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 눈사람을 만들거나, 길에 쌓인 눈을 치우거나, 눈천사 만들고 있거나(?) 이것저것 귀여운 상황은 많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럼 그건 선레 쓰는 쪽에 맡기도록 할까요? 선레는 다이스로 정해도 괜찮은데 저도 곧 자야 하다 보니 한두 번 핑퐁하고 킵해야 할 것 같기는 하네요.
눈 덮인 흙더미에서 떡잎 한 쌍이 뻗어나와 있는 모습과도 같다. 햇살을 받으며 흔들리고, 새파란 하늘을 향해 뻗어 가는 그 자태는 강한 생명력, 혹은 끊임없는 의지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감동적인 풍경일 수도 있다. 이런 겨울에도 무럭무럭 자라나는 식물을 보면 어딘가 뭉클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문제는 키구치 요이카 본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땅으로부터 하늘을 향해 뻗어 나온 그것은 새싹이 아니라 커다란 눈더미에 거꾸로 메다 꽂힌 요이카의 두 다리였으니까.
「으으으으음⋯.」 하고 눈더미 아래서 짧은 신음이 들려 왔다. 아니, 아무도 듣지 못했다면 들렸다고는 할 수 없겠지.
바둥바둥. 두꺼운 양모 바지에 어그부츠를 신은 두 다리가 열심히 흔들렸다. 그러나 눈더미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하기에는 역부족인 발버둥이었고, 애꿎은 오른쪽 부츠만 발에서 빠져 버려서 노란 털양말이 드러났다. 학교 근처의 공터, 어린이들도 많이 다니는 길가에 쌓인 눈을 치우고 나서 「다 끝났다」 하고 자기 몸집만큼 쌓인 눈더미에 부심코 기댔더니 그만 와르르 무너지는 통에 깔려 버린 게 화근이었다. 요이카의 병아리 수준에 달하는 완력으로는 그 무게를 밀어낼 수 없었다. 지친 것도 있었고.
눈 퍼내던 막삽은 저 멀리 가서 꽂혀 있고, 땅에 떨어진 부츠는 똑바로 섰고, 이 날씨에 여기를 지나다니는 사람도 얼마 없고, 아니 몇 명 지나간 것 같은데 눈사람인 줄 안 건가⋯. ‘이대로 봄이 와서 눈이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수없이 많은 겨울을 지냈기에 그런 기다림은 익숙했다. 다행히 원령들도 화내지 않았다. 나무는 겨울의 추위만큼은 원망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애초에 왜 눈을 치우려고 한 거지? 그 길을 딛고 누가 오기를 기다렸나? 요이카는 스스로를 원망할 뻔하다가 생각을 멈추었다.
온 세상이 하늘보다 파란 이 눈더미 밑에서라도 조금이라도 짜증을 내면 뱃속의 원한들이 들끓고 솟구쳐서, 이곳 가미즈나가 눈보라보다 험한 꼴을 겪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평소처럼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볼을 콕콕 찌르는 냉기에도 무덤덤한 입장을 유지하며 기다리는 것이 옳다. 이런 결론을 내리고 요이카는 평온한 마음 상태에 틀어박혔다. 마음의 평정은 눈더미에 쌓인 햇살보다도 하얗다. 길가에는 요이카의 다리가 거꾸로 박힌 눈더미가 쌓여 있었다.
어느 날 입술에서 흰 입김이 새어 나오면, 금세 또 겨울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정말 믿기지도 않지. 시선 닿는 곳마다 모든 사물이 한층 단단해져 있고, 어제는 잿빛 하늘이 가까워졌다 싶더니 목화송이만큼 큰 눈송이를 떨어트려 놓고 간 것이다. 온 세상눈으로 덮여 있으니 가지만 남은 나무도 희게 보일 정도라. 미유키는 검은 겨울 코트에 목도리까지 둘러 단단히 무장한 채 밖으로 나선다. 그럼에도 추위를 느끼지만, 지금만큼은 반가웠다. 미유키는 쌓인 눈을 밟으며 걷다가, 눈을 모아 작은 눈덩이를 만든다. 그리고 담벼락 위, 우체통 위, 눈덩이에 눈을 더해가다 보면 좀 더 큰 눈덩이를 만들어 보고 싶은 욕심이 드는 것이고. 그에 이젠 주먹만 한 눈덩이를 들고 눈이 많이 쌓였을 공터 쪽으로 향하다 이상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쌓인 눈덩이에 솟아나 있는 것은 그러니까. 사람의 다리다. 그 모습에 미유키는 얼굴 하얗게 질러서 눈덩이를 내버려 두고 달려간다. 튀어나온 두 다리를 잡고선 힘주어 당기며 당신을 눈덩이에서 꺼내려 한다.
