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놀라는 모양새가 흡사 놀란 강아지 같다. 귀엽지만 그 뿐. 더 시끄럽게 굴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니 저 입 무어라 떠들까 하며 지켜보았으나 나온 말은 사뭇 다르다.
짖궂은- 방금의 제안이 짖궂다 정도로 그칠 만 한 것인가 싶지만 아무튼 별 의미는 없이 말한 것에 온순하던 도령이 반응했다. 바치는 것이 아니면 하지 않겠다 했나. 바친다. 누구에게? 그것 뭐 두말 할 것이 있을까. 본래라면 바치든 굽든 삶든 신경 일끗도 주지 않았겠으나. 얌전하던 것이 발끈한 부분은 흥이 돋는 법이다. 온화의 붉은 눈이 가늘게 좁아지며 웃었다.
"그래. 바치는게 아니면- 이라."
낄낄낄... 바짝 굳은 도령을 옆에서 기이한 웃음소리 흐른다. 흥 돋는 것 보았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할까. 온화는 또 무슨 말, 무슨 행동이 나올새라 먼저 빙글 몸을 돌려두 몸을 마주보고 맞대려 한다. 다리 엇갈려 겹치고 두 팔로 허리 얽어맨다. 묶이지 않아 듬성한 적발이 흰 얼굴 드문드문 가리웠으나 그 새로 새빨간 눈 선연히 빛난다. 빙긋이- 웃으며 그 얼굴이 말한다.
"그러하면 저것, 바치면 되지 않소. 저것으로 되었을지는 내 모르지만."
온화는 모른다. 하지만 도령이 안다면 하지 않을 이유 또한 없지 않나. 가까이 붙인 몸마냥 얼굴 사이 간격 좁혀가며 내리깔린 목소리 읊조린다. 숨소리가 나즈막히 섞여든다.
부적이 타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일렁이는 듯한 것이 보인다.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때 해야 하는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행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회 표정 항시 덤덤하니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거니와 다 타고 남은 잿더미와도 같은 사람이기에 돌발행동이란 찾아볼 수 없는 자였다. 손에 들고 있는 부적을 살랑, 하고 흔들다손 쳐도 누군가를 공격할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으나.
그래요, 잘 할 거라 믿어.
"예에, 참으로 잘 하렵디다……."
오늘은 조금 달랐다. 피를 흘렸던 탓인지, 제 피에 자극이라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오늘은 심사가 뒤틀렸던 것인지. 청초한 미인처럼 생긋 웃더니만 부적 슥 던지는 것이다.
이를 어쩌나. 하나로 안 된다해도 지금 있는 것은 하나 뿐인데. 몰이한 곳에 가서 몰래 무얼해야 하나. 비릿한 잔머리 굴리는 도중에 도령의 눈 마주쳤다. 제 것과 격이 다른 붉은 빛에 등줄기가 쭈뼛하다. 그 탓인가. 온화는 제게서 벗어나 비척비척 걸어가는 그를 그저 보는 수 밖에 없었다. 비틀대며 유유의 시체에 다가가 그 위에 엎드려 이윽고 씹는 소리가 나기 시작할 적에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한 손으로 입을 가린다. 손은 슬그머니 내려가 목을 쓸어내린다. 눈 앞에 흐릿하게 아지랑이 피어오른다. 손끝이 목 두른 띠 문지를 적, 메마른 숨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어."
한참을 먹던 몸뚱이가 픽 쓰러지자 온화도 정신을 차렸다. 설렁설렁 다가가서 보자 뱃속이 텅 빈 시체와 잘 먹고 잘 자는 아해 하나로다. 난감한 상황을 앞에 두고 에휴- 긴 숨 내뱉었다. 영 찜찜한 걸 봐버렸는데. 뭔가 제 탓 같단 말이지. 뭐 나름 수습은 해야 하겠지. 일단 제 붉은 두루마기로 도령의 얼굴과 손을 북북 닦아 대충 핏자국만 지워낸다. 그리고 좀 떼어놓고, 내장 없는 시신을 들어-
으직 북 우두둑!
"휴!"
처절히 싸운 것 마냥 너덜하게 만들고 제 옷과 몸에도 피 좀 튀게 만든다. 얼굴에 튄 피가 뺨 타고 흐른다. 이걸로 통하면 그만이고 아니면 대충 둘러대자. 식은 피 묻은 손으로 저 도령의 팔 들어 제 어깨에 걸쳤다. 한 손에는 유유 시체의 뿔 쥐고, 한 어깨엔 건장한 사내애 짊어지고서 산을 내려간다.
