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꽤 단시간에 레벨을 올린 모양인데. 몸이 제대로 따라주지 않을 거야. 나중에 시간을 내서 교정을 할 필요가 있어보이네. "
곧 그녀는 스크린에 몇 가지를 입력합니다.
특성, 위험물 사용 허가를 획득합니다!
>>895 이브가 한 걸음을 내딛어 조심스럽게 노인을 가리지만, 노인은 오른쪽 사슬낫을 가볍게 한 바퀴 돌리며 바라봅니다. 꽤 오랜 기간을 같이 하며 이브는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잡지 않으면 놓친다. 그런 눈으로 이브를 바라본 노인은 힘 없는 눈을 깜빡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브를 죽이겠다는 듯 말입니다.
치유받은 몸을 가볍게 점검하다가, 에브나의 말에 쓴 웃음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이런건 애 교육에......안좋았나!? 설명 잘 해야겠다.
"그...남자들은? 기사들은? 가끔 누가누가 더 뛰어난지 겨뤄보고 싶을 때가 있어. 내가 이 만큼 노력해서 강해졌다, 내가 이 정도로 할 수 있다....그래서 서로 얼마나 많은 것을 달성해왔는지 공유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혹은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그런거지."
나는 에브나에게 일종의 '호승심' 이나 '경기' 의 개념을 설명하려고 애쓴다.
"근데 이번엔, 음....내가 '맞아야만 쓸 수 있는 기술' 을 쓰기로 해서.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 싸운거지. 고통을 즐기는건 아니야."
나는 결코 고통을 즐기는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부디 알아줘 에브나.
"주변에서도 꽤나 즐거워 보이잖아?"
주변의 환호에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여서 대답하며, 그녀에게 이게 폭력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축제 일부란것이 전해지길 바랬다.
세상이 싫었습니다. 기억을 떠올릴 적에 남았던 것들은 러시아의 차디찬 바람과 알렌이라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쪽지 한 장 뿐. 길거리에 버려진 것을 인식한 순간부터 알렌은 스스로를 내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했습니다. 나쁜 것은 세상이며, 나를 이리 만든 것은 환경이고, 나에게 도움 주지 않은 것들은 모두 적이었으니까요. 쥐를 물고 도망가는 길고양이의 목을 졸랐습니다. 그것을 살기 위해 먹었던 기억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쓰레기통을 뒤져 타인의 음식물 쓰레기를 먹다가 토를 하고, 속이 비워진 것만큼 채우려 그것을 먹던 것 역시 떠오릅니다.
의념시대. 그것은 꽤나 많은 것을 사사했습니다. 굶주림이 줄어들었고, 삶의 질이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 곳, 그 시선이 닿지 못하는 곳도 존재했습니다. 이 시대의 러시아란 그런 곳이었습니다. 붉은 곰의 실종, 그의 후계를 자처한 이들의 전쟁. 그리고 그가 남긴 것들을 찾기 위한 정보전쟁, 그리고 그 여파 속에서 잊혀진 사람. 알렌은 그 잊혀진 쪽에 속했습니다. 그렇기에 의념을 각성한 순간, 온 몸에 느껴지는 희열감과 안도감은, 곧 증오와 분노로 바뀌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힘이 있는데. 이런 능력이 있는데.
왜. 왜 우리를. 왜 나를 도와주지 않은 거지?
소년의 눈에는 먹다 남은 썩은 빵이 보였습니다. 백록색의 곰팡이가 자리를 차지한 그것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것마저도 닷새. 닷새만에 먹은 음식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소년이 분노에 폭주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 썩어빠진 상황들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모두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고통스럽게, 가장 혐오스럽게.
그렇기에 소년은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기에 소년은 그 희열감에 맡겨 자신의 폭주를 토해냈습니다. 그렇게 거리가 불타고 있음에도, 누구도 자신을 말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곧 지독한 고통과 한기가 몸으로 밀려들었지만 소년은 토해내려 했습니다. 그러다 죽든 말든, 자신에게 미래는 없으니까요.
그때.
" 그만둬. "
소년을 막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 그대로면 죽을 거야. 몸이 무너지고 있어. " " 닥쳐어어어!!!!! "
분노를 휘두르던 소년을 진정시키고, 기절시켜 잠들게 한 그녀는. 그 순간 웃고 있었습니다. 다행이라는 듯. 자신을 구할 수 있었다는 듯.
소년은 그렇게 처음으로 걱정이라는 감각을 느꼈습니다. 깨어난 소년은 처음으로 배곪지 않고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었고, 따뜻한 잠자리에서 온기를 느끼며 잠에 들었습니다. 자신의 손을 어색하게 잡고 잠에 든 카티야를 바라보고, 창밖을 바라볼 때마다 소년은 분노가 느껴졌습니다. 그럴 때면 소년은 눈을 감았습니다. 그 곳에서 느껴진 온기가 말했습니다. 그 행동에 실망할 사람이 있다고.
소년은 알았습니다. 그 감정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여전한 영웅. 나를 살아있게 만든, 살아가게 만든 의지. 그리고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이 심장에 남았을 것 같은 후회를.
" 사랑해 카티야. "
이제야 토해냅니다.
카티야는 웃고 있습니다.
" 미안해. "
곧 그 눈이 알렌을 마주합니다.
" 미안해. "
그 손이 알렌의 손을 붙잡습니다.
" 미안해. "
고개를 숙입니다.
" 미안해...... "
눈물이 흐릅니다. 떨어집니다. 그 자국은 그녀의 몸을 데우던 이불 위에 스며들어 그 흔적을 남깁니다.
" 죽고 싶지 않아. 도망치고 싶지 않아. 더 살고 싶어. 더, 더 많은 것들을 하고 싶었어. 두려워. 사라지고 싶지 않아. 잊혀지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그렇지만...... "
카티야는, 고개를 듭니다. 눈물 맺힌 두 눈동자에 알렌을 담고, 그녀는 말을 뱉습니다.
" 난 너를 더 상처주고 싶지 않아. "
그 어색한, 한 마디로 이어지는 긴 침묵. 그리고 카티야는 알렌에게 다가옵니다.
살짝은 건조하고 마른 느낌이 드는 입맞춤. 작은 입술의 온기가 잠시 카티야에게 스며듭니다. 카티야는 붉어진 얼굴로, 알렌을 바라보고 그 머리카락을 다듬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