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에 화를 낼까. 어이없어 하며 쫓아낼까. 그도 아니면. 이것저것 떠오르는대로 머릿속에 주워넘기기를 잠깐. 곧 하 사감의 반응 볼 수 있었다. 단번에 인간의 것으로 돌아온 눈과 당황한 아니 황당한? 목소리였다. 순간 조금 웃겨서 킥킥 웃어버렸다.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일단 크게 당황 시키는 건 성공한 거 같으니. 어찌 재밌지 않을까. 그 재미에 실실 웃다가 이어진 말에 고개 갸우뚱 기울였다.
안 되면 안 되지 공물로 안 되는 건 뭐람. 또 또 놀리네.
하 사감이 손짓했을 때는 얌전히 그 앞까지 갔지만 무릎 두드릴 때는 가만히 서서 빤히 보기만 했다. 그러니까 대답은? 된다 안 된다도 말 안 해주고 대뜸 모를 소리나 하는 것 보라. 이래뵈도 저 역시 적룡은 적룡이라 오래 못 참는데 말이다. 그냥 빨리 대답이나 해주지. 뭘 아네 마네 하길래 대뜸 불퉁한 소리 툭 내뱉었다.
"그러니까 싫으면 싫다고 곧장 얘기를 하던가! 뭘 그리 빙빙 둘러대길 둘러대!"
평소라면 그 한 마디에서 끝났겠지만- 이미 한 번 터진 전적이 있어서일까. 욱 하고 치솟은 말 참지 못 하고 냅다 질러버렸다.
"공물로 되느니 안 되느니 내가 무얼 알어! 무게니 뭐니 내 알 바인가! 그래 나 꼬맹이요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한 인간 나부랭이올시다. 뭐를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음서 이러니 저러니 딴 말만 많어! 내가- 내가 이게 맞나 고민하고 안 하던 짓까지 하고서야 이리 들고 온 건데. ...하. 이러려고 온게 아닌데."
짜증난다. 동시에 후련하다. 아무래도 좋으니 이제 제대로 된 대답이나 들었으면 싶다. 그리고 도시락 던져주고 가버릴테다. 숨 한 번 고르고 재차 쏘아붙였다.
"그래서 대답은? 설명할 거 있으면 것도 해보시던가."
고개 삐딱하게 기울이고서 제 앞의 하 사감 흘겨보았다. 쓸데없는 말 말고 딱 할 말만 하란 듯.
그가 재차 앉으라고 해도 두 다리 빳빳하게 세우고 서 있었다. 말은 다 쏟았어도 아직 속의 화 조금 남은 탓이었다. 그리고 조금은 예상하고 있기도 했다.
어차피 안 된다 하겠지. 저는 알지도 모를 소리 구구절절 해가며 안 된다는 말 빙빙 돌려 하겠지. 뻔해. 고작 인간 나부랭이 하는 소리 무얼 진지하게 들어주겠어. 그것도 불량품인 저인데. 제 까짓게 무얼 바라.
그러니 더 꾿꾿하게 버텨야 했다. 또 무너지지 않고 제 발로 걸어나가려면 정신 꾹 붙들어야 했다. 무너져도 방에 가서 무너질 테다. 이번이 마지막. 정말 마지막이다. 그리 다짐한 것 무색하게 하 사감 말했다. 괴롭게 할 거니 살육에 눈이 돌아갈 거니 할 때는 거 보라며 입술 지그시 깨물었지만 작은 중얼거림에 귀가 쫑긋했다. 지금 뭐라고- 되묻기도 전에 대답 들었다. 앞서 했던 말 괜찮다면 그래도 괜찮으면 반려 되겠단다. 머리 새하얘졌다. 고개 돌린 하 사감 멍하니 보다가 도시락 놓칠 뻔 할 정도로.
"아. 아니. 뭐야 그게. 인간 싫다며. 그렇게 질색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어?"
되려 제가 어이없어졌다. 싫다매 인간! 뭔데? 갑자기 태도 바꾸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아. 아- 망할...
"...쳇."
다시 재촉하는 말에 미간 찡그리고 혀 찼다. 휙 돌아 탁자로 뚜벅뚜벅 걸어가 가운데에 도시락 턱 하니 올려놓고 역린도 그 옆에 두고서 다시 걸어와 하 사감 앞에 섰다. 곧장 앉지 않고 또다시 망설였다. 지금이라도 물러서면 다 없던 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중한게 뭔지 모르지만 받기 전이면 늦지 않을 것인데. 아. 문득 눈 앞이 흐려졌다. 동시에 눈가도 뜨끈해지는게 느껴져 두루마기 소매로 쓱 문지르곤. 크게 숨 골랐다. 그런 다음 하 사감 무릎에- 앉았다. 꽤나 조심스럽게 앉아 중얼댔다.
하 사감 말하는게 무언지 저도 알지만 괜히 그리 툴툴댔다. 다시 일어나버릴까보다. 그럴 마음 전혀 없으면서 또 괜히 그런 생각 해보고. 한숨 쉬는 것 보곤 흘기듯 눈 가늘게 좁혔다 떴다. 그럼에도 얌전히 앉아있었지만은.
그래서 뭘 주려나 했는데 대뜸 넘겨줄테니 삼키란다. 넘겨? 삼켜? 질문 해야 하는 입은 가까이 온 하 사감에 의해 가려졌다. 정확히는 하 사감의 입이었다. 난데없는 입맞춤 하며 입에서 입으로 건너온 것 저도 모르게 꿀꺽 삼켰다. 동그란 구슬 같은 것 두 개였는데. 구슬? 심장? 연이은 의문의 상황에 순간 멍한 얼굴로 하 사감 보니 웃고 있었다. 그 얼굴 보자 저도 모르게 얼굴 확 붉어져 고개 홱 돌리고 종알댔다.
"그- 그런 거 이렇게 막 주고 그래도 되는 거요?! 역린 뺏기더니 이제 그냥 막 주고 그러네. 뭔지 말이나 해줘야지. 아 긴장한 거 아니거든요!"
결국은 또 투덜대며 떨리던 손에 힘 꾹 주었다. 떨림은 그걸로 막았는데 얼굴 홧홧한 건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보이지 않게 필사적으로 돌리고 있는 것 고작이었다. 살면서 상황이 예상치 못 한 방향으로 흐른 적은 많지만 이 정도로 저를 당혹스럽게 만든 적은 없었다! 으아아아.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 지르고 눈만 힐끔 굴려 하 사감 보았다. 어쩌다 꿰였냐느니 중얼대길래 질세라 저도 대꾸했다.
"어쩌다 꿰이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네요! 이왕 저지른 거. 고백하고 차이고 깔끔히 정리할랬더니 괜히 미련 철철 넘치게 해..."
흥.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말하다가 가볍게 숨 내쉬며 눈도 돌려버린다. 심경이 복잡했지만 돌이키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었다. 엎질러진 물이라면 수습이라도 잘 해야지. 히유. 한숨인지 뭔지 모를 소리 작게 내고. 뭔가 원하듯 하 사감의 옷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래서 방금 준 거 뭐에요? 내가 가지고 있으면 뭐 좋나? 수명이 늘어난다던지."
냉정히 생각해보면 가장 큰 문제였다. 수명. 안 그래도 짧은 수명인데 저는 단명할 팔자도 있었다. 그 구슬이 뭔지 몰라도 수명이나 늘려줬음 좋겠다. 아예 하 사감과 비슷해지면 좋을 텐데. 현실적인 생각 조금 했더니 얼굴 금방 식을 듯 했다. 덕분에 무슨 얘기든 흘리지 않고 들을 수 있을 듯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