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는 삭막하다라. 어릴 적 자주 다녔던 그 시절을 되짚어보면 하얀 풍경과 정적이 태반이긴 하다. 아이들 노는 소리조차 새하얀 설원이 잡아먹는 듯 했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풍경. 어린 저는 은연중에 그것이 벌이 아닐까 했었다. 언제 와도 한결 같은 눈밭 바라보며.
아회의 손이 유과 가져가고 동시에 말 들렸다. 소중한 것이 생기면 약점이 되지 않겠느냐. 이미 구실은 충분하지 않겠느냐. 그런 말을 아회가 하는 것이 의외라는 생각과 그렇다면 구실 있음에도 쉬이 손 대지 않는 이유 무얼까 싶다. 그 신수 말대로 형제 싸움 하기 싫어서 뿐일까. 의문은 들었으나 깊이 생각하진 않기로 한다. 같은 인간끼리도 생각 통하지 못하거늘 격이 다른 신수들의 의도를 한낱 인간인 제가 가늠할 수는 없으니. 유과 부서지는 소리에 맞춰 슬그머니 생각 밀어낸다.
또다시 들려온 가벼운 농담에 말이 쉽지. 하고 실없이 웃었고. 거하게 취해보자길래 저는 그래본 적 없으니 구경 잘 하겠다며 히죽거리기도 했다. 새 술 가져와 앉을 적 아회도 움직여주어 자리 잡는 것 수월했다. 수월하지 않은 건 제 몸뚱이였으나 뭐 어찌저찌 한 쪽 무릎 세우고 앉아 술 따르니 병 열었을 적보다 강렬한 향이 코 끝 훑었다. 되려 술 깨우는 듯한 향취에 어렵사리 그 말 꺼냈다. 그리고 조금 침묵. 이후 그런 대답 들렸다. 예상했다면 예상한 내용이며 그랬구나- 싶은 사실까지.
"...대강 알고는 있었지. 오라비 눈 어떠한지."
그래. 예상은 하고 있었다. 아회 시야 그리 맑지 못 한 것 말이다. 장장 삼 년을 지켜보았다. 그래놓고 모르면 그야말로 바보천치 아닌가. 하지만 이리 지척에서 흰 눈 마주하고 당사자의 입에서 그 사실 들으니 여캐 술 잘만 넘기던 목 누가 움켜쥔 듯 메인다. 그렇겠지. 굳이 저도 다른 학생도 아닌 아회에게 구태여 눈을 제시한 것은. 인간 따위 이해하지 못 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 신수에게 아회는 참으로 먹음직하게 보였겠지. 단지 그 신수가 간과한 것은. 아회가 이리도 다 타버린 잿더미와 같은 인간이란 것일 터다.
온화 잠시간 말없이 아회 마주보았다. 그 얼굴에 스치는 무수한 감정 끝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을 보았다. 체념조차 흩어지고 공허해지는 얼굴에 무슨 말 더할까. 그 미소에 답할 표정 지을 수 없어 그냥 눈 내리 감았다. 다시 고개 돌려 소반 향해 눈 반쯤 뜨고 중얼거렸다.
"거- 미안하게 됐소. 속도 모르고 부탁이랍시고 그런 소리 해서."
가타부타 길게 얹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게도 두지 않고 그저 길 가다 부딪혀 사과할 때마냥 흘려버리듯 사과의 말 하였다. 그럼에도 쉬이 잔 들지 못 하다가 조금 지나서야 손 올려 술잔 감싸쥐었다. 잔 부딪히자는 듯 내밀며 조금 불퉁하게 내뱉긴 했다.
"쓸데없긴. 그 동안 아낀 말에 비하면 새 발에 피도 안 되겠구만."
그렇긴 했다. 그 전 같았으면 절대 이렇게까지 얘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의미 없대도 이제 그런 것도 터놓고 얘기할 수 있음에 의의 두자고. 그리 말하며 술잔 비웠을 것이다. 그 독한 술 한 모금에 넘겨버리고도 온화 작은 헛기침 정도만 하였지만은.
