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이 빨리 돌아왔어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그렇다는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부끄럽지만 지금은 부끄럼보다는 미안함이 더 커졌습니다. 저랑 놀러 나와서 좋다고 단박에 답하시는데, 제가 아저씨한테 한 건... 학교에서 모른 척 해달라는 거였어요. 부모님 부탁을 들어주시는 것 뿐이니, 아저씨가 치는 장난을 피해다니겠다고 그래버리고, 잘 지내시는 것 같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혼자 생각했습니다.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민망하게만 느껴져서 귀를 만지작거립니다. 귀가 뜨거워질까봐서 미리 식히는 거예요. 빨개지면 안 된다고요.
“...학교에서 모른 척 안 해도 돼요. 인사하겠습니다. ......그래도 장난치면 도망갈 거예요.”
가만 생각해보면 괜히 말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저씨라면 분명 친구도 많이 사귀셨을텐데, 이제 와서 제 양심에 걸린다고 했던 말을 번복하기나 하는게 역시 민망하다는 기분이 들고 맙니다. 입술을 물고서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게 조심해요. 그러고 있으면 아저씨가 제 머리카락을 집었습니다. 땋아둔 두 갈래의 머리카락이 서로 엇갈립니다. X 모양을 그리고 있어요. ...말을 안 할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했는데 X 모양을 만든다는 건 계속 말하시겠다는 대답을 대신 하는지도 몰라요. 아니면 그런 말 하지 말라고 그린 X 모양일까요? 어느쪽이든 계속 하실거라는 뜻같아요. 살짝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눈초리를 보냅니다.
“계속 그러면 저도 키다리아저씨후배어르신깜찍이도깨비비아저씨라고 부를 겁니다.”
아저씨만큼 칭찬을 많이 하는 건 절대 못해요. 하다가 빨갛게 익어서 사과랑 토마토보다 빨개진 다음에 터져버릴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있는 말 없는 말 다 붙여 길게 늘여부르는 별명 정도는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길거리에서 크게 부르지는 못 하겠지만요. 부끄러운 건 둘째치고 아저씨의 정체가 언급되니까, 지금도 소근소근 말했는걸요.
“......계속 칭찬한다고 해도 스티커 안 주거든요.”
웃음도 헤프고, 칭찬도 헤프고, 아저씨는 신이어서 다행이에요. 누군가 아저씨를 만만하게 보고 나쁜 짓을 하려고 하면, 신은 인간보다는 쉽게 당하지 않을테니까요. 신한테 나쁜 짓을 하려고 하는 것도 대단하지만요... “이건 스티커 줄게요.” 비행기는 참아 드리겠다면서, 두 손을 뒤로 돌려서 감추는 아저씨를 보고서 조금 웃었습니다. 다섯살 어린이의 비행기 놀이라고 생각하면 견딜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저씨도 비행기라고 얘기한데다 열심히 참아보겠다는 듯이 손을 감추는게 정말 다섯살 어린이 같잖아요. 이렇게 커다란 다섯살은 아마 없겠지만요. 아무튼 손목에 걸고 있던 가방에서 스티커를 꺼내고, 아저씨에게 손을 달란 듯이 손을 내밀어요. 스티커를 붙여줄 곳이 딱히 없으니까요, 손등에 붙여줄 생각입니다.
“아르바이트 많이 했어요.”
노력하기로 마음 먹었으니까요! 그런데 노력할 기회를 뺏긴 것 같습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더라니, 지갑을 들고서 아저씨가 뛰어가버립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발목 정도는 드러나게 옷자락을 조금 걷어쥡니다. 뛰기 좋게 유카타가 아니라 바지를 입었어야 했는데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어요! 아저씨를 뒤쫓아 노점으로 향합니다. 아저씨가 홀랑 사먹어버리면 노려볼 거예요.
“······제가 꼭 들어드렸으면 하는 소원이라도 있으세요? 미리 말씀드리는데, 중고차 한 대 값 안에서 고르셔야 해요. 요즘 좀 쪼달려서.”
먼저 내기를 제안한 걸로도 모자라 벌써 다른 게임까지 물색하다니—본인도 내기가 무산돼서 아쉽기는 했으나— 무시무시한 소원이라도 빌까 봐 갑자기 조금 걱정된다! 물론 그가 영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리라고는 생각 안 하지만 말이다. 케이의 말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니 물 위에 띄워둔 색색의 물풍선 주위로 인파가 몰려있는 게 보였다. 기다란 옷 탓에 보폭이 좁았지만 종종걸음으로도 제법 씩씩하게 걸었다.
