 할수도 있는데 성운이랑 같이 하면 더 효율 좋을거 같아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위험이 있긴 하지만...
길을 걷다 보면 가끔씩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 보통 길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는 가게에서 나오는 게 대부분이니까 그다지 귀 기울여 들을 만한 게 아니고, 그런 가게가 한둘도 아니니까 소리가 섞여서 정신이 없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건 일상적인 소음이고, 컨디션에 따라서 신경이 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그런 것이다.
"......"
그러니까, 지금 자신의 귓가에 들리는 소리는 일상적이지 않은, 이 자리와는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소리일 것이다. 아무렇게나, 끌어모으는 게 목적인 통일성이라곤 없는 음악의 집합이 아닌 선율 하나. 그래서 랑은 귀마개를 쓸까 했던 손을 멈추고 목에 걸어두었다. 그 대신 소리가 어디서 오는 건지를 찾는 듯 발걸음을 느릿하게 옮겼다. 인파가 흐르는 대로 걷는 게 아니라 혼자만 방향을 찾아 헤매듯이. 어느 정도 걸음을 걷다 보면 점점 더 가까워지는 선율, 이건... 피아노 소리구나.
4월입니다. 4월에 피는 꽃들은 벚꽃도 있겠지만 저는 목련도 좋더라고요. 목련은 나무 목자에 연꽃 련을 쓰는 만큼 나무에 피는 연꽃이라는 뜻이에요. 밤에 보면 환하게 길을 밝히는 가로등 같기도 하고 순백의 목련은 너무나 예뻐서 한참을 넋놓고 쳐다보게 만듭니다.
“그래. 슬슬 시작할 때가 되었지.”
“ㄴ,네? 무,뭘요?”
“버스킹 말이야.”
“네에ㅡ?”
작년 가을이었나요. 소리 언니가 커리큘럼의 일환으로 피아노 버스킹을 제안한 것이 말이에요. 제가 엄청나게 졸라서 최대한 사람이 적은 곳에서 하기는 했지만요. 생각보다는 종종 하긴 했었지만 할 때마다 엄청나게 힘들었던 느낌입니다. 제 예상대로 사람들이 별로 몰리지 않으면 괜찮은데요. 다른 사람들이 서서 듣고만 있어도 너무 부끄러워요!
겨울에 접어들면서 추워졌기 때문에 자연히 그만하게 되었는데요. 갑자기 다시 시작 하자니요! 하지만 커리큘럼이라는 말에 저는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날짜를 정하고 나니 준비는 일사천리였습니다. 저는 몸만 가면 됩니다. 물론 그날 연주할 곡들을 고르고 연습을 하기는 하지만요.
장소는 한적한 길거리 노상입니다. 사람을 끌어모을 마음이 없기 때문에 거의 그냥 길에서 연주를 하는 것과 다름 없어요. 작년에도 이 장소에 왔었기 때문에 주변 상인도 흔쾌히 버스킹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곳에 소리 언니와 함께 업라이트 피아노를 설치하고 저는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한 곡, 두 곡 연주하다 보면 사람들이 몰릴 때도 있고 몰리지 않을 때도 있어요.
.dice 1 4. = 1 1.듣고있는 사람 0명 2.한두명 듣고 있음 3.다서여섯명이 서서 듣고 있음 4.열명 이상이 모여있음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선명해지는 피아노 소리,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피아노 연주를 듣기 위해 멈춰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지금 피아노를 연주를 진지하게 듣고 있는 건 랑 자신뿐이다. 보통 버스킹을 하는 연주자는 관객을 마주보지 않고 등지고 있다. 그러니까 정확히 몇 명이 연주를 듣고 있는지는 모를 확률이 높다는 건데...
"...다들 바쁜가 보구만."
그래도 듣기 나쁜 연주는 아닌데, 이 정도로 듣는 사람이 없다는 건 그만큼 다들 바쁘다는 이야기인가 싶다. 아니면 연주를 듣다가 자리를 떠났을 수도 있고, 어쨌거나 지금 당장은 자신 말고 듣는 사람이 없어서, 랑은 잠자코 선 채로 소예의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악기 연주를 할 줄 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악기를 연주할 땐 악기에만 집중해야 한다고들 하던가. 집중력을 기르기에도 좋고, 연주하는 선율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마주친 버스킹은 썩 괜찮았다. 연주를 듣는 동안에는 연주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다행히 오늘은 사람이 몰리지 않는 날인 모양이에요. 한 곡을 마치고 주변을 둘러볼 때마다 사람들이 없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있다면 다음 곡은 무슨 곡이라는 설명이라도 붙여줘야 하기 때문에 한 마디라도 더 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이 없으면 그냥 계속 준비한 곡을 치기만 하면 됩니다. 업라이트 피아노는 좋은 것이 눈 앞에 시야가 트여있지 않아 다른 사람의 시선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냥 집중해서 건반을 누르고 있으면 이곳이 커리큘럼실인지 아니면 길거리 한복판인지 알 수 없어요.
이제 세 곡 정도만 더 치면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곡을 끝내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는데 와아아아악!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것도 아는 사람이요!
“라,랑 선배!”
저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랑 선배 쪽으로 다가갔어요. 물론 주변에 다른 듣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듣고 있었다면 인사도 못 할 뻔 했어요! 물론 그런 사정이면 랑 선배도 이해해 주셨겠지만요...?
“아,안녕하세요. 그,그,어....... 어,어디 가시던 길이셨어요?”
반가운 마음에 다가간 것은 좋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사실 랑 선배와는 그전에 우연히 차를 같이 마신 것 외에는 따로 아는 바가 없단 말이죠......
잠자코 듣고 있자니 연주가 끝났다, 끝인가? 버스킹 자체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아서 무슨 패턴으로 진행되는지를 잘 모르던 랑은, 연주가 끝나고 주변을 둘러보는 소예와 눈이 마주쳤다. 그것 뿐이지만, 자신을 부르며 다가오는 소예의 모습에 연주자가 자리를 이탈해도 되는 건가 같은 생각을 했다.
"안녕."
그래도 인사를 받았으니, 랑은 짧게 대답하고 나서 어디 가는 길이었냐는 물음에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했다. 고민한다고 해서 답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지만...
"그냥, 지나가는 중이었다."
사실이다, 목적지가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급하게 가야 할 필요는 없다, 지금 당장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하다 못해 오늘 안에 가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자신에게 다가온 소예를 빤히 쳐다보다가,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생각하던 랑은 일단 연주에 대한 감상이나 말해 볼까 생각한다.
"그, 그렇구나. 응. 기억하기 쉽단 말 자주 들었어. 좀, 좀 특이하니까... 아. 그, 이경이란 이름도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해..."
존재감 없는 주인과 다르게 이름은 퍽 눈에 띄는 편이라는 건 이레도 잘 알고 있었다. 그야 반복적으로 듣다 보면 모를 수가 없다. 그래도 최근엔 좋은 의미를 담아 말해주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 생각하며 반사적으로 이름에 대한 칭찬을 돌려주었다.
"으응. 약속이니까... 아, 안 잊어버릴 수 있게 노력할게. 꼭."
저로 인해 누군가가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건 반드시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상상하며 괜스레 초조해진 이레는 옷자락을 쥐었다. 그러고는 나란히 걸어도 된단 허락 떨어지자 발걸음 바삐 해 옆으로 붙었다. 저 또한 혼자는 싫었기에 이해 못 할 말은 아니었다.
"음......"
말해달라는 임무 부여받았으니 정말로 어떤 말이든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이 생긴다. 하나 썩 말주변 있는 편은 아닌지라 도리어 적당한 화젯거리를 찾느라 잠시 입이 다물어진다. 문득 고개를 들자 바람을 탄 벚꽃잎이 춤추듯 흩날린다. 홀린 듯 손을 뻗어 꽃잎을 제 손안에 가두려 했다.
"그, 그거 알아?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대. 진짜...인진 모르겠지만..."
비어있는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언젠가 주워들은 속설을 읊는다. 혹자는 사랑이 이루어진다고도 했지만, 이레는 소원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렇습니다! 랑 선배는 이곳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제 연주를 듣고 또 그 연주를 듣고 계셨던 것이었어요! 아으악! 부끄럽습니다.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버스킹 아닌 버스킹을 계속 해왔던 것이었는데요. 그러다 랑 선배가 저를 빤히 바라보자 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랑 선배를 올려다 봤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연주 칭찬을 하십니다?!
“그,으,으아,어, 가,감사합니다!”
저는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어요. 그리고 랑 선배가 주는 사탕을 받았습니다! 전에 세은이도 저에게 사탕을 줬었는데 제가 사탕을 좋아하게 생겼는 것일까요? 물론 좋아합니다.
“그, 자,잘먹겠습니다. 아,아직 세 곡 더 쳐야 해,해서요. 끄,끝나고 먹을 게요. 가,감사합니다. 그...... 호,혹시 좋아하시는 곡 이,있으세요? 무,물론 제가 못 치는 곡일수도 있는데 아,아는 곡이라면.......”
보통 선곡을 받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나가던 분이 원하는 곡이 있는데 제가 못 칠 수도 있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거절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아는 사람이라면 제가 못 치면 못 친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으니까요.
레벨 2가 되었다고 커리큘럼이 그렇게 달라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매번 했던 것처럼 식물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식물을 키우기도 하고 시들게 하기도 하고요. 식물들 사이에서 명상을 하거나 식물들과 온 몸을 맞대고 느끼기, 뭐 그런 것들요. 악기 커리큘럼도 계속 지속하고 있습니다. 클레식을 들은 식물들이 더 잘 자란다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요. 정말로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커리큘럼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요? 물론 정신건강과 뇌 발달에는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한양이 방금 기절시킨 행동대장. 여로가 코에 내용물을 넣자, 기침을 하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행동대장은 묶인 자신의 모습과 코에 넣은 내용물을 인지하고 여로를 보며 욕을 하기 시작한다.
"야!! 이 XXXXXXXX!!!!"
불이 꺼지자, 기절한 이에게 뭘 해도 상관 없냐는 여로의 물음에 한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세요."
한양은 곧바로 무리에게 덤비기 시작한다. 세 녀석이 한 번에 덤벼온다. 한양은 이들을 정면으로 상대하지 않고, 왼쪽 사이드로 몸을 빼서 세 녀석 중 왼쪽에 있는 녀석의 오른쪽 턱부위를 라이트 스트레이트 펀치를 던져서 한방에 기절시킨다.
가운데에 있던 녀석을 정면으로 반격했으면 왼쪽 및 오른쪽 사이드에 있던 녀석들에게 반격을 당한다. 바로 정면에서 세 녀석을 상대해야 되는 건 귀찮았다. 그렇기에 왼방향으로 몸을 움직인 것이다. 세 명을 상대하는 것은 똑같지만 정면으로는 한 녀석씩만 상대하면 되니깐.
한 녀석을 쓰러뜨리고, 바로 앞의 방향에 있는 녀석이 왼쪽 다리로 바디킥을 날린다. 한양은 강한 위력으로 날아오는 다리를 잡는다. 이 강한 킥을 어떻게 잡냐고? 당연히 정면에서 잡아내면 아프고 다친다. 특히 무에타이처럼 발의 제어는 X이나 까잡수고 위력과 속도에 몰빵한 킥의 경우면 더 조심해야 된다.
한양은 녀석이 킥을 날리자, 왼쪽 방향으로 몸을 옮겼다. 즉, 킥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어차피 킥은 한양을 맞추려는 것. 킥이 한양에게 닿기 전에 한양은 이미 몸을 옮겼다. 킥은 허공을 가르면서 타격 포인트가 사라진 킥은 위력을 잃는다. 이때 한양은 오른쪽 겨드랑이로 녀석의 발목을 끼워서 들어올린다.
"잘 가라."
그대로 왼쪽 손날로 녀석의 무릎을 도끼질 하듯이 찍어대서 무릎을 꺾어버린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녀석. 나머지 한 녀석은 전의를 잃은 듯, 거리를 벌리며 도망가기 시작한다. 그런데..뒤에서 누군가가 한양을 칼로 찔렀다.
"이거 방검복이야. 이 개X끼야."
방검복을 안에 입어둔 한양. 그대로 오른쪽 발의 축을 180°로 돌리고, 허리를 오른쪽으로 돌리며 오른쪽 팔꿈치로 칼로 찌른 녀석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가격해서 기절시킨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잠 좀 자자, 이 견인자제분들아."
그런데.. 당구장 내부의 다른 방문에서 180 후반의 신장에 런닝차림의 근육질 남성이 나오기 시작한다. 부하들이 대하는 태도와 얘기를 들어보니, 이 머니샤크의 부두목인 듯. 한양을 보며 저 녀석은 누구냐고 묻고 한양은 대답한다.
"너네들 잡으러 온 범고래."
머니샤크의 부두목은 거대한 체구와는 다르게 빠른 움직임으로 한양에게 다가간다. 한양은 바로 덤비지 않고 뒤로 거리를 벌리기 시작한다. 부두목은 균형 잡힌 자세로 한양보다 더 긴 팔과 완력을 이용해서 위력적인 펀치를 뻗어댄다. 한양은 펀치를 백스텝으로 거리를 벌리며 피하지만..벽에 몰리게 되었다.
"이제 도망 못 가네?"
"도망이 아니야. 원래 너 같은 애들 맨손으로 잡아야 내 자존심이 안 상하는데.. 지금 그럴 시간이 없거든. 빨리 끝내야 해."
"이 자식이 아직도 허세를!!!"
부두목은 마무리 풀파워 펀치를 뻗지만 주먹은 한양에게 닿지 않는다. 주먹보다 훨씬 아래방향으로 앉아있기 때문.
