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당에 다시 한 차례 소동이 지나갔다. 형형한 살기를 드러내던 하 사감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으며, 당분간은 그냥 편안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 잠잠해젔다. 자칫 잘못했으면 농질이 벌인 소동 이후 찾아온 큰 소동이 될 뻔 했던건 아는지 모르는지, 가현은 이번 소동이 적어도 그 때에 비하면 낫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죽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니까.
한가득 쌓인 의문. 그리고 풀리지 않는 궁금증. 더불어서, 보리라는 학생을 그토록 피해다니던 이유까지. 왠지 지금이라면 하 사감님께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을것만 같았다. 동 사감님도 충분히 가능하겠으나 원래 이런 건 밑천 다 드러낸 사람에게 듣는게 좋다고 배웠다. 잃을게 없는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에 있어 막힘이 없고 거짓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가현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음. 하 사감님~ 안에 계신가요~?"
그렇기에 흑룡이라는 것에 대한 따가운 시선을 한껏 받아가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감실의 문을 두드릴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 시선마저도 자신을 향한 애정이라고 믿는 것에 가까웠기는 하지만. 말을 시작하기 전 목을 한번 풀어준 가현은 문을 가볍게 세 번 노크하며, 안에서 대답이 들리기를 기다리는 듯 했다.
가현은 사감님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이 열리자 그저 방긋 웃었다. 제법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여길만 했다. 자신은 흑룡 기숙사이고. 궁금한 게 있으면 동 사감님에게 여쭈어보아도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일반적으로 봐도 그게 훨씬 자연스럽기는 할 것이다.
"으응. 괜찮아요~ 사감이 아니셔도, 절반이 잠잠하지 않아도. 저는 보여지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좋아할 수 있답니다?"
그저 해사하게 웃는 낯짝을 그대로 유지하며 사감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어제 보았던 그 모습이 그대로 비쳐 보이는구나. 마지막에는 물고기의 비중이 더 커 보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대로이다. 그새 저 반반씩인 존재도 안정적인 비율을 유지하게 된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가현은 느긋하게 사감실 안으로 들어와서 주위를 살핀다.
가장 먼저 거대한 책장이 시선을 압도했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탁자가 그 다음으로 들어온다. 역시 사감님들이라서 그런가 좋은 걸 쓰시는구나. 여기저기 널브러진 쓰레기들이 시선에 들어올 적에 가현은 다시 미소지었다. 역시 개인실이라는 건 마음대로 쓰기 딱 적당한 공간이구나.
"어제 있었던 일들으로 궁금한 게 생겨서 말이예요. 여쭈어보고 싶은 게 한두가지가 아니랍니다~"
무엇부터 물어볼까. 어떤 이야기로 시작을 끊어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다 들을 수 있을까. 가현은 소파에 앉아 검지로 제 뺨을 톡톡 두드리며 약간의 뜸을 들인다.
"그 전에. 제 물음에 대한 대답에 거짓은 없다고 약속해주실래요?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조금 슬퍼질지도 몰라요~?"
자기네 기숙사 학생도 아닌 자신이 슬퍼해봐야 바뀌는게 뭐가 있겠냐만은. 가현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이야기의 시작 전 분위기를 잡는 과정일 뿐이었다. 이윽고, 가현은 사감님을 다시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선.. 그동안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평소 그렇게까지는 안 하시던 분이, 갑자기 칼 들고 난동을 피우시길래 조금 놀랗답니다."
아회 살아오며 마땅한 형제라곤 하나밖에 없었거니와 험난한 북부에서 어딘가 나가거나 교류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간 또래의 여성은 고사하고 여성 또한 대해본 것은 웃어른이 다였으며 6년 재학하며 연 쌓기보다는 은둔에 가까운 생활하였으니, 이 장난꾸러기 여인 대하는 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뭐, 마주 한지 3년이면 긴 시간이라지만, 익숙해지기엔 그것 또한 이 답답한 인간 성미로 미루어 보건대 어려운 일이고. 아니, 아니지. 날이 갈수록 이 짓궂음이 새롭게 변모하지 않나! 여인이 자신에게 있어 천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도, 돌려주시오……."