공기 중을 떠다니는 형형색색의 꽃잎, 흔극을 파고드는 황금색 날빛, 행복이 충만한 낭랑한 웃음소리, 끊이질 않는 풍부한 양식들. 그리고 가장 상석에 배치된 붉은 눈의 아이. 자그마치 십육 년이다. 십육 년 만에 신께서 안배하신 '붉은 눈'의 그릇이 태어났다. 십이월과 일월, 끝과 시작 사이에서 탄생한 이로 인해 칠흑 같은 밤은 종식되고 새로운 태양이 뜨리라! 사람들은 입을 모아 신을 경배하고 축복의 구절을 읊었다. 일직선으로 내리는 빛줄기를 곧이곧대로 맞으며 하얗게 빛나는 갓난아이의 두 눈 밑에 붉은 점이 두 번 찍혔다. 신께서 안배하시고 다시 신에게 안배될 영원한 그릇의 상징이요, 죽어도 피보다 진하게 남을 낙인이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만면에 웃음을 걸쳤다. 처마 밑 그림자에 몸을 숨긴 여성만이 웃지 않았다. 흐릿한 적갈색 눈에 물기가 어렸다. …안돼, 내 아가. 내─! 그녀가 절망적인 낯으로 비명처럼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뒤에서 투박한 손이 입을 막더니 거칠게 끌고 갔다. 여성의 실루엣이 그림자 너머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
네가 정녕 미친게냐! 그 자리가 어디라고 소리를 질러!
우레와 같은 고함 소리가 적갈색 눈의 여성에게로 내리꽂혔다. 목청을 높여 내지른 자는 주름이 든 노년의 여성이었으며, 울상을 짓고 있는 여성의 모친이었다. 노인은 여성을 답답하고 아둔한 것 보듯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어깨를 잔뜩 웅크린 여성은 주먹을 꽉 쥔 채 물기 어린 눈으로 노인을 노려봤다.
어머니, 당신 손녀입니다. 저 붉은 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계시면서 그걸 새기게 내버려 두는 것입니까!
안다, 내가 너보다 몇 배는 더 잘 알 것이야. 저 아이는 생애 다신 없을 영예로운 신분을 달고, 귀중한 경험을 할 것이다. 감사한 줄 알-
그저!
여성이 외치며 노인의 말을 끊었다. 생사의 기로에서 생을 갈구하듯, 또 하늘을 뒤흔드는 뇌성처럼.
그저 개죽음-
짜악! 뺨을 내려치는 마찰음에 의해 이번에는 여성의 말이 끊겼다. 노인은 눈을 부릅 뜨고는 노여움과 공포로 점철된 낯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여성의 어깨를 주름진 손으로 콱 잡아채더니 낮게 일갈했다.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다시는! 그리고 기억하거라. 네가 여태껏 멀쩡히 목 붙어 살 수 있음은 저 아이의 존재와 가치 덕이라는걸.
그제야 어깨를 놓아준 노인은 한 번 혀를 차고는 돌아서서 축제의 현장으로 돌아갔다. 여성만이 덩그러니 남아 멍한 낯으로 빙벽 같은 절망을 곱씹었다. 한참을.
*
그릇의 탄생을 축복한 날로부터 십일 년이 흘렀다. 붉은 점의 갓난아이는 마을 사람들의 호의와 친절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 십일세 소녀가 되었다. 새순처럼 피어난 소녀는 어떠한 근심이나 우려가 없다는 듯 깨끗한 낯으로 웃었다. 여성, 그러니까 소녀의 어미 되는 여성은 소녀의 투명한 얼굴을 꽤 자주-소녀가 십일세가 되자 그 정도가 심해졌다-그리고 세게 문질러댔다. 소녀의 눈 밑을. 그렇게 하면 붉은 점이 지워지기라도 할 것이라는 양 벌게지다 못해 피부가 벗겨질 때까지 계속.
어머니, 아파요.
영문 모른 채 몇 번이나 그러한 행위를 겪은 소녀가 가닥가닥 닳은 인내심으로 그렇게 내뱉으면, 비로소 여성은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는 소녀를 껴안았다. 미안해, 미안해. 소녀의 귓가에 반복해서 사과를 밀어넣으며.
소녀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단 하나의 사실만은 알았다. 제 눈 밑에 찍힌 두 개의 붉은 점이 마을에서 제공하는 상냥함과 부의 원천이라는 것을. 그래서 소녀는, 입을 열어 악마의 문장을 끄집어냈다.
어머니, 나는 이 문양 덕에 모두가 우리에게 친절하며 우리가 배곯지 아니할 수 있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밖은 내가 아는 세상보다 더없이 차가울 거라는 것도. 그런데 왜 어머니는 이걸 지우려는 거예요?
소녀가 무구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질문했을 때, 여성은 발 밑이 꺼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심장이 육체로부터 벗어나고, 뱃속은 기이하게 뒤틀렸으며,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수분과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한 끔찍한 감각. 지옥 속에서 여성은 불현듯 의문이 들었다. 이 좆같은 심정의 원천은 무엇인지. 어린 아이가 어른을 걱정하게 만든 우스운 상황? 산 제물로 바쳐질 아이의 숙명에 대한 비통함? 아이의 삶을 짓밟고 살아가는 내 처지에 대한 연민? 이 모든 판을 깐 마을에 대한 홧홧한 분노?
내 아이의 삶과 제 삶을 거래해 기생충처럼 살아가는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이다. 악마와 거래를 했으면 지옥에 떨어질 준비를 했어야지.
