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좋은 날이었든 오늘이 나쁜 날이든. 제가 아직 학당의 학생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마도 앞으로 1년은 그대로- 일 것이니. 그러니 학생답게 수업을 들으러 가야했다. 그런 약속이었으니.
단추 두엇 푸른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 위로 붉은 두루마기 걸치고 설렁설렁 걸어나온다. 곰방대 대신 붉은 종이담배 하나 물고 피우며 느긋하게 걸어오는데. 묘하게 피로해보인다. 평소와 달리 복도 가장자리를 걷는 것도 꼭 주변과의 접촉 줄이려 하는 것 같달까. 차림은 그대로이나 차분한 걸음걸이로 수업 목록 적힌 곳으로 온다. 그 앞에서 목록 한 번 슥 훑는다.
나른한 붉은 눈이 불을 다루는 법에서 멈추었다. 그곳으로 갈까 고민하듯이. 하지만 슥 굴러 체력단련으로 향했다. 새로운 강사 초빙되었다는 그곳에.
이 시기에 새로운 강사라.
머릿속에 이전날 보았던 이름 모를 남자 떠올랐다. 십중팔구 그 남자일 것이다. 아마도 그의 형제이자 신수인 것이 분명한-
후-
담배 연기 길게 내뱉었다. 거의 태운 담배꽁초 손에 쥐자 작은 불씨 호록 피어올라 태운다. 그렇게 타버린 재 바람결에 날려보고. 그 방향으로 향했다. 늘상 체력단련 하던 그 곳으로.
수업이 이뤄질 곳으로 가니 아니나다를까 그 남자가 있었다. 목록에서 이미 예상을 했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다. 그 남자가 저를 보고 미소짓길래 똑같이 미소를 지으며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지 않나. 통할지 모르지만.
학생들 모인 쪽으로 가니 현진 도사가 초록색 끈을 주었다. 별 도술은 없는 그냥 끈 같았다. 손에 쥐고 팔랑팔랑 흔들고 있으니 오늘 수업 내용이 설명되었다. 간단하게 술래잡기였다. 무대는 저 산. 제한시간은 세 시간. 현진 도사와 저 남자가 쫓으러 오는 건 일각 후란다. 어디선가 많이 겪어본 상황에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찡그리듯 피식 했다.
이거 완전 역이 된 상황이잖아. 참 나. 제가 쫓기는 쪽이라니.
"보상보다 아프기 싫으니 잡히면 안 되겠으이."
그리 중얼거리곤 도술 외에 체술로 겨룰 것이란 말에 언제나처럼 허리춤에 걸린 역린 슬쩍 만졌다. 저 말은 이것도 허용한다는 의미겠지. 그럼 조금 나을 지도 모르겠군. 초록색 끈은 어떻게 할까 하다가 왼쪽 손목에 묶었다. 그리고 신호 떨어지자마자 산 향해 달려나갔다.
무대가 산인 점은 조금 다행이랄까. 익숙하니까. 그것도 밤 아닌 낮이라면 더더욱. 나무와 수풀들 사이를 재주 좋게 뛰고 달려 지나치며 제법 깊숙히까지 들어간다. 주변으로 퍼진 다른 학생들 소리도 들리지 않을 곳까지 들어가 크게 자란 나무등치에 슬그머니 몸 낮추고 기척 숨겨보았다.
아마 자신을 묶고 있는 얄궂은 운명의 끈이 있다면 그 색은 필시 회색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칙칙한 잿더미 속에서 발견될 수조차 없을 만큼 얼룩덜룩한 여러 색으로 물들어 있겠지……. 걷잡을 수 없는 악인으로 태어났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 그 삶을 긍정해야만 하는 자신에 대해 어떻게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지어진 표정을 갈무리하려 애썼으나 쉬이 되질 않는다. 타인에게 이야기하며 다시금 마주하게 된 자신의 삶 때문이다. 이런 삶을 바라는 자는 누구도 없다. 누가 악인으로 남겨지고 죽기를 바라겠는가? 미치지 않고서야 가능할 리가 없다. 하물며 재수도 없게 그런 운명을 타고나버렸으며 자신은 지금 반쯤 체념하고 뒤틀릴 조짐이 보인다. 도망쳐도 같은 삶을 반복할 끝없는 손아귀에 놓였기에 부정적인 생각이 쉬이 떠나질 않는다. 사감님의 말씀대로 벗어날 수 있을까.
