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려나.. 응. 어떻게든 이겨서 내가 그 사람들보다 위라고 증명하고 싶은 것.. 으음- 니오는 머리가 좋지 않아서 사실은 내가 뭘 원하는지도 잘 모를지도.. "
문자 그대로였다. 이것저것 원하는 것이라던가 머릿속에 생각나는 것은 잔뜩 있었다. 문제는 그 중에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누구한테 말했던 것을 기억해보아도, 일기장에 적어놓은 것을 보더라도, 복잡하기만한 자신의 머릿속의 생각을 들여다보더라도 항상 여러가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떠도는 기분이었다. 쿠즈노하를 불바다로 만들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저와 다르다는 이유로, 다 하는 것을 못 한다는 이유로 두려워하며 괴물이라고 부르고 뒤에서 수근거리며 거리를 두었던 가족을 용서할 수 없다. 그렇기에 돌아간다면 쿠즈노하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리고 마침내 복수를 이룰 것이다. 복수의 맛이 쓰고도 달콤하다고들 하지만 그 맛을 직접 본다면 그저 너무 달아서 혀가 아릴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잿더미가 되어버린 쿠즈노하를 보고싶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쿠즈노하를 불바다로 만들어 재와 먼지만 날리게 만들겠다는 것은 결국 돌아갈 장소를 없애버리겠다는 이야기였고 가족으로서 사랑하고 아직은 이 짧은 인생에서 만났던 사람중에 유일하게, 그리고 가장 많이 사랑해준 둘째 언니를 같이 없애버리겠다는 이야기였으며 그 둘째 언니의 보금자리를 불살라버리겠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이 기저 깊은 곳에는 분명히 자리하고 있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라던가 그들이 저를 같은 가족으로, 둘째 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귀여운 막내딸로 봐주었으면 하는 욕심때문이었다.
" .... 거 *같네, 씨*. "
그런 생각들이 또 한 번 머릿속을 헤집어놓자 표정이 구겨졌다. 인상이 찌푸려지고 하기 싫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하자 갑자기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져 들릴듯 들리지 않을 듯 욕을 읊조리고는 주먹을 몇 차례인가 쥐었다 폈다. 차라리 이럴 때는 누가 시비를 걸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차라리 먼저 시비를 걸어줘서 좋을대로 패주고 좋을대로 얻어맞아서 이 어쩌지 못하게 끓어오르는 마음을 해소하고 싶은 생각이 컸다. 그래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모처럼 꿈같은 시간이고 모처럼 깨기 싫은 시간이니까. 니오는 '씨*, 짜증나.' 하고 한 마디 더 욕을 읊조리고는 구긴 인상으로 앞에 뭐가 있기라도 한 듯 째려보며 가현의 팔을 감아 끌어안고 잔뜩 뚱한 얼굴로 있었다. 뒤이어 힘내보겠다며 옷을 찾으러 가자 '응, 니오 기다릴게.' 하고 한 차례 웃어보였다.
굳이 기분 나쁜 생각을 하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모처럼의 좋은 시간이니까. 꿈같은 시간이니까.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되니까. 찔릴 걱정도 없으니까. 모두가 부러워할 시간이니까. 둘째 언니처럼 챙겨주니까. 지금은 나만을 바라봐주니까.
" 아! 귀여워! 옷 귀여워 언니야! 으응- 입어볼까? 지금 입어보면 되려나? "
지금 입고있는 것이랑 비슷하게 색은 검은색과 흰색 뿐인 것. 치마가 조금 짧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니오는 옷을 받아들고 입어볼게~ 하는 말과 함께 점원을 불러 탈의실의 위치를 묻고 두 말 없이 탈의실로 들어갔다. 먼저 입고 온 옷을 벗어서 예쁘게 정리해두고 새로 가져온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선 니오는 뭔가 달라진 느낌이 들어 '오...' 하고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 언니야, 역시 패션센스 좋네. 이거 이거대로 좋아~! 조금 더 뭐랄까.. 무슨 느낌이랄까... "
어때? 어울려? 하고 말하듯이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돈 니오는 거울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는 이게 어떤 느낌인지를 알아보려고 했다. 저번에 입고 온 옷이 제법 나풀나풀거리고 하늘하늘해서 행동이 조금 조심스러워 지는 느낌이라던가, 보는 사람의 보호심리를 자극하려는 의도가 다분해보이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의 것은, 어떤 느낌이었냐면.
