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는 여관 꼭대기층인 5층을 전부 사용하는 커다란 방을 여는 용도인 것 같습니다. 5층은 좀 높긴 하지만 경치도 좋고 방도 넓고 쾌적하고... 아주 좋네요! 문 반대쪽 벽에 커다란 창문이 있어서 밖이 아주 잘 보입니다. 프라이버시를 위한 커튼도 달려 있어요. 여긴... 확실히 1인실은 아니군요. 거실 하나에 침실 세 개와 화장실 딸린 목욕탕 하나가 있는 구조입니다. 일반 가정집 같은 생김새지만, 주방이 없어서 요리를 만들 수는 없네요. 대신 데울 수는 있도록 마석을 사용한 금속 상자 같은 게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습니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상아색 벽지는 마석 가루를 섞어서 제조했는지 가까이 있기만 해도 컨디션이 좋아지고, 바닥에 깔린 카펫은 푹신하여 맨발로 돌아다녀도 될 정도입니다. 각 침실에는 1인용 침대가 하나씩 있습니다. 침대 옆에는 간단한 물건을 올려둘 수 있는 협탁이 있고, 구석에는 금고가 놓여 있습니다. 벽과 일체화된 모양새라 도둑맞을 염려는 없겠군요.
거실 테이블 위에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하는 의미로 피로회복제가 놓여 있습니다. 한 잔인 걸 보면 당신이 당첨된 뒤, 누군가가 빠르게 와서 놓고 간 것 같습니다. 와인잔에 든 액체는 금을 갈아 섞은 것처럼 반짝이는 보라색으로 빛납니다.
티케가 방을 둘러보며 야옹거립니다. 어조를 들어보면 딱히 큰 불만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사실을 확인하려고 물어본 것 같습니다. 피로회복제를 방치한 채 밖으로 나갑니다. 도시는 활기차고, 곧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일과를 마친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큰 도시라 그런지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도 보입니다. 시장, 식당가, 주택가, 시청 등의 방향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오늘따라 은행 업무가 밀리는 모양입니다. 운 나쁘면 내일 찾아왔을 때 잔고가 없어서 교환이 안 된다는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군요... 시장은 근처에 있을 겁니다. 표지판에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 조금만 돌아다니면 상점이 즐비한 골목이 나올 겁니다.
{왜 그래?} {무언가 보셨습니까?} {와~ 술래잡기 해~?}
당신의 세 동물 친구는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이쪽이 더 기민하게 반응한다는 걸 고려하면 조금...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신은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가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방향을 특정할 수 없습니다. 보고 있는 건 확실한데, 어디 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움직임에 맞춰서 시선이 따라붙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반응을 보아하니 알아차린 파트너는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라비만이 가만히 귀를 쫑긋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할 뿐입니다.
{가끔 마법으로 자신의 위치를 숨겨서 저격을 시도하거나, 틈을 엿봐서 기습하는 일이 있습니다만...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하신 듯하니 지금은 경계만 하겠습니다.} {와 경계! 나도 할래!}
마일로는 야옹거리며 주변을 돌아봅니다. 정면, 오른쪽, 왼쪽, 뒤, 정면, 오른쪽, 왼쪽 뒤... 시계처럼 규칙적인 움직임입니다. '나는 주변을 경계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군요.
상점가로 갑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슬슬 마무리하고 들어가려는 노점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열려 있습니다. 물건을 팔려는 상인들의 목소리와 가격을 묻고 흥정하는 손님들의 목소리가 섞여서 번잡합니다. 당신의 세 동물 친구는 소음 때문인지 귀를 살짝 파닥거립니다. 어디로 가볼까요?
일단은 식품을 파는 상점이 보이는군요. 앞쪽 가판대에는 신선한 과일이나 채소 따위가 있고, 안쪽 상점에는 장기 보존 가능한 종류를 파는 것 같습니다. 그 근처에는 여행 용품 상점이 있습니다. 침낭, 텐트, 그리고 여행에 필요한 휴대용 냄비나 마석으로 만든 불 지피는 도구까지, 큰 도시의 상점이라 그런지 참 별의별 게 다 있습니다. 아, 여기 지도도 파는군요. 그 외에는 정육점이나 잡화점, 금은방, 약재상, 그리고... 아, 사냥감의 부산물을 팔 수 있는 상점도 있습니다. 가죽이나 송곳니 같은 것들이요.