“우와, 저거 은근히 어려워 보이는데요! 잘하실 수 있겠어요? 일단 저는 항복하겠습니다.”
미야나기는 이마 위에 손날을 대고 사람들을 조심스레 살펴봤다. ······어른들은 죄다 놓치고 초등학생들만 귀신같이 낚고 있는 듯했다. 요즘 애들 무섭다. 아까는 자신이 먼저 했으니 이번에는 케이에게 선공을 양보하기로 했다.
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손에 들린 아메링고를 바라봤다. 자신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서 최소한 후배 아니면 동급생일 것이라 생각했다. 자기 쌍둥이와 친한 선배? 그런 존재가 있을 리가. 그는 머릿 속 주판을 이리저리 튕겼다.
“오늘은 혼자 온 거라서 아직 동행은 없는데.....”
레이와 목소리를 최대한 비슷하게 내려고 하던 쥰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러고보니, 눈 앞의 사람의 이름을 몰랐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름이 뭔지 알려줄 수 있을까?”
이 정도면 자신의 쌍둥이와 목소리, 행동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는 고개를 여전히 기울인 채 토아에게 물었다. 자신이 학교에서 마주친 적 있는 사람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워낙, 주변에 사기ㅡ자신의 이름을 바꾸거나 성씨를 바꾸는 것ㅡ를 많이 치고 다니기도 했으니.
만악의 근원은 휴대폰입니다. 제가 휴대폰을 보면서 길을 걷다가 부딪히지만 않았어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아니, 일어났다고 하는게 맞을지도 모릅니다. 때리려고 한 사람만 있고 맞은 사람이 없을 뿐이에요. 그리고 누군가 한 명은 넘어지기까지 했는걸요... 먼저 사람을 때리려고 했으니까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이긴 하지만, 이러다가 정말 치고박게 되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그건 제 문제예요. 신경끄세요.”
또 마주치더라도 제가 해결해야할 일이에요. 도와주려는 건 고맙지만 이런 상황은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안 좋은 생각만 들어서 고개를 짧고 빠르게 도리도리 저었습니다. 잡아 당겼던 옷자락을 힘주어서 꼭 쥐었어요. 그리고 다시 또 마주쳤을 때 더 큰일날 것 같은 건 디자이너 지망생 씨입니다! 처음에는 저와 부딪혀서 저를 보고 있었지만, 이제 제게는 별로 관심이 없어보인단 말이에요. 도망칠 생각이 들었을 때 바로 행동으로 옮길 걸 그랬어요.........
“그냥, 그냥 가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계속 주먹질을 한다거나 하진 않으니까 쥐고 있는 옷자락을 당깁니다.
“다치면 안 되잖아요.”
끝까지 가기는 뭘 무슨 끝까지 가요! 절대 안 됩니다. 디자이너 지망생 씨가 마음을 접어주면 좋겠어요...
"무엇을 원하던 간에 그걸 잡는 건 결국 스스로인" 소망을 빈다면 나는 이루어지길 응원. 이라면서 가볍게 화이팅 자세를 취해봅니다. 그러다가 미카의 질문을 듣고는
"있긴 함." 엄청 크다고 하긴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드문 느낌이라 매니아층 있음. 이라고 말은 합니다. 야근하는 사람들 좋아함. 이라는 말을 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어둠은 물론이고, 미지에 관하여인 만큼 의외로 미지를 파헤치는 자들도 은근...일지도? 사실 분위기가 있는 만큼. 그런 분위기에 영감을 받는 이들도 있겠지.
"그으... 나중에 오게 되면 안내.." 해줄 수도 있음. 이라는 말을 하고는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발검음이 살짝 빨라집니다. 그게 어떤 느낌으로 미묘한 건지 본인도 애매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짐작도 못 한 말이 떨어지기에 그는 빙긋 웃던 낯 그대로 눈만 깜빡거렸다. 그동안 약속대로 아는 척 제대로 안 해준 적 없는데! 그는 어렴풋한 기억을 거슬러 지난 한 학기 동안의 일을 돌이켜 보았다. 2학년 교실까지 직접 쳐들어가서 친분을 과시한 적… 없다. 교실 외 공간에서 마주친 적도 그리 많지 않았는데, 이건 그냥 각자 할일로 동선이 어긋나서 그런 거다. 학교가 생각보다 이것저것 하고 놀 게 많더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에 가까운데 얼떨결에 모른 척 잘해준 아저씨가 된 셈이다. 오, 나 생각보다 기특하군! 하지만 그가 누군가, 자신감 과다와 합리화 달인답게 당황하는 티 내지 않고 금세 처음부터 본인 공이었다 치고 있다. 뭣보다 놀란 것보다는 신이 더 앞선다!
