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길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무 씨 집안이라 하면 제사장 집안 사람들은 귀기 무 씨를 자연스럽게 떠올렸고, 그 뒤에 나오는 말은 당연스럽게도 북부였으니. 무 씨 성 가진 이후로 평생 따라다닐 꼬리표를 부정해봤자 큰 의미는 없을 테니, 익숙하게 수긍하기라도 했는지 제법 차분히 답했다. 다행스럽게도 당신 또한 어떠한 편견은 없어 보였으니, 아회는 납득하듯 고개 끄덕일 적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손님이라면…."
그러고 보니 하 사감이 저번에 와서는 안 될 것이 왔노라 했었던가, 먹지 말라 핀잔 주던 목소리도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것이 손님과 동일인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마는, 동일한 존재라면 귀찮을 것이 분명했다. 꽃다발을 다시금 고쳐 안던 아회는 시선이 느껴지자 당신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할 말이 있는지 기다려주듯 고요하게 침묵하고는, 그 침묵을 조금 더 길게 끈다. 빨리 가야 하냐면…….
"그렇다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어떠한 방법인지요?"
빨리 간다면 좋겠지. 가는 길 더위에 지쳐 쓰러지거나,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변해서 돌아다니면 호환이라며 난동 부릴 사람들, 혹은 도중에 꽃다발을 망치는 등 여럿 변수가 있으니 그런 것을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라면 당연히 환영이었다마는. 잠시 고개 끄덕이며 입 고이 다물다가도 골몰하던 것을 툭 뱉어버리기로 했다.
"……만일 동행하신다면, 같이 가보지 않겠습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래, 오늘의 자신은 이리도 제멋대로구나. 스스로의 입으로 뱉어놓고도 새삼 우스웠는지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우려다 사라진다. 하지만 언제까지 제멋대로에, 충동적이지 않은 날만 지새우며 살아오랴. 자신의 속사정을 알게 되는 사람이 가까운 존재가 아닌 생뚱맞은 사람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누군지 연도 별로 쌓이지 않은 자에게 속을 드러낸다니, 실로 불경한 생각이지만 하 사감과의 대화로 비롯해 결심이 선 이후로 생겨버린 자그마한 반항심은 가끔의 일탈은 필요한 법이라 자신을 은근슬쩍 종용하고 있었다.
"정 바쁘시다면, 거기까지만 데려다 주셔도 충분히 차고 넘칩디다. 돌아오는 것은 혼자 할 수도 있고……."
아회는 말꼬리를 흐리곤 입을 꾹 닫았다. 어차피 충동적으로 뱉은 것이니 큰 기대를 걸지 않았기 때문이이라.
자잘하게 보이는 반응들이 언뜻 인간 같으면서도 순간 순간 아니구나 싶을 때가 교차한다. 그 때마다 깨닫는다. 인간의 형상 하고 있어도 인간 아니구나. 생각하는 근원 다르니 보는 것도 하는 말도 다르구나. 그리 깨달으면서도 관심이 멀어졌던 적은 없었던 듯 하다. 보이지 않아도 종종 생각하게 되고 가장 멍할 때에 가장 먼저 떠올리곤 했다. 한 번 품은 마음 쉬이 떨치지 못 하는 것. 저는 본디 그런 아이였다. 어릴 적부터. 여태 한결같이.
가벼운 손장난에 그가 뭐하냐고 하니 슬그머니 손 치우고 아무 것도 안 한 척 했다. 딱히 숨길 짓을 한 건 아니지만. 삿된 마음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으니. 시침 뚝 떼고 들리는 얘기에 고개 끄덕이거나 그러냐는 듯 눈 깜빡였다.
"처음 들어서 그래요. 그런 얘기. 수업에서 그런 것까지 가르쳐주진 않으니까요."
아니면 들었는데 졸아서 까먹었거나 한 걸 지도 모르지만. 제 기억에 없으니 안 배운 셈 치자.
"없는 사람 흉내는 뭐하러 낸담. ...혹시 그 사람도 사감인가?"