잡화점은 손님들로 붐빕니다. 잡화점답게 쓸모 있어 보이는 물건들과 쓸모 없어 보이는 물건들과 '이건 대체 뭐지?'싶은 물건들이 혼재합니다... 일단 지도는 확실히 팔고 있네요. 둘둘 말린 채 구석의 나무통에 들어 있습니다. 종류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대륙 전도입니다. 크고, 세세하진 않지만 대륙 곳곳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방위별 지도입니다. 대륙을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지형이나 지명 따위를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한 겁니다. 참고로, 이쪽은 대륙 서쪽에 속합니다. 뿌리채소는 식품점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덧붙이자면, 시선은 아직 당신을 향한 채입니다. 여전히 어디서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상점 안에 들어와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그야 여기 있는 사람들은 죄다 물건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까요.
시선은 여전히 당신을 향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대신 돈을 내줄 용의는 없는 듯합니다. 오늘은 구경만 해두고, 내일 일찍 수표를 바꾸고 다시 쇼핑하러 오는 쪽이 좋겠습니다. 아니면 당장 돈을 받을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소지품을 팔 수도 있습니다.
시간을 보아하니 오늘 안에 돈을 벌려면 아주 빨리 끝나는 일이 아닌 이상은 아마 밤에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일단 지금은 근처의 식품점으로 향합니다. 앞쪽 가판대엔 신선한 식품들이, 안쪽 상점에는 가공식품 및 보존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뿌리 채소는 가판대에 있습니다. 당근, 고구마, 사탕무... 아주 종류도 다양하네요. 별 관심이 없는지 티케는 꼬리만 탁탁 움직이고, 마일로가 하나하나 구경하는 가운데, 라비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재어보듯 뿌리채소들을 쳐다봅니다.
당근 다섯 개를 4500골드에 구매했습니다! 마일로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듯 길게 야옹, 하고 웁니다. 돈가방은... 나중에 주인을 찾아줄 수 있을까요? 일단 가지고 있는 게 좋겠습니다.
여관으로 갑니다. 이벤트에 당첨되어서 그런지 석식은 무료 제공입니다. 식당에서 다른 사람들과 먹는 게 아니라,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방까지 가져다 주었군요. 방에 들어가면 테이블 위에 커다란 쟁반과 그 위에 올려진 금속 뚜껑이 보입니다. 뚜껑을 열어보면 오늘의 저녁 식사가 나타납니다. 소고기 스테이크, 버터에 구운 아스파라거스와 자그마한 옥수수 토막, 매시드 포테이토, 발사믹 식초를 곁들인 샐러드, 그리고 와인 한 잔입니다. 뚜껑 안쪽에 보존 마법의 마법진이 새겨져 있어서 그런지 갓 나온 것처럼 따끈합니다. 동물 친구들을 위해서 드레싱 없는 샐러드와 간을 하지 않은 스테이크가 같이 들어 있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따뜻하고 풍성한 식탁입니다. 동물 친구들도 신나게 자신들의 몫을 뜯습니다. 아, 다 드시면 모든 식기를 쟁반 위에 두고 뚜껑을 덮은 뒤, 뚜껑 손잡이를 두 번 톡톡 두드리면 된다는 안내 쪽지가 쟁반 가장자리에 붙어 있었군요. 그대로 하시면 식기는 순간이동되어 사라집니다.
거의 사라지기 직전의 태양이 짙은 붉은색 노을을 만들어냅니다. 내일 할 일을 정리하며 쉬는 게 좋겠습니다. 뭘 해야 할까요? 일단 은행에서 수표를 바꿔야 하고, 물건들을 사야 하고...... 그러고보니 그 시선은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는 느껴지지 않는군요. 프라이버시 존중일까요? 아니면 그냥 흥미가 떨어진 걸까요? 그건 내일 밖을 걸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라비가 큰 잎사귀를 마저 먹어치운 뒤, 당신에게 말합니다.
{조련술 기술을 향상하기 위해, 명상을 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저희들과 보다 깊은 교감을 나누신다면,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질 겁니다.}
저녁 시간에 딱히 할 것도 없으니 라비의 말을 따라도 괜찮을 겁니다. 모든 일정을 마치면, 잡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