"이야~ 쪼리 이쁜 거 신었네. 그런데 너네들 당구장에서 짜장면 먹었더라."
"근데 왜 쇠젓가락으로 먹었어?"
순간 부두목의 왼쪽 발등에는 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한양은 옆의 테이블에 있는 쇠젓가락으로 녀석을 끝내려고 한 것이다. 부두목은 고통스러워 한다. 하지만 그 고통을 참으면서 , 왼발에 젓가락이 꽂힌 채로 앉아 있는 한양을 향해 몸을 낮춰서 주먹을 휘두른다.
"젓가락은 하나 더 있다."
남은 젓가락을 뻗어서 목을 푸욱 찌른다. 관통될 정도로 세게 찌르지는 않고, 적당히 푹 들어갈 정도로만 찔렀다.
"커헉..케흑!케흑..!!"
부두목은 기침을 하며 고통스러워 한다. 결국 한양에게서 거리를 벌리려고 하지만 한양은 부두목의 발등에 꽂힌 젓가락을 뽑아내고, 발로 밟아서 못 가게 만든다. 부두목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어딜 가."
한양은 손에 닿은 재떨이로 부두목의 턱을 기절할 때까지 강타하기 시작한다. 기절했을 쯤에는 부하들은 모두 전의를 잃은 상태였다. 한양은 여로에게 물었다.
>>0 교내 커리큘럼의 정기적인 면담이 끝나고 받아온 앞으로의 능력 개발 목표가 적힌 종이를 꺼내들어 읽기 시작한다. [진동의 강약을 조절해서 내볼 것] [특정 광물만을 지정해서 진동시킬 것] [멀리 떨어진 목표물만 정해서 진동시킬 것] ... 학교에서는 나름 신경써줘서 정해준 내용이지만 그 많은 학생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봐줄 정도로 여유가 많지 않았다. 하물며 모호하게 레벨2에 있는 학생보다는 엘리트대접 받는 레벨3,4에 좀 더 신경써서 관리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도 어디 쓸데가 있긴 하겠죠."
양 손에 금간 것도 치료됐고 멀쩡히 잘 움직이는 것까지 확인했으니 이제 그를 막을 것은 남아있지 않았다.
가장 먼저 세번째 목표를 잡아보기로 하여 간격을 두고 조약돌을 한 줄로 놓는다. 지금 상태에서는 어느 거리까지 돌을 떨리게 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보기 위해서였다.
제대로 칠 줄 모르는 사람에게 억지로 몇 번이고 같은 곡을 치게 하는 건 벌이 맞겠지만, 어쩐지 소예가 말하는 걸 듣자니 벌을 받는 것 같지 않나 생각한다. 물론 다시 제대로 연주를 하려고 하는 모습이나, 그런 걸 보면 아니란 걸 알겠지만. 아무튼, 이번에 연주할 곡은 봄의 왈츠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소예의 손짓을 따라 피아노 가까이 걸어가서는, 소예의 연주에 귀를 기울인다.
제목을 듣고 나서 연주를 들었기 때문일까, 봄 특유의 부드럽고 몽글몽글한 느낌이 곡에 녹아있는 것 같다. 마냥 밝다고는 할 수 없는 약간 가라앉은 느낌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가만히 누워서 듣는다면 금방 잠들 수 있을 것 같고. 곡이 끝나고 나서 다음 곡이 뭐냐고 묻는 소예를 물끄러미 보던 랑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입을 연다.
"...그러면 이번엔 꽃이랑 관련된 곡."
이 역시 제목은 아는 바 없으니, 어렴풋하게 이미지만을 말할 뿐이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선곡 방법인가...
여로가 와아- 하고 웃으며 손뼉을 가볍게 짝짝짝 소리나게 쳤다. 그리곤 기절한 스킬아웃들에게 능력으로 각각 다른 암시를 걸기 시작했다.
"음. 방법은 많죠?"
팔랑팔랑 부하에게로 다가간 여로가 웃었다.
"자- 누가 안내원이 될래요? 혹시 모르지? 보스에게 바래다주면 우리도 그냥 물러날지? 저 부두목 꼴 나고 싶지는 않잖아. 아- 나는 평화주의자라서. 방금 전처럼 피 튀는 건 질색이거든요.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코가 조금 매워질수도 있고- 내일 동료들의 못 볼 꼴을 보면 되지, 뭐."
여로는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의 능력은 기절한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데다,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즉, 일종의 랜덤박스나 다름 없었다.
"이렇게 할까? 이제부터 보스에 대해 밝히지 않으면, 뼈 하나씩 으스러뜨려버린다?"
생각만해도 즐겁다는 것처럼 그가 말했다. 마치 자기도 그게 가능하다는 듯 부하의 팔을 더듬어보려고도 했다. 뼈의 생김새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손길은 가차없었다.
"근데- 싫다고 해도 선택권은 없어. 순순히 안내해서 덜 다치냐, 안내 안하고 조금 많이 고통스러워지거나?" "그래서- 신분이 무엇인지 한 번 보실까- 이름이 무엇일까나-"
주머니를 뒤져서 카드를 찾아낸 여로가 그것을 외우려는 듯 한참 들여다보곤 다시 부하의 주머니 안에 넣어뒀다.
나는 가끔 이상한 생각을 한다... 아지 화내는거 귀엽다고 중학생때 소문퍼짐 < 이거 공설이라 오늘 이벤트 후에 악역 빨간머리 여자가 돌아가서 그때 화내던 쪼끄만 애 귀엽더라... 하면서 아지 sns 염탐하고(?) 그거 구경하던 블.크 원들도 오메 귀엽네 하면서 아지 사진 벽에 붙여놓고(??) 나중에 블.크 본거지 쳐들어가면 아지 사진이랑 피규어로 도배되어있어서(????)
“그,그러게요. 아,아무래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피,피아노를 치는 건 좀...... 부,부끄럽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피아노를 치는 것은 좋습니다. 이전에 엄마와 함께 피아노를 쳤던 기억도 나고요. 그 어렴풋한 기억과 그리움에 자꾸 피아노를 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봄의 왈츠의 분위기에 그런 느낌이 담겨진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제 유년시절에만 함께 있어주셨던 어머니는 여름이 오기 전 봄꽃처럼 스러지셨으니까요.
“아, 그,그러면 DJ 오카와리의 플라워댄스로 하,할게요. 유,유명한 편이라 드,들으면 아실 수도 있으세요.”
화려한 편곡 버젼이 많고 버스킹에서도 많이 치는 곡이라서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다시금 연주를 시작해요. 이 곡은 치면 칠수록 매력적이고 중독성을 가지는 곡인 것 같아요. 꽃과 관련된 곡이라고 한다면 바로 떠오르는 곡이랄까요. 원래 버스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이 아는 곡을 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곡의 마지막 음을 누르고 뗀 뒤 랑 선배를 바라봅니다. 매번 혼자서 친다거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쳐본 적은 있어도 소리 언니를 제외한 다른 아는 사람이 피아노 연주를 듣는다는 게 처음인데요. 그런데 생각보다 기분이 좋습니다. 랑 선배가 집중해서 들어주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블.크들: (아지보고 웅성웅성) 아지: ? (싸울 준비 하고 있음) 블.크들: (카메라 꺼내듬)(핸드폰 꺼내듬) 아지: ??? 무슨 수작이냐아~ ಠ𐩅ಠ 아지: 안 오면 이쪽에서 먼저 간다아~ ( ง⁼̴̀ω⁼̴ )ง⁼³₌₃ 블.크들: (저 얼굴로 저런 대사 치는 것봐)(오마이갓)(몸 부풀리는 소동물 같아) 아지: (이 사람들 이상해...)
완전한 봄이라 부를 수 있는 달이 다가왔으나 기술의 발전과 그에 따른 기후 변화는 4월 말까지 가끔 눈을 뿌리곤 하였다. 장황한 말이지만 쉽게 말해 4월인데도 쌀쌀하단 뜻이다. 그런 날씨에도 희야는 복장이 불량했다. 몸을 따뜻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조끼는 입지 않고, 대충 학생임을 드러내는 와이셔츠를 걸치고, 그 위에 소매가 긴 외투를 걸쳤다. 손을 가릴 정도로 품새가 큰 옷은 희야의 상징과도 같았다.
희야는 부실 의자에 앉아 늘어져 있었다. 불량한 복장과 늘어져 태만한 듯한 자세 사이로는 저지먼트임을 증명하듯 팔에는 녹색 완장이 있었다. 좋아하는 당구를 치거나 여가 생활을 즐기지 않고 부실에서 천장을 멍하니 보며 천장 자재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을 하나하나 셈하고 있는 이유라면 오늘은 순찰을 가는 날이라 답할 수 있다. 재미 없는 시간. 그렇지만 저지먼트라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 아, 시작도 안 했는데 격하게 땡땡이 치고 싶다…….
"헉."
땡땡이! 희야는 의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왜 이 생각을 못했지? 밝은 목소리가 들리자 희야는 예의 동글동글한 두 눈동자를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굴렸다.
"희야 여기 있어요."
희야는 소매를 흔들었다. 정황상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것이리라. 인사와 동시에 오늘의 순찰 활동은 어느새 머리에서 제2의 계획과 함께 루트가 편성되고 있었다.
조금 모순적인 말이었다. 분명 여행은 재미있는 일이고, 기억에 남을만한 일인데도 그녀는 어째서인지 남의 이야기를 하듯 생소하다는 반응을 했다. 어쩌면 그만큼 오래된 기억일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어릴적은 물론 학창시절마저 완벽하게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연주를 듣기 위해 멈추는 사람이 많이 없는 게 이상할 정도로 괜찮은 연주를 하고 있으니... 어쨌건 자잘한 실수 없이 끝까지 곡을 쳐낸다는 건 보통의 집중력 이상을 요구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랑은 이어지는 곡에 귀를 기울였다. 아, 확실히 이 곡은 들어본 적이 있다. 그래도 전기 신호로 변환되어 다시 출력되는 소리가 아니라 이렇게 직접적으로 피아노를 통해 듣고 있자니 느낌이 색다르다는 생각을 하며, 랑은 연주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벌써 마지막인가, 으음."
그러면 뭘로 할까... 여전히 곡명은 떠오르지 않고, 그러면 어떤 주제를 제시해야 할 텐데. 마지막이라... 마지막이라면 그에 맞는 느낌의 곡은 있나?
"작별 인사랑 연관된 곡, 있을까."
연주가 끝나면 연주자는 자리를 뜨는 법이니, 관객들에게 잘 있으라며 인사 정도는 하지 않을까 싶어 꺼내보는 것이다.
자고로 사람이란 궁지에 몰리면 무슨 일을 할지 모르는 법이었다. 당장 아라만 해도 만약 자신의 프라이버시까지 모두 도청을 하고 감시를 하겠다고 한다면 어디 가만히 있겠는가. 자신이 죽는 한이 있고, 그녀의 위크니스가 죽는 한이 있어도 이렇게는 못 산다고 이야기를 하며 인첨공을 박살내고도 남을 이였다. 그리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세은에게 평생 저주받을 것을 각오하더라도 아마 뭔가 움직이긴 했겠지. 그렇기에 저들이 무서운 것이었다. 확실하게 퍼스트클래스를 통제하면서 적절한 균형을 만들어내는 그들이...
"사람이라."
그는 굳이 더 무슨 말을 하진 않았다. 리라의 말을 조용히 듣기만 할 뿐, 거기에 무슨 더 말을 붙이진 않았다. 병기라는 것을 반박하며 너는 인간이고, 너 스스로가 거기에 굴복하면 안된다고. 자기 자신이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냐고. 이거, 그때 자신이 했던 말과 판박이 아닌가? 물론 그 흐름이나 내용은 조금 달랐지만...
"그때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거니? 넌?"
자조인지, 아니면 조금 우스웠는지 그의 입에서 풋.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것 때문에 그녀를 이곳에서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묘한 느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인간이라. 인간이라. 조용히 눈을 감으며 은우는 그 말을 곱씹었다. 그녀는, 아니. 그녀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너무 물러터졌다고 그는 생각했다. 퍼스트클래스를 당당한 인간으로 보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많은 이들이 너는 우리와는 다른 이라고 판단하고 멀어졌고, 네가 뭘 아냐고 멀어지고, 질투하며 시기했으며 마침내 그런 이들도 다 포함해서 갑자기 비굴해지며, 에어버스터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게 일반적이었고, 그게 자신들이 받는 일반적인 시선과 태도였다.
"...너는, 아니. 너희들은 내 힘을 제대로 보고서도 나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핫. 아니.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야. 단지, 단지 말이지. 이렇게 말하는 이는 극히 드물어서 말이야. 그건 아라도 그렇고, 다른 퍼스트클래스들도 마찬가지일거야. 그것조차도 그렇게 유도가 되어있으니까 딱히 다른 이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퍼스트클래스가 그렇게 보이도록, 누군가가 유도를 하고 있다는 의미일까. 허나 은우는 굳이 그것에 추가적으로 설명을 붙이진 않았다. 그 대신 조용히 미소를 지으면서 리라를 바라봤다.
"그래도 고마워. ...솔직히 조금 신선해. 이렇게 정면으로 이런 말을 듣는 것은 꽤 오랜만인 것 같아서 말이야."