"죽었어요? 죽은 거 아니죠? 응?"
면장갑을 낀 손이 당신의 눈꺼풀 달라붙었을 눈을 털어내려 했을까. 보면 걱정하는 얼굴에, 노랑색 눈이 당신에게 향해있다. 당신에게서 저와 같은 기운을 느끼니, 쉽게 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우리가 지금 내려와 있을 인간의 몸이란 생각보다 연약한 것이기에. 당신의 상태를 확인하며 미유키는 걱정을 버리지 못한다.
남이 당겨 주자, 키구치 요이카의 몸통이 생각보다 간단하게 쏙 하고 빠졌다. 역시 발버둥이 통하지 않은 이유는 눈이 무거워서라기보다는 요이카 자신이 무기력해서였다. 간신히 일어선 요이카는 앙감질을 쳐서 저 멀리 똑바로 서 있는 오른쪽 어그부츠를 신고, 막삽을 들어올린 채 어깨를 떨며 가볍게 몸서리쳤다. 눈가에 묻은 눈은 친절한 행인의 손길에 떨어져나갔지만, 얼음에 닿았던 코 끝이 빨개져 있다. 매듭도 짓지 않고 그저 목에 둘둘 감은 머플러에다가 콧김을 뿜어내서 열심히 얼굴을 녹였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네⋯.”
이 말을 꺼낼 때쯤 요이카는 문득 상대방이 범상한 인간들 가운데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神)⋯. 어딘가 낯익으면서도 낯선 기운을 품은 신이다. 요이카는 그때, 북녘에서 불어오는 미세한 바람 같은 냄새를 맡았지만 그게 마주본 신의 기운인지 그저 때맞춰 부는 계절풍인지는 확단할 수 없었다.
“내년 초까지 거꾸로 꽂혀 있다가 풀려날 뻔했어. 그래도 이 주변에는 마음씨 상냥한데다 키도 큰 사람이 지나다니는구나.” 일본에서는 평균 정도 키가 되는 요이카도, 소나무 분재처럼 목을 뒤로 한껏 구부려야 올려다볼 수 있을 만큼 은인은 키가 컸다. 요이카의 나무식 사고방식으로 말하자면 키가 크다는 것은, 동급생 여자아이들이 애청하는 연속극의 이케멘 배우가 얼마나 이케멘인지, 결혼정보회사가 신규 회원을 받을 때 그 회원의 봉급에 0이 몇 개나 찍혀 있는지, 할머니들에게 있어서는 손주가 밥을 얼마나 잘 먹는지와 같은 중요한 덕목인 것이다. “이 은혜를 어찌 갚으면 좋을지. 내가 옛날만 같았어도 곡식을 한가득⋯. 아, 아니. 식사라도 많이 대접했을 텐데.”
삽을 들고서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하던 요이카는 일단 깍듯이 몸을 굽혀 인사했다. 앞머리가 이마 밑으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요이카는 이 낯선 신의 기운과 커다란 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영문 모를 익숙함을 곰씹으며 열심히 그 정체를 짜맞추고 있었다. 분명히 초면이고 대화한 것도 처음인데 어디서 본 것 같은 인상, 그리고 키란 말이지⋯. 꾸벅꾸벅꾸벅이 대여섯 차례쯤 반복되었을까, 요이카는 ‘아’하고 짧게 소리를 냈다. 그리고 고개만 들고서는, 아주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혹시, 가⋯미⋯즈⋯나⋯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