지금도 그렇고. 아회에게 있어 머리를 푸는 장난은 다른 장난 보다 유독 버티기 어려운 것이었으니. 어릴 적부터 애지중지 길러온 터라 한 번 머리를 풀면 머리카락이 여간 길어 다시 그러모으고 쪽을 지기까지의 과정은 고사하고, 엉성한 빗질이 그대로 티가 났기 때문이겠다. 아회 또한 자신의 머리가 지금 개판인 걸 알고 있었다. 어쩜 매번 자신을 곤란하게 하는지. 결국 붓 돌려달라는 듯 어쩔 줄 몰라 하다 역정 내었더니만 어림도 없다. 서운한 아이 소리로 맞서지 않나. 잔인도 하지. ……잔인도 하지. 보통 앙탈이라면 누이로 대하고 있지, 하고 결국 딱밤 놓았으면 모를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러니까, 그게, 얘기하지 않아도 좋아요. 그냥, 이렇게 있기만 해도 좋으니까…….
네 알고 있더냐? 가족이란 것은 끔찍한 형태로 결집된 것을 총칭하는 단어란 것을. 아무리 싫어도 가족이란 이름 아래에서 벗어날 수 없단 뜻이다.
장난스럽게 애교 담아 물먹은 듯 먹먹한 소리가, 진실로 물속으로 가라앉듯 귓전에서 멀어진다. 몸이 긴장하듯 딱딱하게 굳는다. 차갑고 세찬 비가 오는 것 같았다. 아마 호수 물 때문이겠지. 제 두른 팔에 힘 풀리고 어깨 떨리는 감각 느껴졌을 적, 아회는 아득하고도 긴 침묵을 유지했다. 평소처럼 조용하지만, 어딘가 기묘한 침묵을. 이내 속내를 갈무리한다. 늘 그렇듯 달관한 모습으로, 다만 짓궂은 장난에 어안 벙벙한 태도로 돌아와서는.
"수일이가 늘 낭자 얘기만 꺼내면 질색하는 이유 예 있구만."
한숨과 함께 긴 손가락이 올라선다. 동그랗게 말린 손가락이 이마 있는 곳 쉽게 찾고는 툭 튕겨진다. 가볍게 딱밤 놓으려 하며 아회 나긋하게 입 벌렸다.
"……내 이리 보여도 적룡이오. 만일 누이로 대하지 아니하면 낭자 이리 행동하였을 때 이미 한바탕 뒤집었겠지. 떡이나 하나 더 들게."
"이전에 말씀드린 사항이지만~ 인간 따위가 더 존엄한 존재에게 자비와 구원을 바라며, 존엄한 존재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뒤엎어진 것이 이 세계랍니다."
하물며 그 분의 존엄성 앞에서도 거만하고, 고개 숙여 경외를 표할 줄 모르며, 틈만 나면 기어오르려 안달인 것이 인간일지언데. 제가 사감님에게 이러는 것 또한 당연한 일 아닌가요. 가현은 하 사감의 이죽임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미소지었다. 당장 이 존재의 심기를 건들어서 제 목이 비틀어지든. 아니라면 흠씬 얻어맞든. 그 어떤 것도 신의 존엄성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니 두려움을 담지 않았다. 어쨌든, 답지않게 조금은 오만한 모습을 보여가며 약속을 받아내었다. 한번 잡아챈 기회를 허투루 놓칠 수 없지. 예상했듯 사감님의 지적이 들어왔으나 가현은 아무래도 좋다는 양 방실 웃었다.
"그 부분이 이해가 안 간다~ 이런 말씀이예요. 적어도 저희들이 하 사감님을 찾으러 들어가기 전부터 그러신 거잖아요? 서화 언니. 그러니까 농질 언니가 방문한 게 이유였다면, 그것은 저희의 탓이 아닐 터."
가현은 사감님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의문을 표했다. 확실히 그 날 이런저런 도술이며 마법이며. 일반 사람이 직격으로 맞았다가는 목숨 스무개쯤 없어질 위협적인 것들이 사감님을 향했다. 그 점은 인정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전에 하 사감님의 심기를 건들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저희 학생들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원체 싸움 좋아하시는 분인 건 알았지만 그걸 남 잘못으로 돌릴 분이라는 생각은 안 했는데?
"후후, 감사해요~ 저야 아까 말씀드렸듯이, 진심으로 죽이려고 칼을 휘두르는 사감님의 모습 조차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포용했지만요? 음. 그러면, 사감님께서 이전에 말씀하신 이름. 이문, 포뢰, 초도. 그 이름들은, 그 분께서 손수 죽이신 사감님의 형제들인 걸까요."