맞췄다! 기억력이 오늘은 제 기능을 해서 다행이다. 이따금 생각에 잠기며 동시에 다른 일을 하면 중요한 것을 잊는 탓이다. 다행스럽게 머리에서 이것저것 세우던 계획에도 차질이 없다. 다만 한 가지 막혀버린 것은, 땡땡이를 어떻게 이끄냐가 아닌 어디로 가야 하느냐인데……. 희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좋아해! 고마워, 잘 먹을게요-"
비스킷이다! 희야는 소매로 비스킷이 부서지지 않게끔 조심히 받더니, 활짝 미소를 지었다. 막혔던 퍼즐 조각을 찾아 끼워낸 것 같다! 머리 위에 전구가 있었다면 떠올랐겠지. 지금 당장 홀로그램으로 띄워낼 수야 있겠다마는, 그랬다간 세은이에게 들킬 것이 뻔했다.
"아- 그거요. 순찰 루트, 요즘엔 위험하니까 깊은 곳은 안 돌고요, 학교 뒤부터 시작해서…… 어디더라, 쭉- 이어지는 골목만 돌 건데…… 으응, 나머지는 부실 나가면서 얘기해줄게요."
그래, 세은이에게 들킬 것이 뻔하니까. 희야는 시선을 당신을 향해 돌리다 방긋 미소 지었다. 마주치면 본능적인 불쾌감을 불러 일으키는 기분 나쁜 눈이지만, 낯가죽에 매달린 속눈썹은 온전히 눈을 감는 것으로 불쾌감을 감추려 들었다.
"걱정 말아요, 희야는 말랑말랑한 순찰을 좋아하거든요."
……순찰이 말랑말랑할 수 있나? 싶어도 부실 밖으로 나서기가 무섭게 목소리를 슬쩍 낮춰 속닥이려 들었다.
"샹그릴라 수거할 때 혹시라도 학생인 척하는 스킬아웃이면 무섭고, 싸우기는 싫고, 날은 좋으니까요. 그러니까 말랑말랑한 순찰이 좋다고 생각해요. 우린 학생이잖아요?"
웃음소리에 리라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 자신도 그가 은우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그 말이 맞다. 정말 그대로 받아 읊은 거나 다름 없었으니까. 다른 점이라면 리라는 영글지 않은 내면을 드러내고 말았고 은우는 딱히 그러지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그럼 어쨌든 손해는 이쪽이 더 봤다 싶어서, 리라는 짐짓 당당한 얼굴로 돌아온다.
"배운 건 써먹어야 하니까요. 훌륭한 학생이죠?"
그렇게 말하며 표정 없는 얼굴에 다시 웃음을 덧그렸다. 그러고 있으면 다시 은우의 목소리가 들려와 리라는 잠시 말을 아낀다. 그렇겠지. 강한 힘, 권력, 그 외 부러워 할만한 무엇을 가진 누군가를 동일한 인간 객체로 대하지 않는 건 사람들의 오랜 본능이다. 특정한 기준을 정해놓고 그 선에서 한없이 웃도는 사람을 마주하면 두려워하거나 추앙하거나 멋대로 사랑하고,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기대를 배반했다는 명목 하에 경멸과 욕을 퍼부으며 돌을 던지기 마련이었다. 군사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포지션의 은우와 잘 꾸며진 상품이었던 자신은 처해진 상황의 급부터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라는 일부나마 은우의 심정을 짐작한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오만한 마음을 밖으로 내놓지는 않는다. 홀로 구축한 공감대는 얕고 얄팍하며 이해자가 되기에는 한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퍼스트클래스로서의 힘과 인간 최은우는 별개니까요. 가수의 노래 한 곡이 그 사람 전부를 대변하지 않듯이 선배님의 힘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물론 특수한 힘, 특수한 환경인 만큼 그렇게 간단히 비유할 건 못 되겠죠. 하지만 아무리 밀접하게 얽혀있어도 힘만이 은우 선배님을 이루고 있는 요소는 아니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은우 선배님은 초능력만으로 살아가나요?"
인간관계, 취미, 취향, 관심사... 인간은 한가지 요소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리라는 적어도 이게 병기와 인간의 차이라고 믿는다. 병기는 기능 자체가 존재 이유지만 인간은 그보다는 더 다채로운 이유로 지상에 발 묶여 살아간다고. 그럴 가치 있는 존재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
"고맙다는 말은 선배님 스스로에게 하셔도 좋을 것 같은데요~ 말씀드렸잖아요. 전 배운 대로 했을 뿐이라고."
한양은 스트레인지의 한 허름한 건물로 들어가려고 하지만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에 의해 저지당한다.
"나는 너네 보스 보러왔어. 너랑은 볼 일 없어."
"형님? 무슨 일입니까? 잔챙가 까붑니까?"
장발에 흰 자켓을 입은 남성이 다가온다. 문지기는 장발에게 한양을 처리하라고 명령한다. 장발은 자켓 안에서 장도리를 꺼내려고 한다.
"너. 그거 꺼내면 죽는다."
"죽여보든가."
장발은 장도리를 꺼내지만 바로 덤비지 않는다. 한양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공격을 할 타이밍을 잡는다. 한양은 오른쪽 정강이로 녀석의 왼쪽 허벅지를 향해 로우킥을 차려고 한다. 장발은 왼쪽 무릎을 들어올려서 로우킥을 방어하고 공격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장발의 무릎에는 한양의 정강이가 닿지 않았다.
대신 들어온 것은 장발의 왼쪽 목으로 찍히는 한양의 발목. 로우킥을 차는 도중에 무릎과 고관절을 틀어줘서 궤도를 바꾼다. 아래에서 위로 말이지. 그렇게 킥이 물음표 모양으로 궤도를 그린다고 해서 Question mark kick 혹은 브라질리언킥이라고 불린다.
장발은 한양의 킥에 쓰러지고, 장도리를 한양에게 뺏긴다.
"이 녀석이!!!"
문지기가 덤비기 시작한다. 2m 내외의 신장에 100키로는 우습게 넘어가는 근육량과 압도적인 체급. 문지기는 흉기나 다름 없는 주먹을 한양에게 기습적으로 휘두른다.
"미안하다. 시간 존X 없어서."
한양은 상체를 아래로 숙이며 문지기의 주먹을 가볍게 피한다. 상체를 숙인 채로 장도리를 오른손에 쥐고, 문지기의 왼쪽 무릎관절을 강타한다. 순간적인 고통에 움찔하는 문지기. 숙인 한양에게 어퍼컷을 날리려고 하지만..
"뿌드득-"
어퍼컷을 닿기도 전에 강타한 무릎을 몇 번 더 장도리로 쳐줘서 관절을 박살내버렸다. 관절이 부숴진 고통에 비명 지르는 문지기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오른쪽 무릎관절도 장도리로 작업하듯이 박살내서 아예 일어서지도 못하게 만든다.
"이제 기절해라. 얍."
문지기의 턱을 강하게 발로 차면서 기절시키고, 장도리를 바닥에 버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지하로 들어가며 낡은 문을 연다. 방 안에는 한 구릿빛 피부의 남성이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응? 어떻게 들어왔어?"
"뚫고 들어왔지."
"혼자서?"
"그래."
"걔가 어디 가서 깨질 녀석이 아닌데..알았어."
남성은 의자에서 일어난다. 아까 문지기 녀석보다누 신장이 작지만 아무리 작게 쳐도 190 중반대의 키. 탈의한 상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문지기에게 꿀리지 않는 근육질의 몸. 더욱 주의해야 되는 건 아까의 문지기보다 훨씬 더 기다란 팔이었다. 만두귀를 보아하니, 단순히 신체만 단련된 녀석이 아니라는 것.
남성은 피던 담배를 한양의 얼굴에 던진다. 한양은 얼굴을 움직여 담배를 피하지만 담배는 셋업이었다. 남성의 왼쪽 엘보에 안면을 강타당하고 다운당한다.
"문지기 녀석 잡았다고 우쭐대지 마. 그 녀석하고 내 실력은 하늘과 땅 차이니깐."
"끄으으..확실히 아프긴 하네."
"이걸 맞고 일어나? 딱히 봐주려고 친 건 아닌데.."
한양은 비틀거리면서 일어나며 자세를 잡는다.
'리치가 너무 길어. 방금 엘보.. 분명 서로의 거리는 짧지가 않았는데. 타격범위가 좁은 엘보지만, 녀석이 쓰는 엘보는 웬만한 녀석들이 쭉 뻗는 스트레이트 펀치랑 길이가 맞먹어. 이번 녀석.. 쉽지 않다.'
"그냥 그대로 쓰러지면 좋았는데. 굳이 이번 기습이 아니어도 내가 너보다 강하다는 걸 보여줄게."
남성은 하필이면 격투가들이 가장 까다로워하는 조건들 중 하나인 왼손잡이었다. 압도적으로 긴 리치에 강한 파워. 방금전의 기습으로 알 수 있는 센스와 지능. 어려운 상대였다.
남성은 오른쪽 팔을 살짝 뻗어서 상대를 압박하는 롱가드 자세를 취했다. 앞손을 뻗어주며 상대가 거리를 좁히는 걸 방해하고, 손바닥을 펴서 상대의 시야를 가려서 공격을 예측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런 실전에서는 펴진 손을 이용해서 상대의 눈을 찌를 수도 있다.
"우드득..."
한양은 자신의 손 앞에 뻗어진 남성의 오른손. 그대로 왼손으로 남성의 오른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잡아서 부러뜨린다. 예상치 못한 한양의 대처법에 당황하고, 손가락이 부러진 고통에 의해 빈틈이 생긴다.
빠르게 거리를 좁혀서 녀석에게 파고드는 한양. 그대로 안면과 바디를 넘나드는 펀치를 꽂으려고 했지만 남성은 양팔로 한양의 겨드랑이를 파고들어서 껴안아서 민다. 언더훅이었다. 긴 팔이 타격에만 좋은 게 아니었다. 상대를 잡아던질 때도 좋지.
"거리만 좁히면 될 줄 알았어?"
남성은 그대로 밀어붙이면서 압박하려고 하지만 한양은 언더훅이 완전히 잡히기 전에 자신의 머리를 남성의 오른쪽 쇄골에 세게 박으면서 충격을 준 뒤에 오른팔이 한양의 겨드랑이로 파고드는 것을 풀어냈다. 잠시 밀어내는 힘을 버티다가, 한양은 오른팔로 자신의 오른쪽 겨드랑이를 파고든 남성의 왼쪽 팔을 겨드랑이에 껴서 걸어 잠근다. 오버훅이었다. 왼손은 남성의 오른쪽 손목을 잡았다.
그대로 남성의 미는 힘을 이용해서 남성의 왼팔과 오른쪽 손목을 당기며, 오른발로 디딤발인 남성의 왼다리 안쪽 사이드를 걸어서 땅에 박아버린다. 오른쪽 손목이 잡혔기에 기술을 당하는 도중에 땅을 짚고 반격을 할 수도 없었다.
"너 이 새X가...!"
하지만 한양은 아직 오른쪽 손목을 안 놨다. 굳이 마운트를 타거나 암바를 걸 필요도 없었다.
"끄아아악--!!!!"
그냥 손목을 돌려버리면 되니깐.
"내가 센 나쁜놈들은 싹수를 잘라버리는 편이야. 나중에 또 복수하거나 이렇게 당해도 악행을 저지르겠지. 업보라고 생각해라."
완전히 제압된 남성의 왼쪽다리에 힐훅을 걸어서 발목을 돌려버린다. 남성은 그대로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우는 것에 가까운 비명을 질러대며 욕을 뱉기 시작한다.
"너 같이 말하는 사람이 좀 더 인첨공에 많았다면, 지금 같은 상황은 조금 줄어들지 않았을까. 아쉽네. 정말로. 너무나 아쉬워."
눈을 감고 떠올린 것은 자신에게 족쇄를 채우고, 제 동생에게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그 작자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이 후배같은 마음이 있었다면, 과연 자신은 지금 이 순간, 뭘 하고 있었을까. 적어도 세은이만큼은 조금 더 자유롭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불안감을 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은우는 참으로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안전장치를 내 힘으로 풀 순 없어. 그러니까 너를 반드시 또 실망시킬지도 몰라. 만약... 그 안전장치를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는 이가 있다고 한다면... 뭘 해주면 좋을까. 생각도 해본 적이 없어서... 뭐가 좋을지 떠오르지 않네. 하핫. 사실상 뭘 주려고 해도 딱히 줄 수 있는 것도 없긴 한데..."
돈? 명예?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런 일은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후배가 열심히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지만, 그럼에도 결과가 바뀌진 않았다. 자신은 여전히 그 안전장치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단지, 단지 그것이 조금 분하다고 생각하며 은우는 고개를 위로 들어올렸다. 제 얼굴을 보이기 싫은 탓이었다. 그렇다고 눈에 눈물이 고이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고, 단순히 표정이 조금 웃긴 느낌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 탓이었다.
"괜한 것을 가르쳤네. 진짜. 차라리 아무 것도 신경 안쓰고, 그냥 저 선배는 내로남불이구나...하고 넘겼으면 너도 조금 더 편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정말, 세상이라는 것은 너무나 예상할 수 없는 것들 뿐이야. 연산식과 너무나 달라."
이어 그는 잠시 그렇게 조용히 있다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적어도 이 후배는...
"나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너는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길 바랄게. 너에게 해를 끼치려는 것들 모두에게 말이야. 하핫... 딱히 너만이 아니라 후배들이나 동기들 다 포함이긴 한데... 오늘은 특별히 너만 그랬으면 좋겠네."
