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이렇게 피곤해도 되는 건가 ( +_+) 내일부터 황사가 심해진다는 비보가 있는데, 지금 내리는 비가 한 사흘 연달아 왔으면 좋겠네... 비가 그치고 나면 다시 잠깐 쌀쌀해질 수도 있으니 내일 나갈 때는 조심하기야 좋은 하루 보냈길 바라고 내일도 좋은 하루 되길
콘서트의 열기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이제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이들에게 우산을 강요하기에는 충분히 굵은 빗발이다. 니나가 찾고 있던 그 동급생이 속한 밴드의 다음 차례에 나온 밴드들은 운영진 측에서 마련해준 듯한 우비 차림이었고. 빛무리는 아직도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지만 니나의 눈에 빛무리가 드는 일은 없었다.
아무리 작은 길거리 콘서트라 해도 무대 뒷편의 밴드 멤버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스태프의 제지를 받을 만한 일이었지만, 스태프들은 마침 관객들에게 우비를 나누어주랴 타프를 치랴 하느라 정신이 없어보이고, 그 틈에 니나는 아무런 제지 없이 무대 뒷편으로 갈 수 있었다.
니나보다 키가 약간 더 큰 정도의 앳된 소년 하나, 피로에 찌들은 눈을 하고 머리를 말리고 있는 3학년~ 혹은 그 이상 되어보이는 테가 둥근 안경을 낀 소녀 하나. 힘깨나 쓰게 생긴 유쾌한 인상의 청년 하나가 제각기 짐을 싸고 있었지만, 거기에 니나가 찾는 하얀 머리의 소년은 없었다.
가장 먼저 니나를 알은체한 것이 피로에 쩔어있는 얼굴의 안경 낀 소녀였다. 힐끔 니나를 보더니 스태프가 아닌 것을 알아챘는지 비에 쫄딱 젖은 니나에게 뽀송뽀송한 수건을 한 장 건네주면서,
"안녕. 누구 찾아오셨어요?"
하고 사무적으로 묻는다. 그 뒤에서 누가 왔나- 하고 고개를 내밀어보던 덩치큰 청년이 한 마디 거든다.
하얗게 빛나던 소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무대 뒤편에서 소년의 흔적은 이미 사라져있었다. 소년과 함께 무대 위에서 음악을 연주하던 이들만이 세 명, 남아 있을 뿐이었다. 두리번, 두리번, 고개를 돌려 살펴 보아도 어디에도 그 흰 머리칼은 보이질 않고. 멀뚱히 눈을 깜빡이다가.
안경을 쓴 소녀가 말을 걸어오자마자, 시선은 똑바르게 그에 꽂히고. 탁하게 붉은 홍채가 한 번의 깜빡임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소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입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몇 초 뒤였다.
“설백야를 찾고 있습니다.”
폭 젖은 것과는 달리 유난히도 메마른 소리였다. 친절히도 수건을 건네는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주춤거리듯 익숙하지 않아 보이는 손길로 받아든다. 그래 놓고서는 한다는 것이 고작 뺨을 타고 흐른 물길 자국을 조금 두드려 지워내는 게 다였지만. 보송한 면에서 낯선 향기가 나는 것을 느끼며.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그 시선은 같은 학교인 것을 알아채 준 청년에게 가 꽂혔다.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청년에게 한 발 다가서서.
청년과 소년, 소녀는 잠깐 서로 눈빛교환을 하지만, 그 제스쳐에 뭔가 딱히 의미심장한 의미를 담지는 못했다. 이것저것 경계하기에는 그들이 아직 딱히 광팬을 경계할 필요가 있을 정도의 슈퍼스타 밴드 같은 것도 아니었고, 일단 니나가 백야가 다니는 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이 그들의 경계심을 크게 덜어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비를 쫄딱 맞은 처량한 몰골이었으니까.
"백야라면 빨래 걷어야 된다고 기타만 챙겨서 집에 갔는데."
백야의 집에 들렀다가 백야를 찾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라면 무릎 풀림을 유발할 만한 대답이었으나, 적어도 니나는 그게 아니었다. 애초에 니나는 백야의 집이 어딘지도 몰랐으니, 오히려 더 나은 상황이라 할 만했다.
"백야 집이 어딘지는 알고 있어?" 과연 당연한 질문이 나온다. 모른다고 의사표시를 하면, "저기 터미널 방향 도로로 빠져서, 중화반점이 있는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나오는 빌라들 중에 ○○빌라라고 있어. 거기 203호가 백야네 집."
"그건 그렇고 잠깐만요, 비가 점점 심해지니까 제가 스태프분들께 남는 우비가 있나 여쭤볼게요. 그거라도 입으시고..."
아주 잠깐, 시선이 오고가기는 했지만, 종종 봐 오던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시선에 담긴 부정적인 감정, 생각, 그런 걸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더라? 깜빡, 무미건조한 시선이 짧은 시간 바닥을 향했다. 툭, 투둑, 밖에서 잔뜩 적셔 온 옷자락을 타고 바닥으로 물방울은 떨어지고.
터미널 방향 도로, 중화반점 사거리에서 우회전, OO빌라 203호,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의 거주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거리의 풍경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면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디로 얼만큼을 가야 하는지. 멀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변함 없이 건조한 감사인사를 내뱉고, 수건을 돌려준 뒤 몸을 돌려 나오려는데.
우비, 말입니까? 깜빡, 움직이는 눈꺼풀.
잠시 후 무대 뒤를 벗어나 밖으로 나온 니나의 손에는 작은 비닐 포장이 들려 있었다. 어디 하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우비였다. 그것을 꺼내 바스락거리며 걸쳐 보자니, 이미 잔뜩 젖은 몸에 들러붙어 영 불편할 수가 없기에 얼마 가지 못 해 다시 그것을 벗어냈다. 움직임 탓에 잔뜩 구겨지고 젖어버린 비닐우비.
그 뿐일텐데. 누군가는 그것을 생각 없이 당장 쓰레기통 따위에 던져넣을 수도 있겠으나. 붉은 시선이 우비를 뚫어져라 쳐다만 보다가, 이윽고 그것을 둘둘 말아 가볍게 안아들었다. 아쉽지만 다시 곱게 접기에는 재주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누군가 본다면 참 괴상하게 여길지도 모르겠으나. 약속 33번, 사람의 호의를 소중히 할 것. 축축한 운동화가 다시 한 번 거리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 더 빠른 종종걸음이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