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서 네일샵의 트렌드 디자인도 산뜻하게 바뀌었다. 여인은 자신의 잘 다듬어진 손을 내려다보며 손톱에 빼곡하게 꽃을 그려넣은 것은 조금 과했나, 하는 생각에 잠시 잠겼다. -하지만, 이 정도 하지 않으면 이 계절을 제대로 즐기고 있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 손가락의 가장 끝, 아주 약간의 면적만을 차지하고 있는 이 판판한 도화지에 파란색을 칠할지 빨간색을 칠할지, 글리터를 올릴지 큐빅을 올릴지 결정하지 못하고 이상과 현실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던 시절은 이미 옛날옛적에 지나가버렸다.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여인은 고개를 들고 산들바람을 만끽하며 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웃는 소리가 저편에서부터 들려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이 행복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완벽한 즐거움에 그녀의 시선이 놀이터로 흐르듯 옮겨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유일하게 행복을 찾아가며 웃음을 터뜨릴 존재들이다. 마치 갓 돋아난 새싹처럼 싱그러운 희망의 상징- 하지만 그 뒤에는 분명 어른들의 고충과 고통이 얼룩져 있을 것이다.
"......"
어린아이 셋이 합체를 외치며 서로 엉겨붙은 채 커다란 미끄럼틀을 타는 모습을 따라 시선이 주욱 내려간다. 놀이터의 푹신한 타일바닥, 그리고 바로 그 근방에 있는 알록달록 색칠된 벤치. 운의 눈동자가 수다를 떨고 있는 부모들을 스쳐지나가 홀로 조금 동떨어진 한 인영에게로 꽂혔다. 조금, 익숙한 것 같은데. 아니, 분명 이전에 본 사람인- 아, 그때 그.
핸드백 안에 담긴 반질반질한 휴대폰이 떠올랐다. 재빠른 반사신경으로 자신의 핸드폰을 잡아준 사람, 제 사진을 찍어줬던 청년이었다.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 무작정 연락처를 주머니에 쑤셔넣어줬지만, 아직까지 연락 한 번 없었지.
그녀는 발걸음을 옮겨 놀이터 입구에 들어섰다. 또각이는 구두를 신고 있었지만, 푹신한 놀이터 타일에 발걸음 소리가 묻혀 상대에게 제법 다가간 순간까지도, 청년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예상했던 답안이었다. 으레 연락이 안오는 상대란 그런 것이지. 물론, 대부분의 경우를 보면- 인연이란 게 그렇게 쉽게 이어지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상대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핸드백을 끌러내며 옆자리에 앉았다. 오늘의 그녀는 하얀 가방에 화려한 주홍빛 색감의 점프수트, 손톱에는 노란색 들꽃들이 수놓아진 차림새였다. 마치 관광지에 휴양을 갔다가 갑자기 평범한 아파트 단지내의 소박한 놀이터로 끌려나온 것 같은 조금 이질적인 모습에 이쪽으로 몰리는 이목에도- 그녀는 태연하기만 하다. 이 태연함은 그녀를 일상에 순식간에 스며들게 만들어-거짓말같이 주변 시선들도 가라앉았다.
"음, 잠시 네일샵에 갔다가 돌아가던 길이었어요. 어때요, 예쁘죠?"
백 운은 싱긋 웃으며 핸드백 위에 다소곳이 올려져 있던 손을 들어보였다. 자세히 보면 들꽃이라 그런지 몰라도, 조금씩 다른 모양의 꽃들이 세심한 붓칠로 수놓아져 있는 그림같은 손톱이 햇빛에 반짝였다.
"네, 좋아해요. 봄이라고 하면 다들 화려하게 피는 꽃들만 말하는데, 사실 봄이 왔다는 걸 제일 먼저 알려주는 꽃은 이런 자그마한 들꽃이거든요. 이름조차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은 없지만- 어디서든 고개를 내밀어서 봄소식을 열심히 전해주는 이 자그마한 것들이 너무 기특하고 아름답지 않나요?"
그녀는 자랑하듯 들어보였던 손가락을 물결치듯 까닥여 보이곤 다시 핸드백 위로 차분히 내려놓았다.
"우리 일상을 멋지게 만들어주는 것도 이런 소소한 것들이죠. 이렇게 좋은 날씨에 내리쬐는 햇빛이라던가, 딱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라던가, 저기서 어울려 놀고 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라던가- 이런 갑작스러운 만남이나 사소한 대화들처럼요."
운의 갈색 눈동자가 하늘로, 놀이터로, 허공으로 향했다가 잠깐의 정적 후에 당신에게 머물렀다. 그녀는 깜박한 무언가를 이제야 떠올린 양, 한 손을 황급히 당신에게로 건넸다.
애매한 대답과 흐려지는 뒷말에 상대의 이름에 뭔가 사정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채기 어렵진 않았다. 지금 캐봤자 좋을 게 없는, 그저 지나가는 무언가의 실마리. 그녀는 일단 이 순간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그리고 좀 더 자신에게 향하는 당신의 눈길에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즐기고 있는 것마냥 꾸며냈지만- 당신의 관심에 대한 순수한 기쁨의 표현에 가까운 미소였다.
"그래요? 그럼 나랑 크게 다르진 않네. 혹시 한가해요? 할 일 없으면 저랑 같이 어울리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직장은 없냐던가, 오늘 하루 일은 쉬는 거냐던가 하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시시한 질문보단 무료한 자신의 하루에 같이 어울려줄 수 있느냐 하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저도 한가하거든요. 그냥 조금 걷고, 걷다가 앉아서 쉬고- 시원한 음료도 마시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시간을 보낼까 하는데-"
그녀는 다시금 제 손가락을 앞으로 주욱 빼며 갓 칠한 네일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는 술래잡기를 하던 아이들이 술래가 잡았느니 잡히지 않았냐느니 하는 일들로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주변 벤치에 앉아서 담소를 나누던 어른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놀이터쪽으로 발걸음을 막 옮기는 것이 보였다.
어린 것들, 희망의 상징이라 불리는 것들- 하지만 동시에 분란의 시작이 될 수도 있는 것들. 운의 시선이 점점 언성이 높아지는 어른들과 그 뒤의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아마 어른들이 도착하기 전에 아이들 사이에 뭔가 분쟁이 있었던 모양이지.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자, 그제서야 어른들의 눈가에 내려앉은 다크서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미소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섰다.
"그럼 우선 이쪽으로 가볼까요? 아마 이쪽으로 가다보면 단지랑 이어진 괜찮은 산책로가 있을거에요."
라며 두어 걸음을 옮겼다가 문득 떠오른 듯 멈춰서서 당신을 돌아보았다.
"시간은 얼마나 있어요? 적당할 때 놓아줘야 할 텐데. 혹시 집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갱신이야! 민호주 내가 요즘 계속 정신이 없어서 그런데 돌리던 일상을 이쯤에서 끊고 킵해둬도 될까? 너무 늘어지고 매일마다 답변달기 어려운 상황이라ㅠ 나랑 하는 건 나중에 다시 이어서 해도 되고, 새로 시작해도 좋아! 혹시라도 중간에 다른 참치랑 마주치면 그때 자유롭게 일상 돌려도 되고! 생각보다 일이 바빠져서 미안해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