슬슬 질문이 심화되기 시작한다. 궁금한 것들을 또 한 꺼풀 털어내던 가현은 사감님의 이야기에 그럼요. 하고 방싯 웃으며 대꾸했다. 아직 궁금한 게 산더미랍니다. 전부 감당하실 수 있으신지요. 이윽고 가현은 뭐 하나만 묻자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가, 입꼬리를 슥 올린다.
"저런... 만일 그랬다면 저 역시 농질 언니가 쫓겨났던 것처럼 이미 이곳에 오기도 전에 추방당했을 것이랍니다."
당신들도 알잖아. 존엄하고 위대하신 존재의 압도적인 분위기를. 산제물을 바치는 장소는, 이렇게 어수선한 장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가현 역시 사감을 바라보다가 황홀한 듯 손으로 제 왼눈을 매만졌다.
"점술 수업 때였나요. 그 분께서, 친히 제게 찾아와 주셨답니다. 그 존엄함을 직접 이끌고. 보잘것 없는 제게 하나의 부탁을 주셨지요."
아직도 그 감촉이 제 눈에 남아있는것만 같아, 가현은 황홀해지려는 제 기분을 애써 억눌렀다. 자칫 잘못해서 심기를 너무 건들어버린다면 의문이고 뭐고 못 풀어놓게 될지도 모른다. 아. 저 역시 거짓은 없답니다. 그리 말하는 가현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휘어진다.
온화 이리도 손윗손아래 막론하고 허물 없이 구는 것은 남매가 많아서인 것도 그러나 그런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류 가는 본디 아무런 권력이나 이권이 없는 집안이다. 실력 좋은 사냥꾼이 많고, 질 좋은 도구 만드는 장인 많으며, 수완 좋은 장사꾼이 많은, 위세 있는 집안에서 보기엔 그저 어중이떠중이들 모인 집안이나 그렇기 때문에 집안에서의 위계 질서가 느슨했다. 특히 성년이 되지 않은 아해들 특히 어린 아해들끼리는 한데 어우러져 먹고 자며 한덩이마냥 자라니 온화 또한 그 중 하나라. 요컨데 자란 환경의 영향은 싫어도 드러난다 이 말이다. 장점이든 단점이든.
제 손으로 빼낸 붓 돌려달라 해도 히히 웃기만 하고 역정을 내도 되려 앙탈을 부리며 섭히 굴었으니. 예상컨데 조금 지나면 또 위신이니 체면이니 하며 옹알대겠거니 했다. 침묵이 조금 지났을 때는 평소 같구나 여겼지만. 그보다 더 길어지고 몸 굳는 것 알았을 때는 무언가 잘못되었나 하는 생각 덜컥 들었다.
평소라면 진즉 무슨 말이라도 했을 것인데. 팔 풀어지자마자 도망갔을 것인데. 알던 것과 다른 현실은 가슴 속 수면에 불안이라는 이름의 돌맹이 던져 일으킨 파문 일었다. 수습을 해야... 하나...? 고개 살짝 들고 눈 치켜올려 속을 알 수 없는 아회 얼굴 바라보고 있으니 시야 한 켠에 스윽 올라온 가는 손 있다. 자연스레 손으로 시선 돌리자 이마에 퉁겨지는 손가락 감촉에 저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가 샜다.
"이잉."
아프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제 기분까지 묘해진다. 맞은 그대로 눈만 껌뻑이다 들려오는 말에 볼 크게 부풀렸다 꺼트렸다. 괜히 불만 있는 척 다시 팔에 힘 주어 붙들고선 종알댔다.
"그런 말 해준다고 내 순순히 놓아줄 것 같소? 에잉. 절편이나 집어주오. 내 손 없으이."
이번엔 당당히 손 없다며 집어달라 하곤 숙였던 고개 드는데. 제 가슴팍에 꽂아두었던 붓이 보인다. 직접 가져가라 하려 했으나 오늘은 이제 충분하거니 싶어 온화 그리 말했다.
"오라비야. 머리 내가 다시 올려주어도 되나? 장난질 안 할 테니."
여태 한 짓거리 있으니 못 믿으면 어쩔 수 없다만. 적어도 방금 한 말은 참이었다. 아회 그러라고만 하면 정말 얌전히 머리만 다시 올려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