그렇기에 정말로 별 거 아닌 것이긴 했지만, 나름의 축복을 내밀면서 그는 리라를 가만히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이내 그는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너는 너를 위해서, 그리고 네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마음껏 하면서 살았으면 해. 가능해. 여기까지 와서 나에게 그렇게 말을 할 정도의 이라면 말이야. 솔직히 아이돌...쪽은 난 잘 모르겠고, 세은이를 보면 분명히 너도 이것저것 귀찮은 것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싶은데... 혹시나 그런 것이 네 발목을 잡으려고 한다면... 당당히 뿌리치고... 할 수 있어. 너도 아이돌이 아니라 이리라니까."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던 은우는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잠시 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면서 키득키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 그런 거 없으면 못 들은 것으로 하고. 그냥 내 멋대로의 상상이니까. 아니...하지만, 세은이는 은근히... 너 왜 못 알아보냐고 되게 잔소리를 했던지라... 그냥 그렇게 생각한 것 뿐이라서... 아무튼 뭐, 그런거야! 응! 그런 거!"
/뭔가 이것저것 정말로 은우에게 있어서는 고마운 말이 많았지만...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슬프다...미안해..리라야..은우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라... 그건 조금 쓸쓸하게 느껴지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행위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면 더더욱. 사람은 기억을 토대로 자신을 만들어 간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간에 분명 그렇다. 그런데 그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좋아."
나는 앉아있던 선베드로부터 불쑥 일어선다. 그야 그렇다. 후배님에게 그런 말을 들어버리면 말이지, 이렇게 바다까지 와서 앉아만 있을 순 없잖아. 나는 슬슬 시동을 걸듯 손을 두어번 털고서는 입꼬리를 씩 올려 웃으며 앉아있을 점례를 바라봤다.
"그럼 하러 가볼까, 모래놀이!"
우리의 앞에는 넘실거리는 바다가 있다. 반짝이는 모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뒤엎어버릴 몸과, 도구도 있는 것이다! 태양도 아직 중천에 떠있었다. 있잖아, 이쪽은 모처럼 알바도 휴가내고 온 몸이라고. 그 말은 즉슨, 학생이 받을 수 있는 최저한의 시급을 포기하고서, 쥐꼬리만치 벌어 쓸 수 있는 하루치 생활비를 포기하고 왔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런만큼, 잔뜩 놀게 해주지 않으면 섭하지 않겠나!
"따라 와라! 헤헹, 두 번 다시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시켜줄테니!"
나는 방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점례에게 손을 뻗으며 움직인다. 그러나 다른 것은, 이번엔 기다리지 않았다. 점례가 내 손을 잡았든, 아니면 따라오지 않았든 간에, 내쪽에서 멋대로 그 손을 잡아 그녀를 밖으로 끌고서 밖에 나온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려고 했다-
>>0 (훈련) 그 날의 출동 이후로 무슨 짓을 해봐도 불쾌한 분노가 머리 한 편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레이지룸에 가서 가전제품까지 포함된 풀코스를, 레이지룸 안의 부술 수 있는 것이라면 죄다 때려부수고 오는 길인데도 전혀 호흡이 가라앉지를 않는다. 아, 이 머리 꼬락서니 좀 봐. 거울을 보며 다은은 생각했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면 자동으로 볼륨펌이 되는 능력이라니. 스스로 해놓고 내심 흡족한 농담이라 화가 나는 와중에도 한 모금 웃음을 웃을 수 있어 그나마 한결 낫다고 다은은 생각했다.
"응. 이번엔 참 멋지게 당했네."
오늘 스파링은 전혀 페이스 조절이 안 될 것 같아서, 다은은 쓴웃음을 지었다. 호흡도 아직 가쁘고, 아드레날린도 어정쩡하다. 다은은 이를 까드득 갈았다. 매일 당하면 당할수록 새로운 종류의 엿이 튀어나와 자신을 엿먹이는데, 이 빌어먹을 도시는 이건 겨우 시작일 뿐이라고 깔깔대고 잇는 것 같아 심히 불쾌하기 그지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불쾌한 두통이 아직도 가시지를 않는다는 점이다. 조금이라도 화를 낼 때마다 그 두통이 다시 도지는데, 그 날 이후로 화가 가라앉지를 않고 있는 두 가지 악영향의 끔찍한 콜라보였다.
"아주 톡톡히 배웠어."
복서 팬츠와 탱크탑으로 갈아입기 전에, 다은은 간신히 숨을 고르고는 가방을 다시 집어들었다. 역시, 이렇게까지 당하고 보면 이 쪽에서도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다. 잔고를 바닥까지 탈탈 털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할머니께 송구스러운 연락을 드리는 한이 있더라도 앞으로 어떤 엿들이 자신을 기다리는지는 알아둬야겠다고, 다은은 생각했다. 스파링을 시작하기 전에 잠깐 통화 두어 통 정도 할 시간은 있을 것이다.
한숨. 무거운 내용의 문장. 근육의 떨림으로 드러나는 복잡한 감정이 시시각각 정보화되어 뇌에 박힌다. 실망시킨다라. 리라는 대략적으로 짐작할 뿐 은우의 구체적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여태까지 나온 이야기만 종합해봐도 '안전장치'라는 게 계약서 같은 평화로운 건 아닐 거라는 결론이 나온다. 심장을 쓸어내리는 동작. 최은우와 최세은.
"괜찮아요. 모르고 편한 것보다 알고 괴로운 게 나으니까요. 모른 척 지나가는 건 많이 했는데 뒷맛이 좋지 못하더라고요."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것을 회피하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리라는 이어진 말에 남몰래 어금니를 악물었다. 얽매이지 말아라. 정말 그러고 싶었다. 리라는 입을 잠깐 벙긋거렸다가 이내 다물고, 새로운 문장을 구성해 뱉었다.
"좋은 말씀 감사해요. 새겨들을게요."
상투적인 감사인사. 하지만 진심이었다. 당장은 어렵더라도 언젠가 이 말에 힘입어 겁쟁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원하는 것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불특정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아도 행복하다는 걸 몸소 느낄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세상이 한번에 바뀌진 않죠. 하지만 살아있으면... 살아있다면 조금은 더 나아질 거예요. 전 그랬어요. 그러니까 은우 선배님도 사세요. 가능하면 오랫동안."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리라는 한 입 베어문 사과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문을 닫기 직전 잠시 은우를 바라보던 눈동자는 몇 초를 그 자리에 더 머물렀다가, 문이 온전히 닫히자 천천히 떠나간다.
가끔은 작은 계기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기도 한다. 해도 제대로 뜨지 않은 이른 아침, 바나나 향이 묻어나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 들었던 가요는 리라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변혁이다. 꿈을 가지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건 정말이었다. 오색찬란하게 물든 하늘 아래를 걸어가며 리라는 결심했다. 노래하고 춤추며 새처럼 날아오르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 이후로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내심 그가 배우가 되길 바랐던 부모는 몇 번이고 반대를 입에 올렸다. 하지만 리라는 포기하는 대신 자주 노래를 부르고 혼자 춤을 연습했다. 그리고 어느 날, 모 댄스학원의 내방 오디션에 연고도 없는 어린애가 침입하는 사건을 마지막으로 부모는 뜻을 꺾는다. 인생 최초로 부모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은 때였다. 곡절이 많았지만 그 뒤로는 대체로 순탄했다. 리라에게는 소위 말하는 재능이 있었다. 멋대로 침입한 바로 그 학원에 등록한 지 몇 주도 되지 않아 수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존재로 거듭난 그는 곧 아이돌 기획사의 문을 두드려서 연습생이 되었고, 선배 그룹의 활동 시기 탓에 새 그룹 런칭과 데뷔조 발표가 자꾸만 미뤄지자 그대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는 정글에 제발로 들어갔다. 그건 분명 무모하지만 동시에 대담한 선택이었다. 프로그램은 분명한 메리트가 존재했지만 부정할 수 없이 비인간적이었다. 전국에서 몰려든 연습생들을 안방 브라운관에 올리며 표수로 평가하고 등급을 나누고 대중의 반응을 눈앞에 들이밀며 차가운 독설을 아끼지 않았다. 방송분만 해도 그랬으니 카메라 뒤에서 무슨 일이 더 일어났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겠다. 어쨌거나 리라는 견뎠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가장 잘 하는 게 그거였다. 배 곯으며 안무를 연습하고 대형을 짜다가 현기증이 일 때, 보컬 평가를 앞두고 목이 갈라져 말도 하기 힘들 때,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그를 잡아준 건 이제 얼굴도 흐릿한 초등학교의 인연이 들려준 노래뿐이었다. 고작 노래 한 곡. 고작 노래 한 곡이 리라를 연습실로도 스테이지로도 촬영장으로도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그 날. 최종 결과가 발표되는 그 생방송 날.
아직도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리라의 심장은 불안하게 박동한다. 4등이 발표될 때까지 이름이 불리지 않았을 땐 마지막 희망의 끈을 붙잡았고 3등이 발표될 땐 구질구질한 마음이 들었으며 2등이 발표될 땐 그저 눈을 감고 싶었다. 때문에 그 다음 그의 이름 석 자가 불렸을 때, 리라가 울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스포트라이트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전국으로 송출된다. 신성新星의 탄생이었다.
이리라는 끝내 영광의 1위를 쟁취했다. 그제서야 그는 깨달았다. 성공하라고 한 이유가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구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으니 발밑 모든 게 아득해 보였다. 그 순간, 리라는 십몇년 만에 그의 부모를 일부분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번에 연주해 주겠다는 곡도 아는 곡이다. 유명하지 이 곡은. 간단하게 선곡한 이유를 이야기해 주는 소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자신이 이야기한 건 작별 인사긴 했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겠지. 지금은 헤어지더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 꽤 로맨틱한 느낌의 선곡 아닌가 생각도 해본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 소예의 선곡에 고갤 끄덕인 랑은, 피아노로부터 흘러나오는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면, 어느새 연주가 끝나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예와 눈을 마주친다.
"좋았어."
짧은 감상이지만 그 이상은 굳이 꺼내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좋다는 말 말고는 딱히 표현할 게 없기도 했거니와... 연주를 끝내고 돌아가는 걸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은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행이군, 나도 즐거웠다."
전문가의 연주는 아니지만, 이렇게 누군가가 연주해주는 걸 아무런 대가 없이 듣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아무 때나 피아노를 치러 나오는 게 아닐 테니, 운이 좋아야 하고... 또, 오늘과 같은 경우가 되려면 심지어 연주자와 아는 사이여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 시선을 피하며 피아노 건반 뚜껑을 닫는 소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곤,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더 꺼냈다. 아까 주긴 했지만.
>>409 >>411 >>414 >>415 >>416 헤헤 재밌게 읽어준거 같아서 기쁘다!!! 조용한 관종은 이런 피드백에 힘을 얻어 그렇지... 캡틴 캐해가 정확함 엄청 생각하고 아꼈음 근데 이제 방식이 진짜 엄청 잘못된거지ㅋㅋㅋㅋㅋ 그래서 리라가 더 복잡하기도 하다 온전히 미워할 수 없어 어쨌든 자기 생각해서 그런 건 맞거든
>>0 "세리쌤." "응? 이번엔 뭘까~? 뭔가 궁금한 거라도?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사람의 기억은 어떻게 생겨나고, 어디에 저장되는 검까?"
오늘도 어김없는 훈련, 작고 큰 패널 안에서만 일어나는 지루한 반복같지만 그녀에게 있어선 그 순간이 가장 방대한 세계에 접속할수 있는 기회의 순간이었다.
"요즘들어 질문을 많이하는거 같네?" "...이상함까?" "아니, 전혀 이상하지 않아. 학생으로서 질문은 당연한 거고, 오히려 너한테선 듣기 드문 말이니까." "그-렇슴까?" "연구자이자 보호자이자 교육자이니만큼, 너의 그런 질문과 고민은 나에게 있어선 보람을 주곤 하니까 말야."
그런 그녀를 보고 뿌듯한 것인지, 여성은 밝게 웃어보였다.
"...아무튼, 꽤 엄청난 질문을 하는구나? 엔그램이라~ 지금도 이 주제를 내놓으면 이리저리 주장이 갈리면서 서로 물어뜯으려 할걸? 물론 결론만 말하자면 뇌에서 생성되고 저장된다는 것이 중론이긴 하지만, 그 뇌조차도 여러 실험을 거쳤을 때 각기 다른 결과를 산출하다보니 정확히 어디에 저장되는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 "무슨 이유로 휘발되고, 무슨 이유로 고착되는지는 알아냈지만 어떤 원리로 잔존하는지는 밝혀내지 못한 검까?" "그렇다고 봐야겠지? 애초에 그걸 완벽하게 해명했다면 기억을 지워버리거나 덧씌워버리는걸 넘어서 알츠하이머까지 정복할수 있겠지.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누구나 모든 것을 기억할수 있게 되었을지도?" "...그건 좀 끔찍하겠네여..." "후후후... 그렇네~ 그렇기에 우리 몸엔 컴퓨터의 구동메모리처럼 리미터가 걸려있고, 뇌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장기적으로 남지 않게 된 정보는 실시간으로 지워버리지." "하지만 지워진 파일은 우선 휴지통에 먼저 남겨지는 것처럼 단편적으로나마 존재하는 검까?" "그런 셈이지~ 뭐, 개중엔 삭제하는 과정에서 파일이 깨져 다시 복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 않잖니?" "즈가 텔레파시 계열 능력자는 아니라서 잘 모르겠슴다." "나도 오래간만에 네 능력 외의 것을 이야기할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생소한 기분이 드네~"
휴대폰의 커버를 담은 뒤 낮게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모습을 여전히 온화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여성이 한마디를 더 거들었을까?
"그치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학자로서의 내가 주장하는 의견이고... 개인적으론 우리의 몸 전부가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해." "...꽤 비과학적이네여? 마치 오래전에 '인간의 기억은 사지와 오장육부에 기록되어 남겨진다.'라는 말을 한 사람처럼여." "얘는, 그럼 넌 그게 틀렸다고 생각하니?"
