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현의 말에 답하면서 그는 얼마전에 만났던 그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위대하신 분에게 바치기 위해 산제물도 공양하고 있지만 이미 인간들에게 마음이 떠나버린 그분의 앞에서 몸가짐이란 별로 중요하진 않을 것 같았다. 개미가 아무리 몸단장을 한들 우리가 보기엔 다 똑같아보이는 것처럼. 하지만 가현의 앞에서 굳이 그런 말을 꺼낼 정도로 눈치가 없는 사람도 아니니 그 이상의 사견을 입에 담지는 않는다.
" 사실 나는 같은 방도 아니었으니 그렇게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그렇게 모두를 죽이고 나간 그 시점부터 좀 궁금해졌거든. "
윤하에게 농질이란 가현과 방을 같이 쓰는 룸메이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농질이 사건을 일으켰을즈음엔 저학년이었기에 이해하기도 힘들고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이제 와서는 그저 호기심이 그녀에 대한 감정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그 호기심을 해소할 기회가 왔으니 놓치기 전에 잡았을 뿐이고.
" 네가 다치는 것보단 나 따위가 다치는게 훨씬 나으니까. "
가현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가 갖고 있는 그 어느 것보다도 맞은 편에 앉아있는 상대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고통을 겪지 않은 것이 윤하의 입장에선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서 다음에도 그런 기회가 생기면 다시 한번 이용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오롯이 자신만이 겪는 것이 다른 이들에겐 훨씬 좋은 일이니까. 음식이 나오고 그는 우동을 한 젓가락 집어 먹기 시작했다. 우동이 맛이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곳과 다르게 국물의 깊이가 다른게 확실히 맛집이라는 평을 들을만 했다.
" 들은 그대로 얘기해줄께. "
' 누군가가 무너져내릴 때도 그 옆에서 모든 걸 받아들여주는 거예요. 모든 걸 받아줄 수 있어야 하지요. 어떠한 형태로든 그걸 전부 받아주는 거예요. 그 자가 날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 없어. 그냥 살아만 있으면 되는 거랍니다. 숨만 쉬고 있어도 그 공기에, 삶에 내가 있는 거예요. 영원히- 얼마나.. 얼마나... '
입에 있던 것을 삼킨 그는 가현의 물음에 그때 들었던 그대로 들려주었다. 이것만 들어서는 아직까지도 그녀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닌듯 했지만 ... 그의 호기심을 어느 정도는 해소해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들은 것을 가현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근데 이 가게, 맛은 괜찮은데 양이 조금 적은지 조금 먹으니 어느새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뭘까. 가현은 제가 이상한걸 겹쳐보는게 아닌가 의심하며 눈을 부비적거리고 요청글을 본다. 눈을 가늘게 떠서 한참 바라보고. 째려보기도 하고. 혹시 몰라서 왼쪽 눈만 가려두고 뚫어져라 본다. 백번 다시 봐도 잘못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배달원을 구하느라 급한 마음은 이해하겠으나 어딜 가든지 보일법한 친숙하고 정겨운 가게 이름을 달고 저런 섬찟한 혈서를 쓸 정도면 예삿일은 아닌것 같은데. 꾸준하게 빵을 너무 많이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빵집에도 시선이 간다. 분명 지난번에도 비슷한 글을 본 적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쯤 되면 배고픈 학생들의 허기를 채워주는 자선단체 같은 곳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한번쯤 가서 그 무한한 사랑을 나누어 받고 싶은데.
그리고, 송 가. 여기에 제사장 가문 사람들이야 자신을 제외하고도 더 있겠으나 그 짧은 글귀가 가현의 마음을 거칠게 쥐어잡고 뒤흔들었다. 다른것도 아니고 무려 송씨 가문에서 제사장 가문 사람을 따로 찾을 정도라면 큰 일은 아니더라도 뭔가 중요한 일일 것 같았단 말이지.
"어디로 갈까..?"
지난번보다 선택지를 정하기 훨씬 힘들어졌다. 한참의 시간을 들여가며 후보를 차근차근 좁혀 나가고. 결국 지난번 빵집과 포목점 사이에서 고민했던 것처럼 빵집과 송가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야망이냐. 포용이냐. 그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헤매던 가현은 이윽고 결정을 내린다. 빵집은 뭔가 다음에도 도움 요청을 할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언제 돌아올지 모를 기회가 아니던가. 갑자기 빵을 적당히 만드는 감을 익히게 되어 다음부터 안 불러주면 그건 그것대로 손해일테니. 또 불러준 김에,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아볼까.
한바탕 소란이 있더니만 오늘은 또 잠잠하다. 평화를 만끽하려고만 하면 학당 밖에서 도움을 요청하니, 안에서 사건이 터지면 밖이 잠잠하고, 밖에서 사건이 터지면 안이 잠잠해지는 현상이라도 있나 보다. 아회 지팡이를 매만지며 비틀비틀 걸어 요청글이 걸린 게시판을 하나하나 살핀다. 이 붉은 글씨가 혈서가 아니길 바랐건만 냄새로 보아하니 딱 혈서다. 대체 얼마나 급하면 이리 사람을 구한담.
어디 보자, 빵은 좋아하지만 먹어달라는 의도가 불순할수도 있으니 조금 그렇고, 제사장 집안이라. 아회 속으로 생각 하나 삼키고는 악기점 재료를 떠올리다가도, 고개 절레절레 흔든다. 조예가 깊지도 않은 놈이 무슨 악기야. 남은 것은 이 문제의 붉은 장소 둘인데.
"……."
선물가게가 조금 더 다급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까. 아회 위치를 파악하고 지팡이와 함께 소리 없는 발걸음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