"두말하기 없기다!"
그는 모터 돌린 잔디깎이처럼 부르르 떨어대다 기어이 하네를 부둥켜 땅에서 발 조금 떨어지도록 가볍게 들고 방방 뛰려고 든다. 아, 드는 짓 안 하겠다고 말했지만 이건 비행기처럼 높이높이 든 게 아니니까 상관없거든! 조금 후에야 얌전해진 그는 조금쯤 뾰족해진 눈빛을 받으면서도 히죽히죽 바보 같은 웃음이나 흘리고 있다.
"마음에 드는데 그걸로 개명이라도 할까? 이렇게 된 거 이제부터라도 최선을 다해서 귀여워지지 뭐."
음. 객관적으로 귀여운 타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깜찍이'가 끼워져 있으니까 힘내는 수밖에. 반박조차 안 하고 넙죽 헛소리부터 뱉는 것이 보통 주책이 아니다. 우리 우쨩이 별명도 지어줬다며 감동 눈깔 끼우지는 않고 있으니 오히려 이 정도에 그쳐 다행이다. 무어라 또 주절거리려 입을 열던 찰나에 그가 입을 다물었다. 하네가 조금이나마 웃었기 때문이다. 요란한 호들갑 떨어대지는 않으려는지 잠시 조용했지만, 티 나게 내색하지도 않기로 했다. 알아채 버리면 사라지고 마는 순간을 그도 알고 있으니. 그는 그 대신에 주먹 쥐고 척 손등을 내밀었다. 손 내밀고 자기 잘했다고 바라보는 표정이 쓸데없이 씩씩하고 득의양양하다. 아마 오늘 하루는 내내 스티커 붙은 채로 우쭐해 있을지도.
그러잖아도 발 빠른 양반이 먼저 뛰어갔으니 하네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던 그가 보였으리라. "막내야, 이 세상은 더럽단다. 좀 더 민첩했어야지." 이 치사한 아저씨, 벌써부터 주문했는지 느긋하게 있기는 한데……. 잘 보면 노점상도 요란스럽게 달려온 그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고만 있다. 금방 들킬 거짓말이었다. "농담이야! 여기에 뭐 파는지 내가 먼저 봐 뒀지. 오늘 아니면 언제 우리 꼬맹이가 사 주는 거 얻어 먹으려고!" 짐짓 겸연쩍은 체 슬금슬금 다가와서는, 이제는 하네의 뒤로 가 하네를 앞세우고 손가락 둘 브이자로 멋지게 세워 속닥거린다.
"두 개 사 주렴!"
거 참 솔직해서 한결같다……. 메뉴판을 보니 이곳은 소프트 아이스크림만 취급하는 가게인가 보다. 관광지 상품답게 이것저것 화려한 옵션이 달린 것들도 많았지만 그는 비교적 평범한 것들을 택하려는 모양이다. 말차바닐라와 초코맛 아이스크림 사진을 고이 가리키며 맑은 눈 한껏 반짝거린다.
“엄청 무리하는 거죠! 저도 물정이라는 걸 아는데, 다른 사람한테는 이렇게까지 안 해요.”
당연히, 아까의 승부는 굉장히 아쉽기도 했다. 때를 안 가리는 이상한 호승심이 갑자기 발동해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미야나기는 절대로 지고는 살 수 없는 성정이다. 남한테 빚지며 못 살고, 승부에 지고도 못 산다! 하지만 가끔은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때도 있다. 바로 지금 그 순간이 다가온 것 같았다. 그녀는 동동 띄워진 물풍선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하, 저를 뭘로 보시나······ 제가 저런 데 되게 젬병이거든요. 보고 웃으면 진짜 안 돼요?”
그래놓고 자기는 “아하하!” 하고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소리내서 웃었다. 키 큰 고등학생이 쪼그려 앉아 물풍선이나 노리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보인 탓이다. 선공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조금 여유로운 마음으로 임해도 될 것 같다. 미야나기 역시 쪼그려 앉아 눈을 가늘게 뜨며 바늘을 집었다. 아, 이거 절대 안 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