여전히 호를 그리면서도 샐쭉해진 여성의 눈매,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가느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아녀, 그렇게 믿고 있슴다. 그렇기에 흔적을 남겨두는 거니까여."
애꿎은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내다 한웅큼 쥐어 얼굴에 가져다대었을까, 약하게 느껴지는 쇠의 비릿한 향과 달콤한 꿈, 쌉싸름한 이야기들이 조금씩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0 커리큘럼 도중 문득 떠오른 장소는, 분명히 연구원이 건네준 책자에는 없었다. 그러나 랑은 망설임 없이 골목과 골목을 지나, 조금 휑한 부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연구원에게는 떠오른 장소가 있어 가볼 거라고 말했다, 반쯤은 사실이었다.
"......"
생각해 보면, 평소에 느끼는 불쾌한 감각이 아니다. 단순히 문득 떠오른 것일 뿐, 번쩍이는 듯한. 저릿거리는 듯한 감각이 아니라 문득 떠오른 것일 뿐.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거뭇거뭇했다. 단단하게 굳어 있는 흙바닥 위에 옅게 깔린 모래를 지익, 지익 밀어 밟아가며 나아간 끝에는.
전소된 건물 하나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비도 내리고, 눈도 내렸음에도, 여전히 이 장소는 까맣게,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나마 땅에도 닿았던 불길이 남긴 흔적은, 모래가 밟아 미는 대로 움직이듯 이리저리 흩어져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새카만 장소에서부터 기어나왔을 무언가의 궤적 역시 사라져 있다.
그 주변을 맴돌던 발자국도 전부. 일부러 와서 지웠을 수도 있지만, 어째서 이 건물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는 걸까. 전부 타지도 못하고 내린 눈에 흉물스럽게. 더 이상 불씨는 없지만 매캐한 냄새가 올라오는 듯 해, 마스크를 단단히 올려 쓰고, 날리는 듯한 재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내려 썼다.
불타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 선물받았던 귀마개까지 쓰고 나면. 현실과 유리되어, 붉게 물든 시선으로 또 다시, 예전의 모습을 겹쳐보곤 하는 것이다.
매캐한 냄새가 아닌, 새콤달콤한 향기. 웃음소리와 맨발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멀쩡한 창문과 문.
그것은 그야말로 뇌를 갈아버리는 듯한 소리입니다. 숨조차 절로 멎어버릴 정도로 너무나 고통이 모두의 두통에 닿았을 것입니다. 참을래야 참기 힘들 정도로, 마치 뇌 안을 파고 들어서 칼로 썰어버리는 듯한, 그것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썰어버리는 듯한 고통입니다. 설사 이를 악물고 일어나도 시야의 초점조차 잡기 힘들 것이고, 능력을 쓰려고 해도 연산 자체가 잘 이어지지 않을 정도의 고통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비틀거리긴 해도 움직일 수는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버티기 힘들고, 이기기 힘든 이들은 쓰러져서 숨만 쉬는 것이 고작이었겠지요. 단, 그것은 능력자의 경우만 해당하는 일입니다. 레벨0의 경우에는 그냥 듣기 싫은 소리일 뿐, 딱히 머리가 아프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한편 이 소리가 들리자마자 전원 기절해버린 시위대 학생들의 머리에선 가느다란 실이 살짝 빛나더니 이내 사르륵 그 모습을 감췄습니다. 틀림없이 눈앞의 여성의 손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와는 별개로 류화와 여로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심한 통증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아마도 약 2배 정도가 되겠지요. 왜 그 두 사람만 그렇게 고통이 주어지는 것일까요.
한편 눈앞의 여성, 자신을 그림자라고 표현한 붉은색 단발머리 여성은 피식 웃으면서 저지먼트 멤버들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조롱하듯 이야기했습니다.
"저항하려고 해도 소용없어. 지금 이건 캐퍼시티 다운이라는 거야. 말 그대로 능력자를 제압하기 위한 장치지. 너희들의 뇌에 영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귀를 막는다고 해도 소용없어. ...즉, 이 소리가 이어지는 한, 너희들은 저항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이야기지. 자... 그럼 일단 묻겠는데, 너희들 중에서 혹시나 죽거나 크게 다치면... 에어버스터가 많이 곤란해지는 이가... 그래. 정말로 곤란해지는 이가 있니? 있다면 손을 들어줄래? 그럼 내가 그 애만큼은 특별히 놓아줄테니까. 있다는 것은 아는데... 누군지는 알 수 없어서 말이야."
저건 또 무슨 의미일까요? 아니. 어쩌면 별 의미가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쨌건, 여성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철현을 바라봤습니다.
"너는 레벨0지? 후훗. 속이려고 해도 소용없어. 지금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이 그 증거니까. ...어때? 아까전의 내 연설은 말이야. 솔직히... 너는 별 말도 하지 않았어. 분하지? 억울하지? 왜 나만... 다른 이들은 다 저렇게 능력자인데 왜 나만 이 모양 이꼴일까. 나는 노력을 해도 왜 안될까? 어째서 나만 이래야 하는걸까? 어째서? 어째서? 그래.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절대로 말이지."
이어 여성은 주머니에서 검붉은색 알약을 꺼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본 것과는 전혀 다른 모델입니다.
"그러는 너의 억울함에 나는 어느 정도 공감해. 우리가 샹그릴라를 연구하는 것은 어느 정도 그런 이유도 있으니 말이야. ...자. 이걸 먹어볼래? 이건 아직 베타버전이긴 하지만, 부작용은 없어. 굳이 말하자면... 조금 많이 쓰다 정도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샹그릴라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부작용이 적다시피 해. 또한 블랙 크로우에게 제공되는 것이기도 하지.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대충 듣지 않았어?"
머리를 감싸며 시선은 자동으로 바닥을 향한다. 고통에 강한 사람이라 해도 이런 대놓고 악의적인 고문같은 고통에는 당해낼 겨를이 없다. 주변을 겨우 파악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 같다. 철현에게 유혹이 주어지고, 그것에는 지난번 약에 거부감을 나타냈던 저지먼트 부원들이니 스스로 끊어낼 수 있으리라고 믿어지지만 철현을 애초에 잘 모르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손 들지 마아!!!!!!"
그 와중에도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에 있을 소리지르는 아지다. 저자의 말을 믿을 수 없을 뿐더러 에어버스터에 대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정적으로 말하던 자라 오히려 인질로 잡거나 할 가능성이 있다.
모종의 사정으로 행동까지 생략된 것도 서러운데 등장하자마자 캐피탈리즘 다운인지 뭔지에 당해 앞으로 엎어져서 머리를 부여잡는다.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소리가 귀를 뚫고 들어와 머릿속을 날카롭게 쑤셔대는 고통에 평소 그답지 않게 비명조차 나오지 않아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현재 수강의 레벨은 2. 3에 비해서는 모자란 수준인데도 받을 고통은 다 받고 있었다.
그 때문에 빨강녀의 말은 그의 귀에 하나도 들어오는게 없었다. 주변에서 상대적으로 멀쩡해 보이는 학생도 보였으나..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그정도로 머리가 아파왔기에. //스킵에 가까운 반응..
괴음파가 성운의 뇌리에 정통으로 찍어넣은 고통은 그 순간 성운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든 것들 중, 다른 모든 것들을 불러낸 기폭제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다른 모든 것들은 그것들이 무엇인지 단 한 순간도 제대로 볼 틈도 없이 사라지고, 성운의 머리에는 일순간 성운이 뭐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머릿속에 스쳐가도록 만들었던 그 고통만 남았다.
그 고통만으로도 성운을 꼼짝달싹못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지만, 성운은 혀를 꽉 깨물었다. 새로운 고통이 입안에서 생기면서, 얼추 고통의 균형이 맞춰진다.
3년간 이 작은 키와 개화하지 못한 능력으로 당해온 커리큘럼이나 커리큘럼 외의 고통에 비하면, 견딜 만하다.
성운은 뒤를 돌아 세은의 상태를 가능한 한 최대한 살폈다. 그리고 세은의 어깨를 잡으며 조금씩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녀석의 캐퍼시티 다운에 한 쪽 무릎을 꿇어버리는 한양. 뇌를 갈아버리는 듯한 소음과 고통으로 인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초점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는 인지가 되지만 흔들려서 보일 뿐이었다. 한양은 삼단봉을 피며 지지대 삼아서 겨우 일어났다.
"후..하..후..하..."
능력을 쓰려고 해도 연산이 안 된다.
'한양아. 순류에 역류를 일으킬 때 바로 반응하는 건 어리석다. 상대가 역류를 일으킬 때 너의 순류를 유지하는 것이 상대의 처지에서 보면 역류가 된단다.'
'갑자기 왜 그 사람이 한 말이 떠오르는 거냐고..'
한양은 갑자기 생각난 스승의 조언을 떠올리며 캐퍼시티 다운에 크게 저항하여 힘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이 소음과 흔들리는 초점을 바로 잡으려고 하지 않고, 잔잔하게 '적응'을 해나가려고 한다. 지금의 상태를 부정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후..철현..적이 건네는 선의는 뭐라고? 믿지 말아야 된다고."
녀석이 철현에게 주황색의 물체를 건네는 형상이 겨우 보이기 시작한다. 한양은 몸을 겨우 유지하며, 초점이 제대로 맞지는 않아서 제대로 가리키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삼단봉으로 녀석을 지목하며 말한다.
🤔🤔 원작대로라면 청각 차단으로 해소가 되긴 할 것 같지만... 이미 들어버린 상황에선 잘 모르겠긴 해 아니지... 잘 생각해 보니까 원작에서 이게 작동됐을 때 애초에 소리가 차단된 상태면 영향은 없었거든? 근데 이미 들어버린 상황에선 귀를 막는다는 행동으로 해결된다는 묘사가 없단 말야.
일단 귀마개를 미리 하고 있었다면 상관 없었겠지만, 지금 당장 머리가 뒤흔들어진 상황에선 추가적인 피해를 막을 뿐이지 회복할 때까지 시간은 좀 걸릴 것 같네.
청윤의 머리 속 기억들이 돌아가더니 짜맞춰졌다. 재이와 대화하던 연구원, 그리고 할머니로 얼굴을 바꾸고 도움을 요청하던 여자. 그리고, 그림자.
"그때 그 여자도 바로 그림.."
하지만, 뭔갈 해보기도 전에 강력한 노이즈가 덮쳤다. 머리 속까지 긁어놓는 소음에 청윤은 고통스러워하다 앞으로 넘어질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왜이렇게된거야난분명옳음을추구하고싶었어그래최대다수의최대행복말야경찰이되고싶었지만그망할기억들때문에난결코되지못할거야 원래였다면 어떻게든 의지로 일어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로되지못할걸만약되면넌똑같은녀석이되는거야하지만아버지도경찰이셨잖아도대체어떻게하려고절대로도넛은보고싶지도듣고싶지도않아왜시위현장에나가겠다고해서 청윤이는 이미 정신적으로 지친 상태였다. 넌절대좋은녀석이아냐샹그릴라에그렇게피해입은사람들을보곤속으로동조하려고했잖아?벤담과밀이널보면어떻게생각하실까?오빠와가족들이널보면?
청윤은 고작 정신을 잃지 않으며 버티는 게 전부인 자신의 무력감에 눈물을 흘리며 그져 엎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프다! 희야라면 인첨공에서 고통이란 필수적인 것이라며 무시하고도 남을 사람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당장이라도 머리를 분리해서 고통 하나 없을 안드로이드에 이식하고 싶다. 희야는 자리에 우뚝 서서 머리에 손을 짚었다. 여기저기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나 금방이라도 울 듯이 떨리는 숨소리, 심하면 비명이 들렸지만 희야는 우두커니 서서 머리만 짚고 있었다. 대신 조잘거리던 입도 다물고, 더 움직이지도 않았다. 눈은 얌전히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을 하려고 하면 머리가 더 아팠기 때문에 멍을 때리는 것이 고작이다.
그렇개 한참 누가 떠들어도 들리지 않는 먹먹한 귀와 흐린 시야에서 멍만 때리고 있자니 코에서 피가 후두둑 쏟아졌다. 음, 이대로라면 쓰러질 것이 뻔하다. 아니면 기능하지 못하고 망가질까? 향후 일어날 이상에 대한 과정에 대해서는 흥미가 생기지만 이 현상으로 비롯해서 생긴 고통의 과정에 대해서는 달리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묘한 일이다. 고통은 됐고, 망가지면 안 되는데, 거슬리네. 희야는 어느새 고개를 들어 여성이 있던 곳을 가늠하듯 흐릿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들었기 때문에 중력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피는 코와 턱을 적시고, 목을 타고 흘러 백의를 붉게 적시기 시작했다.
그냥 그렇게 있었다. 움직이는 것이 버거워도 머리에서 손을 떼고는 그저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흥미는 진작 식었고, 어디까지 하는지 보고 싶기 때문이다. 본디 그런 말이 있지 아니한가, 자멸의 깊이는 스스로 정하는 것이라고.
지독한 고통이다. 초점이 흔들리고 세상과 유리되는 불쾌한 감각에 리라는 한순간 중심을 잃는다. 빗자루가 없었다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을 것이다. 겨우겨우 빗자루를 지지대 삼아 넘어지는 건 면했지만 한발짝 걷기도 쉽지 않다. 이대로라면 방패도 무엇도 무쓸모하다.
저런 걸 누가 만든 거야. 저런 게 왜 저런 놈들 손에 있지. 무자비한 고통에 눈물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가뜩이나 흐린 시야인데 눈물 때문에 거의 보이는 게 없다.