" 주머니에 얼마 들었어? 다 꺼내면 봐줄게. 아니면... 아니면, 나 여기서 굴러버릴거야? 같은 느낌이지? 응! 귀여워! 좋아! 언니야 패션센스 좋아! "
"괜찮아~ 네 머리가 나쁜게 아냐. 아직은 한참 갈피를 잡아가야 할 나이니까,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가면 돼. 나중에 네 방향성이 확고해지게 될 날이 분명 찾아올테니까~"
언제나 사람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기 마련이다. 나아갈 방향을 잡는 것에는 자신의 주관적인 영향이 강하게 들어가야 하는데, 이 여학생 나이정도라면 아직 한참 헤맬 시기였을 것이다. 머리가 좋지 않아 무얼 원하는지 모른다고는 하지만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그 어느쪽도 놓아버릴수 없는 것이었기에 선택을 망설일 뿐이다. 언젠가 자신에게 더 이득이 될 선택지를 택하고 덜 후회하는 방향을 고를수 있게 될 날이 온다면 분명 지금 이야기한것과는 다르게 스스로 한 걸음씩 나아갈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었으며- 저와는 다르게 확실한 애정을 받을 기회가 많은 여학생이었으니. 그렇기에 더더욱 자신만 그 애정을 주고 싶었던 것은 독하디 독한 집착의 일부였지만.
여학생의 혼잣말에는 못 들은 척 눈을 감으며 머리에 손을 재차 얹었다. 이따금씩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내비치는 모습이 보일때마다 굉장히 신선하면서 짜릿한 기분이었다. 저 역시도 신체 능력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던 터라, 작정하고 달려든다면 언제건 이 목줄을 제 힘으로 끊어낼수도 있을텐데 끝끝내 자신이 쥔 목줄 끝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이 기분을 한껏 격앙시켰다.
"역시 잘 어울릴것 같았는데 내 예상대로구나. 그으, 앞부분까지는 다 좋았는데, 왜 마지막에는 우리 니오가 굴러버리는거야~ 기껏 골라준 옷이 더러워지면 어떻게 해~?"
이윽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여학생을 슥 훑어보고는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제 안목은 어디 가지 않는구나. 게다가 옷걸이가 좋으니 매력이 한층 더 부각되는 느낌이었다. 귀엽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가현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맞아. 귀여워. 충분히 귀여워 보여. 그래서 더욱 좋은걸. 여학생의 칭찬에는 한껏 의기양양한 모습이 되어서는 이 정도는 기본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게 되는 것이다. 뭐, 이정도? 같은 느낌이었다.
"마음에 들어~? 그렇게 좋아해주니까 골라주는 보람이 있는걸~ 잠깐만. 아까전에 돌아다닐 때 봐뒀던게 몇개 더 있어서, 그것도 얼른 가져와볼게~"
가현은 재차 발걸음을 옮겨 옷들 사이를 느긋하게 걸어다니며, 제가 아까 눈대중으로만 봐뒀던 것들을 몇가지 더 집었다. 이번에는 스트릿 패션 느낌으로 활동성에 조금 더 중점을 두기로 한다. 글씨가 프린팅된 하얀색의 얇은 긴팔 티셔츠, 그리고 짧은 청바지. 위에 걸쳐입을 자켓을 집으려던 가현은 손을 멈춘다. 요즘 날씨가 한창 더워지고 있는데, 어울릴만한 코디만 신경쓰다가는 당장의 실용성을 놓치고 말겠지. 제 턱을 토톡 두들기던 가현은 자켓 대신 까만색 볼캡을 하나 집었다. 옷을 골라주는 것이라고 해서 옷만 정해주라는 법은 없었다. 어울릴만한 아이템을 하나씩 추가해준다면 훨씬 그럴싸한 코디가 나올 것이다.
"자. 이번에는 이거야~ 한번 입어보고 별로인지 좋은지 지금처럼 이야기해줘. 맞다, 옷도 내가 사줄테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정해봐~"
여전히 옷 입는 사람보다 골라주는 사람이 더 신이 난 모습으로, 제가 고른 옷과 모자를 여학생에게 건네주며 방긋 웃는다.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그는 얘기했다. 사실 그렇게 맹독을 갖고 있는 뱀을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돌아다니는 거리에 데려올거란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있었고 만약 뱀에 물려 죽는다고한들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 원래 이런 성격이라. "
오지랖이 워낙 넓어 누구에게나 도움을 주고 있었기에 그것이 오늘 처음 만난 상대방이라고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장을 보는 것에 대해서 안목도 남들에 비해 꿀리지는 않을 자신은 있었기에 자신 있게 추천을 해줄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다. 재밌다는 말에 자신도 웃어보인 그는 자신도 오렌지를 골라 장바구니에 넣으며 말했다.
" 선배님도 제가 손해보고 산다고 생각하시나요? "
많은 사람들의 많은 생각은 대부분 저러했다. 그러니 똑같은 질문을 상대방에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