"……죽지 않는, 인간 말입니까."
툭 뱉는 말은 실로 터무니없다. 요괴에게 목이 베이거나, 저주에 당해도 죽지 않고 신벌 외엔 죽지도, 늙지도 않는 인간이 있다면 어떻게 받아들이겠냐고? 영원한 북부와도 같은 사람을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면 대답은 한결같으리라. 그 또한 인간이라고. 자신의 형제가 인간이길 포기한 듯한 행동을 하고 다녀도 인간이라고 믿고 살지 않던가. 자신을 인간이라고 보지 않던가…….
"죽음 또한 정해진 순리이니, 손아귀에 영영 쥐여버린 자겠지요. 축복도, 저주도 아닌 삶에 놓여 남모를 불안에 떠는 존재라고 믿고…… 다른 존재가 아닌 가여운 인간으로 볼 터입니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한들, 신께서 언제라도 질린다면 그 명을 거두어갈 테니 어찌 하루하루가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반 푼의 눈과 같다. 언제라도 보이지 않게 되어버릴지 모르는 불안감에 휩싸여 늘 예비하고 살지 않은가. 괜찮다고 생각하면서도 두려움에 젖는다. 이마저도 사라졌을 때의 막막함을 떠올리고, 지금까지 해온 것이 있으나 그 노력마저 수포가 될까 들이닥칠 운명을 걱정하게 된다. 아마 영생의 존재도 그렇지 않을까 하였으나, 그것이 당신의 이야기임을 은연중에 깨달았을 때 아회는 입을 다물고 시선을 깔았다. "…실로 무례한 발언이었군요." 그리 사과하며, 무사히 졸업하길 바란단 말에 다물린 입술을 천천히 깨물었다. 졸업이 고대가 된다. "예, 못 들은 척하겠습니다." 운명이 다시금 굴러갈 터이니. ……다른 사감들은 아닌가 보다. 그럴 법도 하지. 하 사감에 대해 생각하던 아회는 천천히 깨물던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영 사감의 이야기와 가진 감정에 동의한다는 표현이었다. 객기로운 인간으로 보라지. 암만 신수가 자신을 학생이라고 생각하며 봐준다고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심일지, 그런 생각이 스쳤다. 이는 실로 모순이자 발악이라. "……아, 추워지는, 군요."
기존의 대화와 달리 떨떠름한 어조였다. 자신이 북부사람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이 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 애초에 학당에서 겨울만 되면 두루마기를 팔에 걸치듯 입고 얼음이 동동 뜬 커피를 홀더도 없이 손에 쥐고 다니는 자였으니 당연할 법도 한가. 잠시 시선을 돌린 아회는 떠나기 전 할 이야기가 있다는 듯 제 어미의 시신을 한참이고 눈에 담더니 이내 눈 지그시 내리 감으며 당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좋은 꿈을 꾸었다. 눈을 뜬 뒤 휘발되더라도 실로 아름다운 꿈이었노라 희미한 잔재를 더듬었다. 어쩌면 끔찍한 꿈일지도 모른다. 늘 미적지근하게 살며 그 중간의 온도에서 살았으니 옳고 그름을 구분짓고자 하는 감각이 무뎌진 느낌이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찌하랴, 중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수업이 있는 날이니.
"……목화님, 별사탕과 차가운 물을 두었습니다. 끼니는 거르지 마셔야 하고, 피곤하시다면 기다리지 말고 푹 주무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조그마한 털뭉치에게 이것저것 일러주고는 머리를 틀어올린다. 붓으로 적당히 머리를 틀면 오늘의 수업이 무엇인지 적당히 알 수 있으리라. 한복이라 한들 하나하나 갖춰입던 그가 저고리와 움직임이 편한 사폭바지를 입고, 두루마기를 흘러내릴 듯 대충 걸치는 일은 흔치 않았으니. 체력 단련을 위함이다. 시야를 보조하기 위한 지팡이를 짚고, 그나마 반 푼의 눈을 한 푼의 가치로 만들어주는 단안경까지 쓰고 나면 목화를 다시금 한 번 보며 혹시라도 이 조그마한 털뭉치 따라오지 않을까 감시하듯 쭈욱 시선 가져가다 서서히 뒤로 물러나 자리를 떴다. 아무래도 저번 춘 사감 이후로 데려간 이후로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
춘 사감 이후로. 그때 아프다 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나.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발걸음이 옮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