귀... 귀를 막으면. 손을 휘적거려 귀를 막아보지만 역부족이다. 리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살이 찢겨 피가 턱을 타고 흐른다. 이열치열이라던가, 조금은 정신이 맑아진 것 같기도 하고. 덕분에 패닉은 면했다. 여기서 저번 같은 일을 두 번 반복할 순 없다. 리라는 주위를 둘러본다. 철현을 제외하면 모두가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철현은.
정말 이게 마지막이었어? 부작용도 없다고 하잖아. 먹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가면 녀석들이 강한 이유가 그거였잖아? 나 진짜 바보 멍청이 등신인가? 이 빌어먹을 코뿔소 인장 때문에 하나 뿐인 기회를 놓친 건 아닐까?
그리고 레벨 0이기에 무시당했던 서러움이 떠오른다. 항상 통장은 텅장이었고 레벨 4 여동생에게 빌붙어산다. 공부를 누구보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레벨이 높은 다른 이들에게 추월당한다. 공부 밖에 답이 없는 무능력자. 차라리 이 곳에 오지 않는 게 나았을 뻔한 무능력자. 동생에게 짐만 되는 무능력자.
레벨 5인 은우와 비교하면 참담하다. 노골적으로 환경이 다르고 지원이 다르다. 약을 먹어 레벨 2라도 되었다면 받는 지원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더 이상 동생에게 빌붙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더 이상 공부에 목숨걸지 않아도 되었었다.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을 굴욕감과 절망감이 되살아났다.
"나는! 내 힘으로 강해질꺼야!"
고함을 치며 선언한다.
"먹고 싶은 놈들은 먹어!"
자신의 죄를 자백한다.
"레벨 0의 억울함을 잘 아니, 난 너희가 먹는 것을 눈감아줬어"
결의를 다진다.
"하지만 난 안 먹어! 후회할지도 몰라! 아니 지금도 후회해! 하지만 그걸 먹으면 더욱 후회할꺼야! 그래서 안먹어!!"
자신이 유리로 이루어져 있다면 금방 깨져버릴 것만 같을까. 그 무시무시한 고통에 류화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부여잡는다. 고통에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워지고, 귀를 막아도 머릿속에서부터 밀려오는 통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에 류화는 비틀거리다 자리에서 무너진다. 아랫입술을 씹으니 피가 흐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으니 류화는 덜덜 떨며, 비명을 내지르는 것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 짧은 고민조차도 하지 못하고 나의 몸은 무너져 버렸다. 굉장한 고통이, 머릿 속을 덮쳐온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나는 고통과 동시에 굉장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쓰러지기 전 녀석이 했던 그 말... 나는... 설마 '레벨 0' 이 아니었던 건가?! 그러나 지금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선 그저...
"...누가..."
그래, 여기선 손을 번쩍 드는 것 뿐이다.
"누가, 그딴거...! 알려.... 줄까보냣.....!!!"
있는 힘껏 손을 들어, 떨궈진 우산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는 것 뿐이다. 거진 뇌를 도려내는 것 같은 고통을 견디며, 최대한 이 빌어먹을 상황에서 저항하며 일어나는 것밖에는 없다!! 당연히 괜찮을 리가 없다. 그저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 조차도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올 지경이다. 이런 건 전에 겪어본 적도 없었고, 솔직하게 죽을맛이다. 고작 '음파'가 우리들에게 맛보여주는 고통이란 그정도의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일어선다. 그리고 걷는다- 얼마나 다리가 떨려오든지, 저녀석에게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걸리든지, 그런 것은 상관 없다. 정말 조금씩이라도 거리를 좁힐 수 있다면 그걸로 좋다. 그렇게 코 앞까지 다가간다. 그러고나면 그저, 저기에 서있는 이 악몽의 주역을,
짧게 앓는 소리가 어쩔수 없이 흘러나온다. 초점조차 흐린 눈 억지로 굴려 주위를 살피려 드니, 거의 대다수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몇은 저보다 더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상황에 더는 사고가 구르질 않아 그 짧은 판독도 곧 끝이 나, 경진은 울리는 두개골 뒤늦게 수습해보려 양 귀를 막으려 들었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핑핑 울리는 머리는 아무것도 허락해주지 않았다. 아프다, 시야가 흐리다. 언제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만도 같다. 언제? 왜? 고통이 상기되니 그것을 따라 연결된 것들 또한 수면 위로 떠오른다.
흔들릴것 같아, 눈물이 날 것만 같아 경진은 그걸 억지로 다시 잡아 밑구석으로 처박으려는 듯, 애써 철현의 행동만 눈으로 좇고 있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긴 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시위, 터무니없는 주장,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에어버스터의 이름. 이상하다고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 감은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것이었다.
후회는 늘 상황이 악화된 후에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으극!"
괴소음과 함께 시작된 고통은 내 몸을 주저앉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하필 뇌로부터 시작되어 무시할 수도 없는 고통에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단지 느낄 수 있는 건 아프고 아파서 몸이 무너지려고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도 저 붉은 머리 학생, 아니, 위장한 그림자의 목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누구를, 어떻게, 한다고...?
딱딱 소리가 날 정도로 떨리던 턱이 콱 다물렸다. 그 탓에 입술이 터졌지만 상관없었다. 힙색을 더듬어 꺼낸 메스를 한 번 떨어뜨렸지만 어찌저찌 바닥을 더듬어 다시 쥐는게 가능했다.
이제 이걸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막을 찌를까? 아니다. 이 소리는 귀로 들리는게 아니니 고막은 찔러봐야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
메스를 가능한 짧게 쥐고 허벅지 위로 내리쳤다. 깊이 들어갈 것 없었다. 근육이 반사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면 되었다. 간신히 움직인 팔이 파르르 떨리고 동시에 다리가 파득였다. 그 여파를 놓치지 않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마도 충혈되었을 눈으로 그림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개소리는 무덤 속에서나 해...!"
입술을 다시 한 번 깨물었다. 얕게 뜯기며 비릿한 맛이 혀끝에 퍼졌다. 일단은 서 있는 것이 고작이기에 그림자의 움직임을 계속 응시하고만 있었다.
머릿속을 직접 헤집는다면 이런 감각일까, 뇌에 전극을 꽂았을 때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통증에 랑은 몸을 앞으로 숙였다. 머리를 부여잡지만 바깥에서 압박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종류의 통증이 아니다, 시야가 쉴 새 없이 흔들리고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느낌에 이를 악무니, 까드득 하는 소리가 꽤 크게 들린다. 초점이 마구 흔들리는 눈은 자신이 지금 서 있는지, 넘어졌는지도 분간하기 어렵다.
두 발이 땅을 딛은 느낌은 있으니 아마 서 있을 것이다. 정확한 방향을 가늠할 수는 없지만 분명 자신은 시위대와 저지먼트 사이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 기억에 의존해 몸을 바로 세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손에 쥔 건 진압방패, 리라가 그려준 진압방패의 손잡이가 부숴져라 입을 준 랑은,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옮겼다. 적어도 조금씩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녀석들은 배제하고, 움직임이 없거나 쓰러진 녀석들을 뒤에 두려는 것이다.
시선이 마구 흔들려서 움직임이 없는지는 구별할 수 없지만. 랑은 방패를 세워 들고 사탕을 꺼내 입에 물었다. 두어 개가 입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닥을 구르지만 상관없다, 빠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사탕이 으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세은은 그 말을 들으며 숨을 거칠게 내뱉었습니다. 그리고 뭘 생각했는진 모르겠지만 천천히 손을 부들거리면서 들어올리려고 했습니다. 아지와 동월의 말을 애써 무시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은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겠다는 듯이. 그것을 본 다른 이들의 생각은 어땠을까요? 허나 성운이 세은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뒤로 물러섰습니다. 덕분에 세은은 팔을 들 수 없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저지먼트 멤버들은 어떻게 움직일수조차 없었습니다. 물론 오토바이 키로 고막을 찢으려고 하는 것 같은 정하를 이경과 다은이 막아섰기에 유혈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혜우나 한양, 그리고 방패를 잡고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하는 랑처럼 움직이려고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애린의 말에 여성은 피식 웃었습니다.
"...글쎄.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니? 아무리 병기인 퍼스트클래스라도 말이야."
"때려눕힌다니. 지금의 네가 뭐가 가능하지? 기세만 살았을 뿐, 아무 것도 못하는 주제에."
이어 세나의 말도 조롱하면서 그녀는 전체적으로 둘러봤습니다. 적어도 아직 아무도 기절을 하지 않은 것에 쳇 소리를 내면서 여성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한편 철현이 알약을 받아들이자 여성은 씨익 웃었습니다. 하지만 먹지 않고 부숴버리며 그것도 모자라서 주먹을 휘두르는 그 모습에 여성은 생각도 못했다는 듯이 순간 몸을 움찔했습니다. 여차하면 소리가 나는 핸드폰을 떨어뜨릴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목소리, 철현의 외침에 여성은 키득키득 웃더니 철현을 보고 씨익 웃었습니다.
"왜 그렇게 허세를 부리지? 후회한다면서? 후회한다면 먹으면 되잖아. 대체 왜 후회한다는거지? 누가 너를 심판할까봐 그래? 저지먼트 애들이 너를 심판할까봐 그래? 누가 너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어? 누가 너에게 뭐라고 할 수 있어? 솔직해져. 레벨 0. 너는... 억울하잖아. 아무것도 후회할 것 없어. ...자. 솔직해지자. 먹으면 좋잖아. 안 그래?"
휘저어져 포슬한 곱슬은 처연하게 그 흰 뺨을 어루만지듯 내려왔다. 분홍빛 두 눈 밑 피부도 말갛게 그을려 터진 눈물샘 표면장력으로 겨우 막아서니, 붉은 머리 여자를 올려다보는 모양새는 단언컨데 처절하다. 오똑한 코 끝 또한 올라오는 울렁거림에 핏기 올라오듯 물들어져 있어, 더더욱.
"미남 울리면 지옥가요..."
읽기만 해도 얏같아 tq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또 다시 시작되는 유혹에 철현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어디 그 뿐일까. 오히려 당당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여성은 살짝 움찔했습니다. 뭐지. 저 레벨 0는?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는 철현을 바라봤습니다. 이어 그는 핸드폰을 뺏기 위해서 달려들었습니다. 바로 시위대 하나가 움직이려고 했지만, 그보다 철현의 움직임이 더 빨랐습니다.
이내 핸드폰을 뺏는데 성공한 철현은 핸드폰을 짓밟아서 부숴버렸습니다. 자연히 뇌를 찢어버리는 소음이 사라졌습니다. 모두에게서 통증이 사라졌고 겨우 다른 이들도 움직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핫... 결국, 구원의 손길도 알아보지 못하는 바보로구나. 이 인첨공을 지배하는 과학이 도와주겠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거절하다니. 바보는 바보이기에 바보라는 거야. 딱 그 말이 맞아."
피식 웃어보인 후에 여성은 다른 이들을 스윽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조롱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너희들도 전부 마찬가지야. 결국 너희들은 계속 샹그릴라를 방해하려고 들겠지. 그래. 약간의 희생은 따르겠지. 인정해. 하지만 약이라는 것이 원래 다 그런거야. 결국 수많은 희생 속에서 과학은 발전하고 기술이 발전하지. 그것조차도 이해를 못하면서, 아니. 그런 희생 속에서 편의를 누리면 이런 문제에서는 입을 다물어야지. 안 그래?"
이어 그녀의 눈빛이 매우 날카롭게 반짝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경고를 하듯이 선고했습니다.
"...너희들이 이 일에서 손을 완전히 떼준다면, 우리는 너희들을 더 이상 건드리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어때? 나쁘지 않잖아. 애초에 너희들끼리 뭘 할 수 있는 것은 없잖아. 에어버스터가 없는 너희들이 뭐가 가능하지? 애초에 뭘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지? 불법이라서? 그게 너희들의 목숨을 걸 이유가 되나?"
한걸음 뒤로 살짝 물러났고 그 앞에 시위대 학생 3명이 저벅저벅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 3명은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일제히 같은 목소리를 냈습니다.
"이건 경고다. 더 이상 우리 일에 끼이지 마라.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발전을 방해하지 마라. 샹그릴라가 퍼지는 것을 막지 마라. 이 3학구의 구원의 손길을 무시하지 마라. ... 이 이상 관여하고 방해한다면... 너희들은 진짜로 우리를 적으로 돌리는거야. 평범한 학생인 너희들의 '암부'와 대항해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에어버스터도 없는 너희들 따위가 말이야."
그건 명백한 조롱. 완벽하게 무시하는 발언이었습니다.
"조금만 눈을 돌리고, 못 본 척하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중요분기점! 짜잔!! 인 것이에요. 아직 전투는 아니니까...그냥 여러분들의 캐릭터의 생각을 이야기하면 되는 것이에요. 9시 20분까지!
다은은 웅크렸던 몸을 피며, 빙긋이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단련된 웅변기술이 청아한 음색과 선명한 발음으로 그 자리의 모두에게 선명히 때려박힌다.
"과학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인간이 과학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랍니다, 이 알과 닭 중에 어느 쪽이 먼저인지도 분간 못하는 빡■ ■아. 과학이 먼저인지 인간이 먼저인지 천지 분간도 못하는 주제에 자기가 어떤 구세주인 줄 아는 나이만 먹은 아줌마한테 꿇어주기엔, 너 같은 무책임한 어른들에게 꿇어주기엔, 우리 학생들의 삶이 너무 귀하고 소중하네요."
그리고 가방에 들어가있던 다은의 손에서, 여고생의 손에 들려서 나오기엔 너무도 흉악하고, 너무도 강고하고, 너무도 이질적인 무언가가 그 고개를 내밀어 여자에게로 겨누어지는 것이다.
