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면담이 남아 가야한다고 하면 어쩔까 싶었지만. 다행히 그럴 일 없이 제가 마지막이란다. 제게 시간 쓸 것을 염두하고 그런 건지 모르지만 오늘은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는 듯 하니 그저 좋을 뿐이었다. 고개 숙인 채로 베시시 웃으며 그의 옷 꾹꾹 잡았다 놓기를 반복하다가 제게도 물을게 많지만- 하는 말에 살짝 눈만 들어 그를 보았다.
물어볼 거... 그럴 만한게 있나?
당장은 감 잡히는게 없어 눈 깜빡깜빡하다가 피 얘기에 고개 돌려 조금 전까지 앉았던 자리 본다. 여즉 흥건히 남은 핏자국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고. 다 게워내는 것 아닐까 싶을 만큼 피 쏟던 하 사감의 모습 재차 떠올라 희미하게 미간 찡그렸다. 그가 인간이었으면 지금 서 있던 건 고사하고 숨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 너무한 처사라고 생각하며 다시 하 사감 보았다.
"치우는 건 내가 천천히 해도 돼요. 그보다 지금은 아프지 않아요? 그렇게나 토했으면서."
이미 안겼지만은 재차 확인하듯 그의 가슴팍에 손 대어본다. 옷 아직도 피범벅인 채인지. 달리 외상은 없는지. 조심히 본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조금 세게 눌렀을 지도 모르겠다.
역린? 시야? 가물가물하던 기억이 순간 팟 하고 떠오른다. 아회랑 있었던 술자리. 역시 다 보고 있었구나... 그래 사실 그걸 생각하면 제가 그렇게 화 낼 처지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스스로 마음씨가 좋지 않다고 해도 제 성질 다 받아주고 지금도 넌지시 말만 하는 것 보면 나름대로의 배려 해주는구나 싶다. 아회에게도 그럴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알아들었지만 괜히 내색은 않고 그를 살펴보았다. 조금 힘주어 눌렀을 뿐인데 쑥 들어갈 것 같은 느낌에 급히 손을 거둔다. 그가 앓는 소리를 내어 놀란 것도 있었다. 제가 안겨있는 것도 부담이 될까봐 살짝 떨어지려 했다. 피를 토하길래 속이 상한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나보다. 또 어기게 될 금기였다거나. 이건 쉽게 낫지 않는다거나. 그런 말 들으며 어찌해야 하나 전전긍긍하다가 일단은 쉬게 해야 할 거 같아 그의 팔 잡고 제 침대로 이끌려 했다.
"말 안 해도 더 안 누를 테니까. 이리 와요."
세게 당기면 아파할까 꼭 쥔 손과 달리 억지로 당기지도 않는게 그를 무슨 금지옥엽으로 생각하는 거 아닐까 싶다. 힘만 안 썼을 뿐 고집스럽게 그를 이끌어 침대에 걸터앉히고 저도 그 옆에 앉으려 했다.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가슴팍 또 만질 듯 손 들어올리지만. 그대로 다시 내리며 제 옷을 꾹 쥐었을 것이다. 쥐어서 구겨지는 옷감 물끄러미 보다가 조심히 물어보았겠지.
"조금 전에 또 어겼다고 했는데. 전에도 누군가에게 말할 일이 있었던 거에요?"
저와 같은 상황 있었을지. 혹은 다른 일이 있었던 건지. 그것 묻고 시선으로만 피가 베어나오던 자리 보았다. 살짝 미간 찡그려지는게 안타까워 그런 듯 했다.
데려갔을 리가. 자신이 황룡 선택하겠다 명확히 말한 적도 없는데 당최 무슨 소리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인기척 느껴지며 아회는 바로 문을 걸어잠갔다. 쉬라는 예의상의 말도 더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얼마 남지 않았다. 도망쳐야 한다. 그렇지만 어디로? 받아주기는 할까? 날 도와줄 수는 있나?
도와줄…… 사람이 있나?
나 하나로 인해 수많은 목숨이 사라질 수도 있다. 일각이 지나도 나를 학당 내에서 찾지 못하면 이 학당을 뒤엎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시야가 일렁인다. 다시금 뚝, 무언가 끊겨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아회는 눈을 감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몸을 덮던 교복이 바닥으로 사붓하게 떨어졌다. 가주님께서 자신을 어여삐 여겨 친히 하사한, 겉은 희고 속은 쪽빛 은은한 귀한 비단 옷을 걸치고, 머리는 진주가 아롱아롱 맺힌 새로운 비녀로 틀어올렸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임에도 아회는 자신을 단장했다.
그리고 타오르는 벽난로에 등지고 다소곳하다 못해 마치 충신처럼 앉아버리니, 화려한 소매와 옷자락이 가득 퍼진다.
어차피 무슨 짓을 당해도 이쪽이 승리할 판이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지 않은가, 예비하고 대비하였지 않은가. 도망치지 말아라, 이곳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곳에도 있으리라…….
머릿속 개운해지니 뒤늦게 제 얼굴 볼만하겠구나 싶었다. 침대 머리맡에 둔 휴지 슬쩍 집어다 엉망인 얼굴 슥슥 정리한다. 부은 건 어쩔 수 없겠지만은. 그러고선 제 옷 쥔 손 꼼지락거리며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한 명 있었다고.
우리- 라는 건 신수를 말하는 걸까. 사감을 말하는 걸까. 알고 있으니 알려달라는 말은 어쩐지 모순적이다. 알고 있는데 또 무엇을 알려고 한 걸까. 다 알고 있으면서 더 알아내려 하고. 그래야만 했을 사람. 단 한 명. 문득 머릿속에 검은 호랑이 가면 스쳤다. 딱 한 번 마주쳤었지만 그 한 번으로 여태 안 잊은게 용하다. 그만큼 인상적이었던 의미겠지. 그 꺼림칙함이.
"흐음. 그것도 금기라면 궁금해하진 않을게요. 그러면 그 한 명이 누구인지는 말해줄 수 있어요?"
금기의 내용은 알아본들 제가 뭔가 할 수 있지도 않고 말한게 하는 것으로 또 아프게 할 테니. 그건 됐으니 10여년 전에 그를 아프게 했을 한 명이 누구냐고 물었다. 설마 그것도 금기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뭐- 직접 찾아서. 응. 어차피 결과는 똑같다.
질문 그것 하나가 아니었다. 아. 이건 요구에 가까웠으니 질문은 아닐까. 계속 손 쥐락펴락 가만 두질 못 하던 온화 다시금 그의 옷깃 슬며시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 음. 그거 보여줄 수 있어요? 그거. 금기 때문에 생긴 상처."
피조차 쉬이 멎지 않는 상처가 신경 쓰여서 였을지. 아니면 다른 의도 있을지. 조심스럽게 묻는 모습은 의중 두루뭉술하게 보였을 것이다. 딱 한 번 묻고 가만히 그의 눈치 살피는 것도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