생각이 무심코 흘러나온 듯 혼잣말 중얼거리다가 머리카락 쓸어주는 손길에 양 볼 아주 희미하게 복숭아빛으로 물든다. 그 잠깐 조용해지기도 하고. 입 다문 김에 하 사감의 대답 들었다. 그가 신수이기에 제가 원하는 걸 말 해주지 않으면 잘 모른단다. 그야 그렇겠지만. 당연하겠지만.
"그...런 거를 내 입으로 말해달라니. 놀리는게 아니라서 더 못됐네요..."
뭘 원하는지나 하고 싶은 것을 직접 말하라니. 그랬다간 아까보다 더 부끄러워져서 당장 뛰쳐나가 방에 틀어박혀 사흘은 안 나올 지도 모른다. 와. 상상 만으로도 숨고 싶어라. 그러니 그건 잠시 뒤로 하고 다른 궁금한 것이나 대답해주기로 했다. 이건 덜 부끄러우니까.
"어쩌다 신경 쓰게 된 건지는- 저번에 얘기하긴 했잖아요. 역린 얻고부터 관심이 갔다고. 그렇긴 해요. 그 전까지는 그냥 귀찮은 사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당신이 뭐든 누구든 관심 전혀 없었어요. 헌데 그 날. 미쳐 날뛰는 당신 제압하러 갔을 때. 그 때 처음으로 당신을 제대로 봤어요. 정면으로 또렷하게. 눈 뒤집혀 죽이려 드는 모습이나 전혀 다른 두 머리 달고 인간 아닌 형상 한 모습이나. 이윽고 역린 빼앗기고 제압 당해 다시 이 모습으로 돌아와 무력하게 보이는 것까지. 쭉 보면서 모종의 동질감을 느꼈죠. 속에 그리 날뛰는 성정 품었으나 드러내어선 안 되는 것 같았거든."
조곤조곤 얘기 도중 이것도 역시 좀 부끄러웠는지 제 손으로 얼굴 감쌌다. 두어 번 문지르고 손 내렸을 적. 명백히 발그레해진 얼굴 있었다.
"동질감 다음은 호기심이었어요. 대체 당신은 무어길래 그런 모습 하고 여기서 성질도 억누른 채 이러고 있나. 올 때마다 늘 이것저것 물어봤었잖아요. 정말로 그냥 그것들이 궁금했을 뿐이었고 그리 건방지게 굴었던 것들도 어디까지 받아주나 하는 건방진 생각일 뿐이었어요. 모처럼의 기회니까 실컷 놀아나 보자. 보다시피 내가 몸집이 좀 크잖아요? 그래서 늘 안기만 했지 당신처럼 안길 수 있는 사람이 없기도 했거든요. 이 참에 나도 좀 앵겨보고 그러자. 그런데 매번 다 받아줬잖아요. 내가 기억 없을 때도. 그냥 역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도 마음이 안 생길 수가 없었어요. 몇 번이고 인간은 싫다느니 하는 소리 듣고 선 긋듯이 구는 것 봐도. 그래도 내치지 않으니까 좋았어. 어색하게나마 안아주고 토닥여주는 것도. 그저 좋더라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꿰여도 단단히 꿰였더란다. 스스로도 제 감정이 무서워 한 번 감췄어야 했을 만큼. 결국 감춘 것 부서져 드러나버려 지금에 이르렀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대강 그 즈음까지 얘기하고 온화 잠시 입 다물었다. 작게 달싹이는게 할 말 남은 듯 했으나 쉬이 못 하겠는 건지. 얼굴만 슬슬 붉어지더니 조금 지나서야 겨우 입 열어 말했다.
"그- 내가- 그 동안은 망나니처럼 행동하고 다니긴 했어도. 이런 마음 갖고 준 건 처음이에요. 사실 지금도 감정에 휩쓸릴까 무서운데 그것도 참아볼 만큼 당신이 좋은 거니까... 아무튼! 아무튼... 그... 내가 원하는게 뭐냐면. 인간들이 하는 애정 표현. 같은 거... 해줬으면 해요.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거. 말이랑 행동으로 보여달라구... 요..."
