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 부드러운 음식과 약간의 대화. 거짓일지 진실일지 모르는 말을 믿고 말고는 고신의 몫이었을 것이다. 허공에서 물건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더라도 그는 조금의 힘을 준다면 시윤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건네주는 콘스프를 받아 입에 넣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을 뿐이다.
" 으흠... 이 맛은... "
그는 한 잔을 느긋하게 비운 뒤에 말을 꺼냈다.
" 처음 먹어보는 맛이로구만. 참 하나하나... 이상한 존재로군. 하지만 하나는 알겠어. " " 자네는 가호를 받고 있구만. 그것도 내가 감히 알아볼 수 없는.. 높은 신의 가호를 말일세. "
고민이 많은 듯 했다. 갑작스러운 친절도, 그 경계가 누그러짐에 따라 선명하게 드러나는 주름들도 시윤은 볼 수 있었다. 꽤나 피곤했던 것처럼 간만에 속을 데우는 온기에 퍼지기 시작한 고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이 곳은 인간의 발이 닿기에는 혹독한 땅이라네. 비록 나 이외에도 수많은 신들이 인간의 형상을 띄고 있긴 하나. 그건 자네라는 존재가 나라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모습이라네. "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당황스러울 법도 했지만, 시윤은 일단 듣고자 했다. 침착해야 하고, 알 것을 조금이라도 늘려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있으니 말이다.
" 나의 이름은 도라. 한때 인간들은 나를 봄의 전령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네. 열을 담은 바람이 닿아오는 때면 곧 봄이 왔으니 말일세. 이 땅은 다른 땅의 혹한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네. 그러니 인간의 개념이 '겨울'이라는 계절을 정립하고 그로부터 신앙을 얻기 시작한 후로 줄곧 이 땅은 겨울의 땅이었을 걸세. "
" 그러나 인간의 개념에 의해선 영원한 겨울이란 없네. 언젠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와야만 하는 법이지. 그렇기에 인간은 이 땅의 추위를... 기나긴 겨울의 지배라 생각했지. 그 결과 인간의 개념으로 가장 가까웠던 존재. 겨울의 땅을 지배하는 왕이라는 개념이 탄생했지. "
" 그러나 겨울은 영원하지 않네. 유한한 존재이며, 왕인 존재. 겨울의 왕은 언젠가 죽음을 맞아야만 했다네. 그리고 그 죽음으로 하여금 겨울의 왕관은 누군가에게 계승되어야 했지. "
도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이 닿는 곳에는 어린 아이가 새근새근 잠을 이어갔다. 시윤의 눈빛 역시 아이를 향했다.
" 그래. 예상했을지도 모르지만 저 아이 역시 겨울의 왕의 파편 중 하나라네. 죽은 왕을 따라 자리를 계승해야만 하는 존재이지. 그로 하여금 기나긴 겨울이 오기까지 왕은 성장하고, 다시금 겨울이 돌아오는 날 통치를 이어가야만 하네. 하지만... "
" ... 아니. 아닐세. 나는 저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다네. 아이가 겨울의 왕좌를 계승하여 죽음을 맡는 것에 동정하여 모두에게 겨울을 선물한 신이지. 봄의 전령이 아니라.. 겨울의 기수라 불려도 할 말이 없겠군. "
높은 신의 가호? 나는 조금 의아한듯 중얼거린다. 신앙이랑은 거리가 멀고, 나에게 그런 특별한 연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러나 강하게 되묻지는 않았다. 왜냐면 지금은 나 자신에 대한 호기심 보다는. 이어지는 고신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듣고 싶었으니까.
"......"
고신의 이름은 도라 였다. 어째서인지, 첫 만남 때와 달리 지금은 그 이름을 명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봄의 전령' 이라는 것은, 솔직히 내심 조금. 아니 많이 의외였다. 이 혹한의 겨울을 다스리는 고신이니까. 필시 겨울에 관련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진지하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면서도 이야기를 계속 듣는다.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한번 누그러진 경계는 그의 마음속에 담아있던 이야기를 흘러가는 강처럼 풀어지게 만들었다. 의문도 많았지만, 나는 '들어주고 싶다' 라는 처음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나는 그저 들었다.
".....!"
그러니까 이야기가 후반에 들었을 때야, 나는 경악한 것이다.
이런.....터무니 없는....손유씨에게 전해들은 조사 자료에선 '죽음과 소멸을 받아들이지 못한 겨울의 신'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눈 앞의 노인이 그 신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도 필시 무언가 깊은 연관이 있으리라곤 생각했지만.
그렇지만 아니었던 것이다. '겨울의 신이 될 아이의 계승을 받아들이지 못한, 봄의 전령의 도피'. 진상은, 이랬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나는 조금 침을 삼킨다. 너무나도 거대한 이야기다. 겨울의 시작과 끝의 개념. 그리고 그것을 형상화한 신. 겨울의 끝은 신의 죽음. 그로 인한 계승. 그 것을 이어받을 아이를 동정한, 봄의 신의 도피. 마치....신화 같다.
아니, '마치' 따위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신화(神話) 인 것이다.
그런 얘기를 들은 나는 뭐라 대답해야할지를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연다. 적어도 가장 처음에 할 말은. 이거 밖에 없었다.
"마음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도라 어르신."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그가 과연 어떻게 했어야 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러한 그 모든 것을 논하기 이전에. 나는....이것 부터 말해주고 싶었다.
"겨울의 시작과 끝. 왕권의 시작과 끝. 그로 인한 봄의 도래까지. 이 모든 것은 자연의 순리와 이치에 가깝고, 풋내기 소년인 제가 언급하지 않아도 도라 어르신께서 가장 잘 알고계실 터입니다. 그러니까....아이를 동정하고, 사랑하여, 도망쳐, 이 차가운 혹한 속에서 지내시는 것에는."
굳이, 설교를 할 필요 조차도 없다. 봄의 전령인 그야 말로. 겨울의 왕의 계승이 어떠한 의미이고. 그게 얼마나 자연스러운 이치인지. 아마 그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이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역할을 내팽개치고 겨울을 불러왔다는 죄책감은.
그의 마지막 말의 자조에서부터도, 깊게 전해져왔다.
"....제가 감히 짐작도 못할만큼, 고뇌하셨겠죠. 정말로 고생하셨습니다. 어르신."
나는 고개를 한번 깊게 숙인다. 그 무거운 고뇌의 이야기를 말해 줬음에 대한 감사에. 또한, 사랑을 위해 그 무게를 짊어졌다는 것에 대한 경의에.
"만약, 지금도 어르신께서 고민하고 계시고.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으시다면, 저 또한 답례를 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