여성은 생명이 뱃속에 들어앉았을 때 정을 주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가슴을 저릿하고 따스하게 채우는 감정을 애써 외면하려 했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단전 깊숙이 박힌 생존본능이.
내가 이 아이를 사랑하면 죽겠구나.
그러나 이제, 여성은 소녀를 조금 더 단단하게 껴안으며 선언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선고를 내렸다.
"영원히 사랑한단다."
영원한 안식을.
*
「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상냥한 살해 방식이다. 그녀는 숨 막히는 상냥함에 목이 졸려 죽었다. 」
/ 사랑, 墨
. . .
"─그걸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조금은 거친 손길에 공책이 탁, 하고 덮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은 시가 종이에 어설프게 가려져 사랑만이 남았다.
>>987 묵주 어서와~ 아니 근데 이렇게 어마어마한 거 들고 오기 있기 없기?! 아니 막 진행 끝났는데 숨 돌릴 틈도 없이 싹 읽어버렸잖아~~ 화려한 축제 장면으로 시작해서 점점 바닥으로 꺼지는 듯한 흐름과 그 속에 담긴 묵의 옛날 얘기... 마지막 묵의 시는 너무 먹먹해서 어흑 나 우러욧... ;ㅁ; 흑흑 한번더 먹을래... (?)
>>988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아 좋아 온화네 방으로 납치해버려~ ㅋㅋㅋㅋㅋ 아이 재밌다 보리 볼 때마다 놀려야지 희희~
니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거래라니 무슨 이야기일까. 거래라면 무언가의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일터다. 그 사감과 거래를 했다면, 그리고 그 이야기를 굳이 니오의 앞에서 한다면, 그리고 굳이굳이 건드리지 못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쉽게 귀결된다. 기숙사와 기숙사간의 어쩌면 사감과 사감 사이의 거래였고 그 거래 품목은 '학생'이었으며 이 경우에는 니오 자신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래대상이 되어 이리저리 넘겨졌다는 이야기. 그건 조금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네.
" 아-뇨. 패는것도 죽이는것도 제가 직접 합니다. 남의 손을 빌리는 취미는 없어요. "
니오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한 대 맞으면 다섯 대를 패주는 것도 물론 좋은 방법이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확실하게 밟아놓는것이다. 다시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다시는 감히 자신을 내려다보지 못하도록 달려들어서 때리고 때리고 또 때려서 이러다 정말 죽겠다는 생각이 들 때 까지 때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진짜로 반 죽여놓으면, 그러면 대부분의 문제들은 해결된다.
" ...오면, 저는 다시 거기로 돌아가는거겠죠? "
황룡 기숙사. 두 번째 떠나서 도착한 곳. 그곳은 아직 '도착'한 곳이지 '정착'한 곳이 아니다. 집을 떠나서 적룡을 찾아 이 곳에 '정착'했다. 그리고 잠깐의 도발에 넘어가서 기세좋게 넘어가겠다고 말해서 황룡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넘어간 곳은 딱히 좋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계속해서 겉도는 느낌. 누구와도 친해지기 어려운 느낌이 계속 들었고 그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원래 있던 곳에서 찍힌 배신자라는 낙인. 그것이 자꾸만 괴롭게한다. 우리와 너는 다르다는 그 느낌이 속을 어지럽게 만들어버리고만다.
" 사감님, 저 할 말 있어요. "
두 주먹을 꼭 쥐었다. 힘이 들어간 탓에 멎었던 피가 다시 조금 흐르는게 보였다. 길이 보인다면 걷는다. 벽이 보인다면 들이 받아서 부수고 길을 만든다.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아아아아 독백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픈데 이 옛날 이야기들을 알고싶어 끊을 수가 없구나ㅏㅏ................. 어머니는 그래도 자기 딸을 진심으로 굉장히 아끼는 느낌이네요. 가장 상냥한 살해 방식이라는 말에 치였습니다.. 어머니가 상냥하게 죽인거야 (´•̥ω•̥`) 맛있게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양기 빵빵!
>>986 애절한 글이에요, 풍요 속의 그 끔찍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날것의 감정이 살아있는 글이에요... 아이의 탄생으로 하여금 누군가의 광기어린 희비가 교차하는 첫 장면부터 마지막 시의 구절까지 모조리, 따끔따끔하게 살갗을 찔러내요. 누군가는 잘못 되었음을 알고 비참해하고, 누군가는 잘못 되었음을 알지만 다수를 위해 희생하라는 듯 강요하는 모습이라 안타까워요... 묵이는 자신의 삶이 어떤지 알았던 것 같아요. 어쩌면 깨달았을까요, 사랑만이 남았다는 마지막 문장이 비통하게 다가오네요... 어쩜 이런 멋진 글을 쓰셨는지... 존경스러워요!
여담이지만 축제에서 드러나는 날것의 광기가 마치 미드소마도, 쿠마리도, 하물며 인간의 추악함과 종교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본능을 생각나게끔 하는 두려운 일화여라...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