구체적으로 무슨 말과 행동을 해달라고는 못 하겠는지 점점 목소리 기어들어가더니 다시 얼굴 팍 가려버렸다. 가린 손 안에서 으아아아 하고 작게 앓는 소리도 났다. 달리 부르거나 하지 않으면 또 가린 채 얼굴 안 보여줄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다. 신수들에 대한 것은 도깨비들이나 알고 있다던가. 자식인 신수조차 창제신의 성별은 모른다던가. 그런데 신에게 성별이란 개념이 있긴 한가? 애매한 신수도 있다는 걸 보면 별로 의미 안 두는 것 같은데.
그리고 또. 그가 흉내내는 자 역시 사감이며 천공섬의 주민이 아닌 그 바깥- 영 사감이 오는 곳이라던가. 도술 아닌 마법을 쓴다는 거긴 대체 어떤 곳일지. 영 사감과 동향이라면 그 묘한 지팡이를 쓰는 이라는 건가. 조금 궁금할 지도.
들어도 여전히 내용 아리송한 것. 몰랐다가 새로이 알게 된 것. 여러 얘기를 했지만 그 뒤에 얘기로 다 아무래도 좋을 것이 되어버렸다. 어쩌다 그를 신경 쓰게 되었나부터 쭈뼛쭈뼛 털어놓은 제 마음에 부끄러워졌음이요 갑작스레 안아오는 그의 팔에 놀람 더해져버렸으니 말이다. 갑자기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강한 팔 힘에 크게 두근거린 것도 있었다. 지금껏 누구도 저를 이리 안아준 적 없었으니. 그런 복잡다망한 기분에 휩싸여 얼굴 가린 채 다시 앓는 소리 내었다. 아으아아아...
"그. 으. 아니 잠깐만요..."
여즉 얼굴 가린 채 은근히 바뀐 그의 목소리와 직설적인 말들을 듣고만 있자니 심장은 미친듯이 뛰지 귀는 간지러워 죽겠지- 저를 취한다던가 못 나가게 하고 싶다던가 들었을 때는 정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머릿속은 또 어찌나 시끄러워지던지.
으 아 심장 난리치는 것 들키기 싫은데 아 그렇지만 이 정도로 안겼으면 분명히 들켰겠지 아니 들키고 자시고 다 알고 있는 거 아냐? 여의주 있으니까? 앗 그러면 더 부끄러워져서 그 그 얼굴 못 내놓게 되어버려?!
"어엄마아아..."
얼마나 안팍으로 정신이 없었으면 그런 앓는 소리까지 흘러나왔다. 엄마 딸래미 큰일나요! 어떡해!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 까악 꺄악 질러대다가. 제 이름 부르는 목소리에 하으- 하고 이젠 거의 울 듯한 소리가 났다. 이... 이... 정도를 모르는 신수...!
"...못 됐어 정말..."
아무리 부끄러워도 그의 채근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얼굴 꽁꽁 감추고 있던 손 천천히 움직여 아래로 내렸다.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 이마부터 턱 끝까지 빈틈없이 붉어진데다 뒷머리 덮인 목덜미도 설핏 붉은 듯 싶다. 반쯤 내리다 멈춰서 머뭇거렸지만 곧 완전히 손 거두고 그 말로 못 할 표정 지은 얼굴 드러내었다. 얼굴 내놓고도 눈은 저 아래인가 옆인가 애먼 곳 보고 있었으나 두어 번 깜빡깜빡 하더니 살며시 하 사감 얼굴 향했다. 인간의 것 아닌 눈동자 보고 살짝 눈 흔들렸지만 다시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며 중얼거렸다.
"나. 그... 아프게 하면. 당분간 근처에 얼씬도 안 할... 거에요. 진짜. 그럴 거야..."
다시 얼굴 가리고픈 손으로 하 사감의 옷 꾹 쥐고서 입술 가벼이 깨물고 하 사감 바라보았다. 인간 같지 않은 그 눈을. 곧게 마주하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