"그 세 아이에게서 손 떼주시겠어요? 방금 들려주신 그것만큼은 아닐 텐데 꽤 아플 거라는 건 보장드릴 수 있거든요."
>>816 소음이 멎는다. 고통에서 해방된다. 몸도,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낀다. 철현에게는 고맙다고, 나중에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그러나 지금은 눈앞의 일이다.
"...아니, 이젠 됐어. 변명은 듣기 싫어. 역시 바보는 너다."
계속 쫑알쫑알. 그저 허울뿐인 두서 없는 이야기. 대꾸조차 해주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어느 정도 앞까지 걸어간 나는 거기서 걸음을 멈췄다.
"야... 잘 생각해 보라고, 그 수지타산 좋은 똘똘한 머리로 말야."
정말로 샹그릴라는 네 말대로 좋은 약일지도 몰라. 지금은 그저 과도기에 진입했던 걸지도 모르지. 나쁜 것은 우리이고, 어쩌면 지금 괜한 짓을 하고 있을 것인지도 몰라. 지금 꼬리 말고 내빼지 않는다면... 은우와 세은에게 큰일이 나는 걸지도. 하지만,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이 인원이, 이제와서 못 본 척 놓아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실컷 당해놓고 이대로 물러나는 것은, 역시...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날카롭게 뜬 도끼눈으로 눈 앞의 악당을 바라보며, 내던지듯 외친다.
담담한 어조로 그렇게 말한 소년은 활과 화살을 들어 올렸다. 소리가 사라지고 두통이 말끔해진다. 최은우가 그저 강하다는 이유로 저런 자들과 엮여있다면, 좋은 패를 잃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이기적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뭐, 자유지.
"희생을 말하고 싶다면."
한숨이 나왔고, 하얀 소년은 참지 않았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지속된 두통, 달갑지 않은 상황. 기분 나쁜 주장. 그는 당장에 가면을 다시 뒤집어 쓸 여력이 없었다. 안 그래도 평소에 그 쪽으로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으니.
"너 역시 그러고 나서 말을 해."
하여 소년은 지나칠 정도로 무덤덤한 낯과 목소리로 말햇다.
"네가, 누군가를 구원하고 싶어할 위인이 아닐 거 같아." "좀 더 많은 품질 좋은 병기. 아마.. 너희가 바라는 건 겨우 그 정도일 거 같은데. 꿈을 꾼다면, 레벨6 까지 갈까." "미복용시 계수 증가는 고의이려나. 목줄은 필요한 법이라고 생각할 테니." "..솔직히."
하아...
"....그걸 그대로 둔다고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아서 그래."
이 도시에서 이런 일을 벌일 사람들 중에 진실로 '구원'을 바라는 이가 있을까 기껏해야 연구 성과와, 힘을 바라는 것이겠지.
갑작스레 찾아왔던 고통은 똑같이 갑작스럽게 사라진다. 몸을 웅크린 채 바닥에 몸을 부딪히기라도 했는지 혜성은 몸뚱이가 벌벌 떨리며 극심한 근육통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손톱 밑에 피가 고인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다가 힘 풀린 무릎이 몇번이나 꺾이며 주저앉혔다.
고통의 후유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서, 혜성은 신물이 올라와서 역함이 느껴지는 속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면서 겨우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여성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바닥에 굴러다니다가 제 몸부림치는 충격에 깔렸는지 박살나버린 안경을 주워드는 제 손을 바라보면서 혜성은 여성의 말은 들으려고 노력했다.
"동의도 구하지 않은 희생을 왜 그들이 치뤄야하죠? 말을 바꿀까요? 과학의 발전을 위한다면 당신은 어째서 이렇게 폭력적인 방식을 취하는 건가요?"
박살난 안경 파편이 손바닥에 파고들고, 여전히 무릎을 꿇은 자세였지만 여성을 똑바로 바라보는 흐르지 못한 눈물이 맺힌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떨리는 혜성의 몸뚱이와는 다르게 선명했다.
>>816 성운은 딱히 뭐라고 말을 하지 않는다. 이미 자신이 할 만한 말을 다른 이들이 다 하기도 했고, 철현 선배의 이야기도 듣고 보니 꽤 수상하고. 이야기는 잘 귀담아듣고 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피하고 싶고, 이대로 눈에 잘 띄지 않는 채로 세은이 옆에 붙어있는 게 좋을 것 같다. 아까 나랑 선배의 살기 이야기도 상당히 거슬리고, 굳이 에어버스터가 상당히 아쉬워할 만한 사람을 저 여자가 콕 짚어 찾는 것도 신경쓰인다. 그냥 보내줄 리가 없다. 어쩌면 세은이에게 무언가 나쁜 짓을 하기 위한 특별한 수단이나 계획이 있을지도 모른다.
세은이보다 자신이 한참 약하니, 누가 한쪽을 보호한다면 자신이 보호받는 입장이 되어 마땅하다는 건 잘 안다. 능력계수도 한참 약하고, 키도 한참 작다.
철현의 도움, 혹은 스스로의 주장에 대한 관철, 혹은 강한 의지 덕에 음파를 발산하던 휴대폰은 부숴졌다. 그덕에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붉은머리의 여성은 여전히 이쪽을 조롱하듯, 그리고 경고하듯 말했다.
"Listen listen honey I can lift nail.(듣자듣자하니 못들어주겠네.)"
그녀답지 않은 영어구사였다.
"과학의 발전? 기술의 발전? 웃기고 있네. 그래, 물론 실험은 잔혹하고 해쳐지는 것들도 많지. 우리가 조금만이라도 눈을 돌리면 랩실의 작은 케이지에서 자기 몸 하나 겨우 비비고 있는 쥐들과 토끼들이 있어. 그리고 당신 말마따나 더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는단건 그 모르모트들의 현실을 눈감으라는 거지. 설령 그들의 고충을 안대도 아무것도 할수 없는건 매한가지니까,"
약간 지끈거리는 편두통에 관자놀이를 매만지던 그녀는 잠깐 낮은 심호흡을 한 뒤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근데, 적어도 그건 랩실에서 일어나는 일이거든? 이렇게 일파만파 퍼지는게 아니란 말야. 부작용을 안고도 그 약을 삼켰을 수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처지를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놓아버리는 학생들이,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무력함을 견디지 못하는 친구들이 사방에서 소리지르고 있어. 그걸 실험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미쳐버린 과학자나 마찬가지지.
제대로 된 검증 하나도 없이 '기적의 약'이라면서 수없이 팔아재끼다가 뒤늦게 발견된 유전자 결함 부작용으로 수많은 기형아들을 양산했던 약처럼 말야.
그런 과오를 '어쩔수 없는 거다.'라고 눈을 돌리며 되풀이하려는 거라면, 당신은 과학자로서의 가치도 없는 인간이야."
철현이 핸드폰을 부수자, 괴롭던 소음과 맞지 않던 초점이 다시 돌아왔다. 한양은 다시 똑바로 설 수 있었으며, 블랙크로우의 논리에 반박하기 시작했다.
"그래, 지금까지의 과학발전에는 많은 희생이 있었다. 우리 역시 후대에 이르러서 편의를 누리고 있고. 그렇지만 말이야. 지금까지 발전된 과학을 이용해, 더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그 희생 없이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지금은?"
"그냥 너네가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 연구가 가능한 능력이 한계라고 인정해, X신 년들아. 그 희생 없이도 발전이 가능한 게 지금의 과학이고, 우리 역시 희생의 편의를 누렸기에 그 사슬을 끊어내려고 하는 거야. 과학의 진보에 기여하는 척하지마. 너네는 그저 진보적인 척을 하는 , 지금은 잘못되어진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수구집단일 뿐이야."
연산이 가능해진 한양의 주위에는 점점 검은 오오라가 진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 손 떼라고? 헹, X이나 까잡수셔. 우리들은 몰라도, 나는 너네들을 계속 건드릴 거야. 너네들도 나 건드려~ 대신에 맥없이 죽지는 않아. 너네 몇 명의 목이라도 가져가기 전에는 절대 안 죽을 거거든."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러냐는 여성의 말에 한양은 대답했다.
"목화고의 저지먼트이기 때문이다, 이 X년아. 에어버스터도, 인첨공의 저지먼트가 아니야. 너네가 과학의 진보를 핑계로 뒤에서 우리학교 학생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그렇다고. 너네들이 안 건드린다고 해서 그걸 내가 믿겠냐?"
검은 오오라는 더 짙어져갔다. 이와 더불어 차갑게 식은 한양의 표정은 덤.
학생들을 이용해서 더 이상 관여하지 말라는 그녀의 경고에 한양은 입을 열었다.
"경고? 누가 누구한테? 어. 저지먼트 부부장 서한양. 난 오늘부로 너네들의 적이야. 에어버스터? 여기서 은우 없이도 너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라고 봐."
귀를 찢어대는 소음 사이에 콰직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고통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사라졌다. 수강도 다른 저지먼트 부원들처럼 몸을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나 철현과 빨강녀를 바라본다. 옆에는 부서진 휴대폰. 이게 저지먼트를 꼼짝 못하게 했을 거라는건 수강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거래가 시도된거 같지만 결렬된 것도.
"우으으.. 진짜 아파 죽는줄 알았습니다! 마치 10년전 보육원 시절에 서열정리 핑계로 30분간 다구리로 얻어맞는것 보다 더 아팠습니다!"
여자의 연설 비슷한 말에는 겨우 정신을 차린 그의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이 샹들리에에 더이상 개입하지 말라는 말 한마디만은 알아들을 뿐이었다. 짧은 고민과 동시에 수강은 씨익 웃으며 그 말에 대답한다.
"기술이나 과학의 발전, 구원 이런거는 제 머리로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죠.. 샹들리에인지 뭔지 하는 그거 여태 우리 방식으로 해왔고 할 수 있었잖아요?"
그리고 그건 부장님이 없을 때도 잘만 했었구요.
"할 수 있냐 없냐보단.. 그 뭐더라? 그렇지! 하고 싶다! 그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살아남을지 그런 얘기가 아니라! 이미 보고 말았으니까! 그냥! 하는 겁니다! 하히히히히!!"
누구처럼 완벽한 짜임새의 논파력으로 찌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확고한 신념으로 받아치는 것도 아니고 아직 세상을 덜 배운 학생답게, 그냥 하면 안되니까. 그래서는 안되니까를. 수강은 어설프게 말하다가 수습이 되지 않아 쑥쓰럽게 웃을 뿐이다. //아니 못들어주겠네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눈 앞이 새까매졌다. 그런 다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멀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 다른 사람들과 멀지 않은 자리에 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면 점차 시야가 트여서 앞을 볼 수 있게 된다. 두통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 온 신경을 헤집으며 돌아다닌다. 몸을 가누기 힘들다. 입안 살점이 뜯겨 너덜해진 게 느껴졌다. 아파. 눈물이 다시 흘렀다. 그럼에도 청각은 생생해서 저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가감없이 들린다. 다른 의미로 귀를 막고 싶어졌다. 입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는데 저 말을 듣고 있자니 뭐라도 지껄이고 싶어진다.
"!"
리라는 흔들리는 다리로 버티다가 달려오는 청윤에게 몸을 기댔다. 사람의 체온이 전해지자 조금은 안정이 되는 것 같다.
"......고마워, 청윤아. 괜찮아. 나."
극심한 고통 때문에 마구 흔들리던 호흡이 정상 궤도를 찾아간다. 가물거리던 눈이 똑바로 떠진다.
"구원... 같은... 소리 하네. 약쟁이들 논리는 어딜 가도 비슷비슷 한가봐. 듣기 싫어. 사람들 사는 도시를 실험장 취급 해 놓고 헛소리가 길다."
입속이 비리다. 리라는 소매로 입술을 문질렀다. 시뻘겋다.
"무엇보다, 방금 전에 우리 머리를 지져 놓고 그따위로 나오면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 줄 줄 알았어? 오만도 정도가 있지."
간신히 버티고 선 보람은 있었을까. 그냥 서 있기만 했으니 솔직히 아무런 보탬도 도움도 되지 못 했을 것이었다.
뭐가 레벨 3이냐. 뭐가 능력 상승이야. 쓸모 없음은 여전한 것을.
철현의 활약으로 소리가 사라지자 겨우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능력까지 풀렸는지는 모르겠다. 드디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니 허벅지에서 메스를 뽑고 앞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나갈 뿐이었다. 가능하다면 그림자의 앞까지 가고 싶었지만 조종당하는 학생들에 의해 막혔다.
그래도 충분했다. 목소리를 높여 끓어오르는 말을 토해내기에는.
"개소리는 무덤에 들어가서나 하라니까 망할 혓바닥을 놀리지 못 해 안달난 X이네. 허. 뭐? 과학과 기술의 발전? 3학구의 구원? 진짜 그런 개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어차피 목표는 하나잖아. 그 X 같은 약 완성시키는데 3학구를 이용할 뿐이잖아. 이 거지 같은 인첨공 바닥에서 그런 고상하고 고결한 목표 따위 있을 거라고 믿을 거 같아? 그리고 뭐? 건드리지 않아?"
눈에 핏발이 서는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말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누가 먼저 건드렸는데! 누가 먼저 X 같은 약 퍼뜨려 주변 시끄럽게 만들었는데! 먼저 뒷통수를 후려갈겨놓고 뭐? 이제와서 손을 떼면 건드리지 않겠다고? 개소리 헛소리 갈아버릴 소리는 저 땅 속에 박혀서나 해! 평범한 학생이니 퍼스트 클래스니 에어버스터니 정의감이니 불법이니 그딴거 다 X까 TQ! 뒤진 듯이 살던 사람 먼저 자극한 건 니들이야. 먼저 싸움 건 주제에 어딜 고개 빳빳이 들고 당당하게 서 있고 X랄이야!!!"