"크흠. 여전히 독하구만 이것. 어째. 오라비는 마실 만 한가? 독하거든 더 안 마셔도 되는데?"
진중한 분위기 홀랑 잊은 듯 샐샐 웃으며 고개 기울이더니 아회 마신 반응 살펴본다. 많이 쓰지? 고소한 강정 하나 먹어볼텨? 하며 소복한 다과 중에서 콩과 깨로 빚은 강정 하나 집어들어 아회 앞으로 슥 내밀기도 하고. 아무렇게나 앉아 히히- 하고 웃으니 나이 덜 먹은 철부지 같기도 했다.
치미. 남자의 대답에 유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명이라 해도 좋을 이름은 따로 있는 듯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인간들 사이에선 값 높이 부른 후 의견을 맞추어 가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계약 방식이라 말이죠. 우인 아니고서야 무엇을 얼마나 바칠지조차 알려주지 않는 자와 거래하기는 쉽지 않답니다. ……하지만 전 그리 합리적인 인간이 아니라 흥미는 동하네요. 그렇다면 대가는 언제쯤 거둘 생각이신가요?"
이 자들은 이 핏줄에 원한이 있었지. 떨치지 못할 운명이나 원죄 같은 것들에 유감이 없어 잠시 잊고 있었다. 유현은 여전히 치미라는 자가 무얼 하든 그가 하는 행동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다. 제 팔 쳐다보는 것도─저 작자는 팔 뜯어먹길 좋아하는 입맛인가?─, 적의 담긴 태도로 쿡쿡 찔러 와도, 그저 가만히.
"정 원망스럽다면 제 신벌 받은 꼴이라도 구경감 삼아 보시지요. 이래 뵈어도 나름대로는 충분히 고한에 시달리는 중이라서요. 당신들 비범한 존재이며 제 집안에 어떤 원한 있을지 누이 되시는 분께 들어 짐작하는데, 제 꼬락서니 당신들에겐 잘된 일 아닌가요? 아마 저는 죽음보단 생이 더욱 괴로울 테지만… 당신 가학성향이 심한 편이라면야 수긍은 하겠습니다."
유현은 일순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넋을 잃었다. 아, 저것조차 탐이 난다. 저는 결코 갖지 못할 악의를, 저것조차도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지독하게 미워하고 원대怨懟하도록 하는 한이란 무엇인가? 세상에서 어느 것 하나 나와 같지 않다. 이 비좁은 땅끝 빽빽하게 메운 인간들 천지라도 한평생 내가 그들 중 하나라 느낀 적 없다. 분명 저와 같은 가죽 쓰고 같은 말을 내뱉고 있건만 통할 수 없다는 사실 지독하게 괴롭다. 차라리 내 진정한 무념에 닿았더라면 번민 역시 없었을 터인데. 혹은 차라리, 저것들처럼 처음부터 인간 아닌 존재였더라면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가정도 찰나간 스쳐 간다. 하지만 저것들끼리도 누이니 아우니 하는 우애 지닌 모양이니 나는 또 그것조차 되지 못함만 확연해졌다. 나는 필시 이물도 인간도 되지 못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 처음부터 온전하게 살았던 적 없는데 영혼 떼어낸들 쪼갠들 중하기는 할까. 무심한 시선 줄곧 치미를 향한다. 느릿이 눈 내리감긴다. 눈꺼풀 재차 들어올려지고, 한숨 같은 긴 호흡과 함께 뱉어낸 말은.
대화의 흐름은 잠시 침울해지거나 어색할지언정 언성을 높이는 등의 큰 불꽃은 튀지 않는다. 이 정도만 하여도 대단히 온건한 축에 드니, 머리를 굴리지 아니하고, 그 어떤 것도 가늠하지 아니하는 이런 편한 분위기에서 대화하는 것이 얼마 만이더라. 약관을 일 년 남겨두는 세월 동안, 학당 내외를 통틀어 손에 꼽을 것이다. 새삼 불가살과의 만남이 떠올랐다. 그때도 편안하긴 했다마는 결국 서로의 이득을 위해 머리를 굴리는 것이 은연중에 느껴졌지 않던가. 그 뒤로는.
