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리는 건 아니라는 듯 잔잔한 무표정만 얼굴에 그려 넣는다. 짤막한 농담 속에서도 당신은 여전히 자기주장이 강하고, 그는 여상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저런 자신감 넘치는 사람을 형님께서는 어떻게 자기 사람으로 길들인 것인지, 다른 태도로 보아 그 편린이 언뜻 보이는 것 같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본명이라…… 흥미가 동하는군요."
이름은 알아두는 것이 좋은 법이다. 비록 그것이 범죄자의 명성에 묻혀 더는 불리지 않는다고 해도, 부르는 사람이 있다는 시점에서부터 하나의 족쇄로 써먹을 수 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고작 이름 따위지만, 저주가 판치는 세상에서 이름은 중요하지 않겠는가. 기실 저주 걸 생각은 없고 흥미가 동했을 뿐이지만. 그것보다 집안을 몰살했다라. 손가락 하나가 움찔 떨렸다.
"……그래… 그렇다면, 서로 이름을 나누는 것도 좋겠습니다. 시생의 이름은 아시겠지만, 아회라 합디다.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제 소개에서는 성을 떼어버린다. 무 씨 집안이라는 것은 당신이 알겠거니 싶었거니와 달리 입에 붙이고 싶지 않다는 듯. 혹은 마땅히 소개할 권한이 아직도 없을지도 모르리라. 그는 당신의 소개를 받았더라면, 그 이후엔 나지막이 질문하고 인내하듯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렸을 터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의 이야기가 끝났을 적, 그의 손가락 하나가 움직였다. 손등 위에 곱게 포갰던 손의 검지가 위로 올라섰다가 손등을 툭 두들긴다. 역시 무력과 공포로 제압하였구나. 그렇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한다 해서 답할 사람은 아닐 것이다. 궁기에 대한 공포가 각인된 사람이니 더욱.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
손가락이 멈췄다. 알고 있구나. 지금이라도 케이크를 먹으라 주어진 용도의 포크로 찔러버리면 되는 건가 생각했지만 용도에 맞지 않는 사용으로 피를 부르고 싶진 않다. 포크를 집어 들었을 때 옆면으로 케이크의 시트를 꾹 눌러 자를뿐이다.
"압니다. 자기 집안도 박살 내신 분인데, 남의 인생이라고 박살 내지 않을 리가요."
말끔하게 잘라낸 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어 천천히 씹어 삼켰다. 알고 있다. 날카로이 뱉은 말이 또 재미난 농담이었다는 듯, 그는 드물게 작은 웃음을 뱉었다. 마치 오늘 날씨가 좋지 않냐는 듯한 평온한 웃음이었다.
"이리 서로 질문 주고받는 것도 즐거우니 계속 해볼까요, 혹여 시생에게 사적으로 궁금하신 것이 있는지요?"
천 가의 형우. 흔한 이름이라지만 그만큼 기억하기도 쉬웠다. 잘 쓰이지도 않는 아회라는 이름과는 달리. 자신의 이름을 좋아한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좋아한다라. 내심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좋아할 수도 있는 것이구나. 누군가 괜찮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그는 잠시 당신을 바라보았다.
"공의 충심을 신뢰할 뿐이지요."
만일 농질에게 이름을 알려준다 하더라도 그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고작 그 정도로 화를 낼 사람도 아니다. 저주로 죽는다면 무력하게 울부짖으며 죽어가기 보다는 죽는 순간까지 움직이면 될 일이다. 끝까지 자신을 불사르고, 약간의 꽃이나마 피워낼 수 있다면 되는 일이다. 아니면 꽃망울을 품기라도 한다면.
"단순한 농일 뿐이니 깊게 받아들이지 마시지요."
농 치고는 제법 날서있는 말이나 알게 무언가, 즐거우면 되는 것이다. 그가 즐거우면 나머지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누군가 죽는다고 해도, 죽었다고 해도, 죽을 예정이라 해도. 케이크를 한번 더 짓눌러 베어낼 적, 그는 당신에게 의외라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분위기라."
형님께서 적룡임을 말씀하셨구나. 무슨 낯짝으로 내 동생은 적룡이래요, 라고 말했을지 모르겠다. 원인 제공한 사람 중 하나라고 기뻐한다면 그것만큼 치가 떨리는 일은 없으리라. 흥미롭다는 듯하다가도 다급히 덧붙이는 모양새에 그는 케이크를 다시 한입, 입속에 채운다.
"글쎄요, 학당 전체의 분위기가 흉흉하든 아니든 간에 적룡은 늘 같습니다. 시끄럽지요. 호승심이 있어 쉬이 단합하고, 쉬이 깨지덥니다. 불타면 같이 싸우고, 불씨 사그라들어도 호기롭게 태우려 듭니다."
그는 자신의 세월을 잠시 되짚는다. 고작 6년 남짓 되었으나 깨달은 점은 제법 많았다. 호승심으로 뭉쳤다가 그 호승심 때문에 박살이 난다. 싸움은 깊어지고 때로는 기숙사 내부의 유혈 사태도 벌어졌다.
"요전번에는 사감과 함께 칼부림도 났지요. 타 기숙사였던 분이 보면 기함하겠지만 보통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익숙하게 살아가곤 합니다. 시생 또한 마찬가지지요."
잔 쥐는 손이 유려하다. 가느다란 손목 하며 주먹 쥐어도 아프지 않을 녀석인데도.
"혈투 벌어지는 곳에서 조용히 살고자 합니다. 의미없는 피를 보고 싶지 않거니와 싸움을 좋아하지 아니하기에 평상시엔 기숙사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으려 들지만, 가끔은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생기니 참으로 부끄럽지요……."
시비 붙으면 죽여 팬다는 언사 곱게 포장해놓고는 제법 즐겁다는 듯싶기도 하며 여유로울 뿐이다. 하물며 나지막이 후후,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