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빛을 뿜는 수수께끼의 괴물이라는 점이 여전히 무섭지만, 그래도 형체 없는 저주나 귀신 같은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도리어 조금은 안심했다. 동물이 맞다면, 아니 차라리 괴물이더라도. 그 정도만 해도 오히려 낫다. 실체 있는 생물이라면 일단 주먹은 먹힐 것 아닌가……!
코우를 들어 안은 채 비장하게 동굴의 입구를 노려보는 것도 순간이다. 괴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더 지체할 시간은 없으리라. 그렇게 다리에 힘을 모으고 수풀 무성한 숲 한가운데로 다시금 뛰어들려던 순간―
극도로 곤두선 청각이 문득 어떤 위화감을 잡아내었다. 저 소리, 왠지 미묘하게…… '음질'이라는 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서둘러 고개 돌려 뒤를 확인하자 거기엔 무언가 기묘한, 그러니까 방금까지의 상황과는 다른 의미에서 기묘하기 그지없는 광경이…….
"고릴라……?"
어어, 여기가 남국이긴 한데 그렇다고 고릴라가 나올 만한 장소는 아니지 않나? ……아니 그보다도 왜 고릴라가 스피커를 들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점보다도 곁다리 격 될 사실들에 더 주목한 까닭은, 이 상황이 너무도 황당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어서다. 프러시안의 니시카타 트레이너가 한밤중에 고릴라 옷을 입고 동굴에 들어가 있는 상황보다는 새끼 고릴라가 남국에 표류해 있는 쪽이 더 설득력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봤자 엄연한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원시 회귀……인가요?"
인간의 조상은 선사보다도 한참 이전에 유인원에게서 갈라져 내려왔으니까……. 그런 걸까. 그렇게라도 생각해야만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자의 안타까운 몸부림이다.
사실 저 소리를 듣고 무서워한 적은 없다. 그냥 박쥐를 보고 좀 놀랐을 뿐이지, 그리고 위험한 야생동물이 있을까봐 그걸 걱정한 거고(?) 아무튼 곧 모습을 드러낸 거구의 괴생명체...는 거구도 아니고 괴생명체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150센치 조금 넘을 거 같은 체구에, 딱 봐도 가짜같은 고릴라 탈을 쓴... 사람. 게다가 양손에 울음소리가 나오는 스피커를 든. ...여기도 담력시험 코스였었나... 라기엔 귀신이나 유령 같은 초자연적인 소재도 아니고, 실제로 있을 법한 상황이라서 더 이질적이다.
"...괜히 놀랐네."
그래도 상상하던 최악의 상황은 아니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 건 아니고, 잘 봐봐. 저거 가짜 탈이야."
원시 회귀라는 이상한 추측을 하는 사미다레에게, 넌지시 그렇게 알려준다. 막상 정체를 알고나니 그렇게 무섭지도 않은데, 이 담력시험 이대로 괜찮은가...
얼떨떨한 상태로 원시 회귀 같은 소리를 하던 것도 잠시, 이윽고 들린 목소리에 사미다레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공포로 한껏 졸아들었던 마음이 탁 풀려버리니 맥이 빠지면서도 우스워졌다.
"아, 아하하, 그러게요. ……핫, 내, 내려, 이제 내려드릴게요……!"
그, 그러고보면 트레이너님은 연인 앞에서 공주님 안기로 들려 있었다는 거잖아! 사미다레는 당황해서 퍼뜩, 그러나 부드러운 손길로 코우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니시카타 트레이너의 애인을 꼭 안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바보짓을 한 것 같아서 뒤늦게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오늘 밤엔 내내 새파랗게 질려 있던 얼굴이 간만에 다시금 새빨개진다.
"그, 그런데…… 왜 하필 고릴라……인가요? 어른이라고 해도 혼자는…… 위험하지 않을지……."
불을 끄고 기다린 듯하니 어둡기도 하고 말이다. 동굴 속 괴물 역을 맡았다 해도 혼자서 이 어두컴컴한 곳에 있으면 무섭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뜻이다. 사미다레는 그렇게 말하며 미즈호를 힐끔거리다, 슬며시 코우를 앞에 내세웠다. 아니 왠지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이제서야 내리는 것을 보고는, 고릴라…..아니 니시카타 미즈호는 탈을 벗어보였다. 코우가 공주님 안기로 들려있던 것도 딱히 상관없는 것인지, 지금의 니시카타 미즈호에겐 장난기 어린 미소가 역력하다.
“후후, 담력시험도 끝났으니 뒤풀이 정도는 가져도 괜찮겠지요. “ “최대한 [ 무서워 보이는 ] 생물로 분장하여 놀래키기 위한 것이었답니다. 어때요, 무서우셨나요?“
왜 하필 고릴라냐는 둘의 질문에, 미즈호는 스피커를 내려놓고는 어깨를 으쓱여보이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원래는 말이지요, 저~ 동굴안에도 이런저런 담력시험을 위한 장치가 많이 설치되어 있었답니다? 잘못 밟으면 쾅 하고 놀래킬 만한 마네킹이 나온다거나, 하는 트랩 말이지요. “ “그런데 여러분들께서 도저히 안으로 들어오시려 하시지 않으시기에….. 어쩔 수 없이 직접 나오게 되었답니다. “
한 쪽은 경직된 웃음소리, 다른 한쪽은 그나마 덜 경직된 웃음 소리. 이쪽은……아주 여유로운 웃음 소리다. 후후, 하고 웃으며 미즈호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어보였다.
“전혀 위험하지 않았으니, 걱정은 말아주시길. “
하지만 사실은 조금 무섭긴 했었다, 는 것은 비밀이다. 저 어두컴컴한 곳에서 미즈호가 홀로 몇 시간을 있었는지 사미다레와 코우는 모를 것이다…..
“헤헤, 진짜로 맛있는걸. 나냐짱이 만들어줘서 그래. 어쩌면 나, 이것보다 더 맛있는 참치마요 샌드위치, 먹어본 적 없을지도?”
느릿하게 웃었다. 응, 정말 맛있는 샌드위치였고. 다시 한번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물고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따스한 햇살, 고요하게 철썩거리며 퍼지는 파도소리,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모래, 그리고 너와 나. 응. 정말로, 이 이상으로 맛있을수 없겠는걸. 소리가 나지 않게 씹고, 삼킨 뒤에..
”....나냐쨩, 그, 그래도? 평생 이것만 먹고싶은건 아니니까? 갑자기 내일 ‘여, 모카땅~ 어제 니가 샌드위치 맛있게 묵어가꼬 잔뜩 만들어왔어야?’ 같은 말을 하면서 샌드위치 5000개정도 만들어오면 나, 나나나나나아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