메스를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당장 눈 앞에 학생이고 뭐고 다 치워버리고 싶었다.
"내가 언제까지고 니들 하는 말만 들어주는 X신 허수아비로 보이냐 개X아!!!!!!!!!!!!!!!!!!!!!!!!!!!!!!!!!!!!!!!!"
몇 년 만이었다. 목청이 터져라 소리지른 건. 귀가 찡 울리고 온 몸이 부들거렸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숨을 씨익거리며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먼저 건드린 주제에 선심 쓰듯 봐주겠다고? 내 완장을 내다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것 만은 절대 봐주지 않아.
>>816 철현의 행동 덕에 몸이 멀쩡하게 움직인다. 랑은 씻은 듯 사라진 통증에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바로 세웠다. 방금까지 끔찍했던 소음이 바로 사라지는 감각은 역시 이상하다. 멀쩡하지 않을 것 같지만 바로 멀쩡해진 게 적응이 잘 안 되긴 했으나... 어쨌든 지금은 멀쩡했기 때문에, 랑은 방패를 쥔 손에서 힘을 좀 뺀 뒤 여성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게 약속하겠다는 쪽의 태도인가?"
다짜고짜 고통을 주는 게 너희 방식이다 그거냐. 머리를 싸쥐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던 저지먼트 부원들과, 쓰러졌던 시위대를 보는 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욕구가 심장이 뛰는 것처럼 꿈틀댄다.
"에어버스터가 너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는 자신이 있는 모양인데..."
구체적인 상황 같은 건 모른다, 어째서 완전 소탕을 지시하지 않는지, 그저 현상 유지를 하려 하는 건지. 그렇지만 말이다. 랑은 전부 녹아 없어진 사탕이 남긴 막대를 뱉어냈다.
"...그런 것 치곤 조금 조급해 보이는군, 지금이 아니라면 안 된다는 판단에 시위를 하러 나왔고." "게다가 우리가 목숨까지 거는 걸 바라지 않는 것 같고 말이다."
어째서냐?
"멍청하긴, 지금 뭘 건드렸는지 봐둬야 할 거다, " "...신경쓸 가치도 없었다면 이런 일 따윈 안 했겠지, 고맙다, 덕분에 너희에게 우리가 상당히 귀찮은 존재라는 걸 알았으니까."
에어버스터가 없는 저지먼트라고 해도, 두려운 거로군. 이미 턱에 걸린 마스크로 인해 드러난 입은 이를 드러내고 있다, 날카로운 이빨을.
공간이 이지러지듯 시야가 제한되던 머리는 서서히 맑아지고, 먹먹하던 귀도 제기능을 되찾는다. 희야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순간이 되기가 무섭게 손을 들어 제 코를 매만졌다. 축축하게 손을 적시는 피를 뒤로 아직 잔류한 두통을 무시했다.
"앞 못 보는 소경에게 어찌 앞을 볼 수 없으냐 물을 수 없는데 말을 어떻게 더 한다고."
빈정거리듯 툭 내뱉은 희야의 눈빛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어차피 욕을 해봤자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라는 것은 안다. 더군다나 본디 약이란 것은 약간의 희생이 있다며 일장연설을 하니, 저 이야기를 반박해서 무엇 하겠는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근본부터 다른 것들을 상대해 다른 명분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답하고 싶었다. 뭘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질문. 경고고 자시고 구원의 손길은 오로지 그분만의 것이다. 감히 인간이 그 선을 침범하며 신을 참칭하는데 어찌 저리도 뻔뻔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희야는 고개를 기울였다. 코에서 흐르던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살벌히 얼어붙어 바닥을 굴렀다.
"구원을 수단으로 쓰는 것들과 무슨 대화를 나눈담, 잇속 채우기 대화인가요? 그렇다면 누구 이를 채울까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이란 것은 늘 흥미로운 주제지만 늘 대상이 부족하다. 가끔은 뇌를 갈라 그 속을 후벼 읽어보고 싶은데 적절한 표본이 여기 있다면 개입해보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
"최근 일어나는 불법적인 일을 대대로 수사한 결과, 대다수 샹그릴라를 복용한 열등생이었다. 이걸 보면 열등생은 사회적인 문제가 있다. 이들은 레벨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는 다른 학생들을 짓밟는다. 이들을 사회적으로 격리하며 제한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명분을 만들어 엘리트의 자리를 공고히하고, 열등생의 입지를 좁힌 뒤 통제하며, 인첨공의 레벨 체계를 조금 더 확고하게 구분지어 사회적인 경쟁을 부추기고, 암부의 의뢰는 증가할 것이며, 예산은 늘어날 것이고, 정부에서는 인첨공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명분이 주어질 절호의 기회라는 대화? 음…… 너무 갔나요? 하지만 이런 명분이 아니라면 넘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희야는 눈을 낮게 내리 깔았다. 주변 기온이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뭐…… 그게 맞아도 희야는 막을 것 같지만요."
그야 너희. 희야는 말갛게 웃었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숭고한 뜻 없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급급한 이단이 구원 명목으로 설치는 꼴을 못 보거든요."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고통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시야가 어둡다. 류화는 비틀거리며 자리에 일어나 선다.
"그 희생에 갈려 나가는 사람들은 그럼 뭐가 되는데? 그리고 그 기술을 온전에게 우리에게 향할 거란 건 어떻게 믿고?"
현실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 많이 가지고도 더 가지지 못한 자들이 널렸으니, 그 타락한 욕망에 빠진 자들은 먹어도 먹어도 배부른지 모른다. 우리 같은 사람들을 실험쥐로 써 얻어낸 발전의 혜택이 우리에게도 내려질 거라고 어떻게 믿겠는가. 그것이 구원이고 낙원으로 가는 길이라면, 엿 먹으라지. 여성을 노려보는 류화의 눈빛에는 분노, 그리고 후회가 드러난다.
"샹그릴라를 여섯 알 먹었어. 미래를 가불하고 얻은 결과가 뭔지 알아? 과거보다 못한 현실이야."
불행을 불러오는 블랙홀이 있으니, 아무도 그 블랙홀을 막으려 하지 않는다. 아무도 악을 처벌하지 않으려 한다.
뇌리를 뒤흔드는 통증이 사라졌다. 소강상태에 들어선 머리를 잘게 털며, 상태를 가늠하듯 주먹으로 통통 두들겨보기까지 함에 따라 이상 없음을 확인했다. 오, 이제 안 아파. 순전히 반색하고 있는데 여자가 삭연한 논쟁의 포문을 열었다.
약, 희생, 편의. 불온한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열을 맞춰 나열된다. 살아감이란 누군가의 생을 앗아가며 늘려가는 것. 핏줄을 타고 인계되어 저변에서부터 익숙하고 너절해진 명제가 또다시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권태로운 낯에 일순 과거의 잔재가 스몄다가 꺼졌다. 넌출을 잘근거리자 기다란 잎사귀가 나실 거리며 언짢은 기색을 표출했다.
솔직히 말해서 누가 약물 중독자가 되든, 탈법적인 수단을 애용하든, 각다귀판을 만들든 제겐 하등 무관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눈앞을 스치는 낯익은 면면들만 없었다면.
상위 레벨의 동급생, 그리고 스킬아웃으로 변모한 동급생.
하루에도 수십씩 일어나는 내전. 사람으로 구성된 곳을 토대로 삼은 이상 사람 사이의 균열은 세상의 균열을 의미했다. 말인즉슨, 제가 인지하기 시작한 영역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소리였다.
세상의 과제는 곧 자신의 과제나 다름이 없었다. 제 세계를 지키기 위해선 뿌리 깊게 자리한 혐오를 뽑아버려야 했다. 낙조는 작고 연약한 제 세계를 유지시키기 위해선 지닌 능력이 어떻든 세상의 시스템을 뜯어고치려는 생각까지 하는 놈이었다.
(철현) "합법적인 연구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지. 언제나 과학의 발전은 그런 비합법적인 것에서도 더욱 크게 발전되었어." "이를테면... 마루타도 비슷한 거라고 할 수 있겠지. 결국 거기서, 많은 인체과학이 발전한 것도 사실이니까." "역사의 과학은 그런거란다. 아가야."
허나 철현의 다음 말. 베타 버전에 대해서 여성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다은) "과학이 먼저이냐, 인간이 먼저이냐. 하지만, 결국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 희생은 필요한 법이지." "약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동물이 희생당하는 것과 매한가지. 이번에는 인간이 필요했을 뿐이란다." "무엇보다, 이 인첨공에 들어올때 이미 비슷한 것을 겪지 않았니?"
쏠테면 쏴보던지. 그런 도발을 하며 여성은 피식 웃었습니다.
(세나) "놓아주지 않으면 어쩔 참이지?" "결국 암부와 정면 승부라도 하겠다는거니? 징심으로? 바보구나. 넌."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여성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청윤) "행복을 많이 해쳤다라. 하지만 선택은 모두 그 애들이 한 거란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책임 또한 전부 그 애들이 지는 것이 맞지 않겠니?"
마치 그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없다는 듯, 여성은 뻔뻔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이경) "후훗. 부정은 못하겠네." "하지만... 고작 그 정도의 뜻이 아니라 더 큰 대의가 있단다. 그게 뭔지는 알 건 없지만 말이야." "좋은 일이 생기게 될 거야. 진정으로, 좋은 일이 말이야."
여성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조용히 비췄습니다. 허나 더 자세한 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혜성) "평화가 좋다면 그냥 조용히 물러났으면 좋았을텐데..."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평화가 좋다면 모르는 척 하면 좋을텐데." "그럼에도 굳이 그렇게 하겠다니. 네가 싫어서 뭐 어쩌겠다는거지?"
한숨을 내쉬면서 여성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습니다.
(동 월) "그러게. 그리고 네 머리도 상황 판단을 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은데?" "뭔가 올바른 판단인지도 잘 모르는 것을 보면 말이야."
여성은 한심하다는 듯, 월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습니다.
(경진) "어쩔 수 없잖니. 과학의 발전엔 희생이 항상 따르는 거니 말이야. 여러모로 많이 묻혀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이것도 똑같아. 그리고...무엇보다 선택한 것은 그 애들이란다." "스스로 선택을 했으면... 모르모트와 다를것이 뭐가 있지? 아니. 모르모트 이하지. 안 그래?"
여성은 실이 연결된 학생들을 바라보며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습니다.
(성운) ".....괜찮아. 나는..." "...고마워."
숨을 조용히 정리하면서 세은은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고민을 하는 모양입니다. 오른팔이 조금씩 떨리는 모양입니다.
(애린) "과학자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그저 범위가 넓어진 실험일 뿐이야."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고, 그 데이터로 더 좋은 성과를 만들어내지." "그저 그런 것 뿐이야. 사방에서 소리지르건 뭐건 알게 뭐니. 결국 먹는 것을 택하는 것은 자신들인데."
자신의 책임은 없다는 듯, 어떤 결과를 맞이했어도 그건 그들의 책임이라며 여성은 피식 웃었습니다.
(한양) "한계가 아니라 그렇게 이뤄지는 거란다. 과학의 과도 모르는 초짜야." "우리는 차라리 기술 발전에 도움이라도 되지. 아무런 도움도 못되면서 입만 터는 애송이는 너무 약해보인단 말이야." "...그리고 지금도 너는 그 주제를 모르고 있지. 짖지 마. 약해보인단다. 아가야."
검은 오오라가 나오건 말건 여성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일부러 조롱했습니다. 마치 도발하듯이.
(수경) "하지만 너희들의 존재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증명하잖니." "너희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너희들은 초능력을 쓸 수 있게 된 거잖아." "그런 주제에... 그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남 이야기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그렇게 물어보면서 여성은 키득키득 웃었습니다.
(수강) "하고 싶다? 봤으니까 한다?" "하하하핫. 그래서 결국 네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말이야?" "그렇게 해서 남는 것이 뭐니? 대체? 이타적인 희생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거니?"
정말로 웃기다는 듯이, 여성은 배꼽을 잡고 크게 웃기 시작했습니다.
(리라) "실험장 취급이라. 인정하지. 그래. 그렇게 했어." "하지만 거기서 지원한 것은 자기 자신들." "넘어가줄줄 알았냐가 아니야. 넘어가줘야지. ...주제 파악이 안되는 꼬맹아."
오만한 목소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선택은 약을 먹은 이들이 했다는 식입니다.
전체적으로 저지먼트 멤버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더라도 샹그릴라 문제에서 손을 떼지 않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것을 들으면서 여성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앞에 있는 여학생이 눈을 번쩍 떴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허공에서 작은 병들이 일제히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일제히 동시에 폭발했습니다.
"이게 뭔진 알고 있겠지?"
그건 병원에서 본 적이 있는 이라면 본 적이 있는 노란색 연기. '페러사이트'입니다. 대 능력자용 병기. 피부로도 흡수되며, 일단 한 번 마시면 숨을 쉬기도 힘들어지고, 몸이 말을 듣지 않고 마비되며, 연산도 할 수 없게 되는 무시무시한 그 연기는 그야말로 여기저기에서 퍼지면서 저지먼트 멤버들을 노려왔습니다.
이전에는 은우가 있었지만, 지금은 은우가 없습니다. 연기의 확산 속도가 상당히 빠른만큼, 1분(=1턴)도 안 되어서 주변을 감쌀 것은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어 앞에 있던 남학생의 눈이 번쩍였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주변에 투명한 막이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랑은 아마 그 막에서 불길함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대체 왜일까요?
"너희들 같은 애송이를 상대로 진심으로 싸우는 것도 웃기단 말이지. 아주 조금은 놀아줄게. 조금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