"네 모를 리가 없지."
누구보다 가까이에 있었으니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일단 손에 쥐어 만져본 뒤에야 무엇이구나 얘기하는 버릇 있다는 것과 걸을 적 낮은 휘파람 불었다는 것도.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가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겪지 않았으니 온전히 공감할 수 없겠지만 정서적인 공감이 있지 않은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처지를 이해한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에게 처지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자신이 당신 눈에 보이는 대로 받아들여졌으면.
"미안할 필요가 어디 있겠니."
그러니, 그것만으로 족하다. 더 화내지 않고, 더 감정 드러내지 않고, 더 외면하지도 않는다. 무게 없는 사과조차 귀한 상황에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잔을 들자 잠시간의 정적이 인다. 이마저도 한때다. 금빛 술은 자신을 담아낸 벽에 부딪쳐 맑은 소리를 내더니 가벼운 파도처럼 일렁였고, 아회는 여전히 말간 미소를 입가에 잔잔히도 띠우고 있었다.
"……하하, 그렇긴 하구나. 그랬지."
이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숨기려 들었겠지. 다시금 불타고 벽을 세우며 밀어냈으리라. 이리 터놓고 얘기할 수 있어 마음이 가벼웠던 것이로구나. 밤에 뜬 달 한 잔 마시고자 입에 담으니, 역시 하늘에 있는 것은 함부로 탐내서는 안 되는 모양이다.
"콜록!"
잔을 비우기가 무섭게 아회는 소매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독하다! 아니, 독한 것보다 더했다. 삼킬 적엔 술 자체의 향취도 느낄 수 없을 만치 비강에 발효된 내음 훅 끼쳐와 쓰다 못해 맵고, 목구멍으로 넘어갈 적엔 자신이 어디에 있노라 실시간으로 그 위치를 알려주는 화끈거리는 느낌에 정신이 아찔했다. 목에 걸린 것만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어 입을 가린 소매를 차마 내릴 수가 없고 눈은 순간의 기침 탓에 눈물 고인다. 속내에서 한바탕 소란이 인 뒤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회는 금빛 술이 품었던 향이 비강에 고여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첫 술이다마는 참으로 좋은 술이로구나. 독한 것만 빼면.
"……."
겨우 소매를 입가에서 떼어낸 아회는 눈을 슬쩍 굴려 당신을 새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어떻게 저리 멀쩡하지? 자신은 지금 속내에서 화끈하게 퍼지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데 당신은 몇 번 헛기침만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새삼 놀라워 아무런 말도 못 하다 내밀어진 다과에 앓는 소리 냈다.
"황새 쫓다 가랑이 찢겼구나……."
그렇다고 가랑이 찢어진 뱁새가 모이 안 먹는다는 건 아니다. 강정을 입에 물고 잠시 그대로 달달한 조청 겉면 혀 위에서 녹을 때까지 기다리다 입술 움직여 파삭파삭 입속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손 슬쩍 들어 당신 앞에 다과 놓아준다. 곶감이다. 호랑이는 무서워한다지만 아회는 잘도 씹었던 곶감. 빈속에 연거푸 마셨던 잔과 더불어 갑작스럽게 찾아온 독한 술의 습격, 그리고 무방비한 몸에 덜컥 들이닥친 충격까지.
"네 내게 주었잖니, 너도 하나 먹으렴."
주취로 가는 빠른 지름길 세 박자를 골고루 갖춰 그야말로 적기이니 나긋한 어조, 상냥한 미소, 손길과 함께 시작되고 말았다. 이 희멀건 존재, 슬슬 무섭게 오르기 시작하는 취기와 제정신 사이에서 혈투를 벌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