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이 한창인 때 미카는 드디어 바닷가로 나와보았다 헌데 반팔 티셔츠에 가디건, 청바지 차림인 걸 보면 딱히 물놀이를 즐기려고 나온 건 아닌 듯하다 그냥 리조트 안에만 틀어박혀있기 심심해서 온 거에 가까운... 불어오는 바람이 꽤 후덥지근하지만 물기가 서려있어서 심하게 덥지는 않았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아는 얼굴이 보인다 저 애도 수학여행을 오긴 왔구나, 하는 생각이
"어, 음, 안녕."
종종걸음으로 다가가서 어설프게 아는 척 해본다 남한테 먼저 말거는 건 영 어색한지라 그래도 하는 것 없이 가만히 있긴 싫었다
"...잘 놀고 있나보네."
수영복까지 제대로 차려입고 말이지 ...왜 보는 사람이 더 낯부끄러운지 모르겠지만 갈 곳 잃은 시선이 허공을 맴돈다
" 응. 수영장 있지. 그런데 나 집 밖에 잘 나가지.. 음, 나가기는 하는데. 혼자서 돌아다니는거 잘 못해서. 그런데 혼자 가는거 조금 무리거든. 그래서 워터파크도 혼자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만나게 된다면 인사해줘. 음- 그렇네. 먼저 인사해주라고 했으니까, 내 인사 안받아주거나 하면 나 죽어버릴지도- "
스스로가 생각해도 최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몇 번이나 죽어버리겠다고 말하는건 정말 최악이다. 리오는 정말 이런거 고쳐야한다고 생각을 한 번 더 다잡고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홀로서기를 시작하려고 했으니 이왕 할 거 제대로 해야하니까. 그리곤 들려오는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땅만 보고 걷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 아이자와 선배, 말 많다. 말 잘하는거 부러워. 나는 그런거 안되거든. 노력은 하는데 잘 안돼. "
말을 많이 하려고 들면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아이자와처럼 적당한 자신의 프라이버시라던가 주변에 대한 설명같은 것들로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할 뿐이다. 악의가 가득찬 말을 하며 또 죽어버리겠다던가 하는 이야기나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리오는 몇 걸음 앞서 나가서는 뒤를 돌아 치아키를 가만히 바라보고는 '부럽네' 하고 한 마디를 더하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 반짝반짝- 멀리있네. 더워서 죽어버릴지도.. 아직 한참이야? "
수영복이 조금 거슬리기 시작했지만 리오는 딱히 티를 내진 않았다. 바다에 도착해서 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다로 들어가볼 수 있을지 어떨지는 또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잠깐 말 없이 타박타박 걷던 리오는 뭔가 생각난듯 고개를 휙 돌려 치아키를 바라보곤 마스크를 살짝 내렸다.
" 여기서 긴급 퀴-즈. 내 이름은? 나는 몇 반? "
메이드카페의 아리스양 도와줘! 조금 뜬금없지만 그래도 리오 입장에서는 꽤나 과감한 어프로치였다. 잊어버렸다고 한다면 죽어버릴테다.
"아하핫. 놀리는 것은 아니고 뭔가 작은 토끼 같다는 소리 한번씩 듣지 않아?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 같아서 말이야. 기분 탓일수도 있지만."
놀리면 죽어버린다. 인사를 안 받아주면 죽어버린다. 약간 다른 이가 주는 관심을 원하거나 혹은 친분을 원하거나 혹은 인연을 원하거나. 대충 그런 느낌이 아닐까 치아키는 추측하면서 가볍게 그렇게 이야기했다. 토끼는 외로우면 죽는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죽어버린다는 말의 페턴을 생각해봤을 때 살짝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자신을 무시하거나, 자신을 부끄럽게 하거나. 대충 이런 느낌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치아키는 완전히 이 '죽어버린다'는 일종의 말버릇이나 특유의 표현법이라고 인식했다. 아니라면? 아니라면 어쩌겠는가. 아니면 아닌거지.
"꼭 나처럼 살아가는 느낌이 아니라도 괜찮지 않아? 후배 양은 후배 양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그리고 말 많은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야. 정신없다는 말도 엄청 듣거든. 나중에 수학여행 끝나고 학생회 건의사항에 들어가면 또 무슨 말들이 있을런지. 상관없지만. 아무튼 결론은... 당장 노력의 성과를 보려기보다는 그냥 천천히 걷다보면 뭐라도 되지 않겠어? 그 어떤 일도 결국엔 처음 한 걸음을 딛고 그 한 걸음이 이어져야 성과가 나오는 법이니까. 단지 너는 그 걸음 폭과 속도가 조금 느릴 뿐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걷다보면 결국 목적지는 가까워지고 골인을 하는 법이잖아? 꼴찌로 달린다고 해도 결국 달리다보면 골인점과의 거리는 좁혀지니까. 사실 그것을 떠나서... 다른 골인점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 적어도 난 그래."
나름대로의 생각을 이야기하며 그는 언덕길을 천천히 내려갔다. 점점 가까워지는 바다와의 거리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생각하며 그는 저 앞쪽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걸어서 오 분 정도 걸릴까. 그 정도의 거리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치아키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저기의 언덕 보이지? 저 언덕만 넘어가면 바다야. 그러니까 여기서 아무리 느긋하게 걸어도 십 분. 아무튼 이름과 반? 이치노세 리오 양. 2학년 A반. 그럼 역으로 내가 물어볼까. 이 학생회장의 이름은 뭐게? 그리고 이건 가르쳐주지 않았지만...나는 몇 반이게? 하핫. 맞추면 상품으로 줄 것은 없지만... 음. 그래.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주머니 속에 있는 오렌지 맛 사탕 정도려나. 아. 이 더운 날에는 초콜릿 가지고 다니기도 참 애매해."
이름은 그렇다고 쳐도 반은 아무리 그래도 힘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치아키는 언덕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점점 거리는 가까워졌을 것이고 완만한 언덕을 살짝 올라가면 또 다시 내리막길이 보이고 그 너머에서 찬란한 황금빛 해변과 바다가 눈에 보였을 것이다.
후루토는 당신의 말을 작게 중얼거리는 것으로 입 안에서 다시 되풀이시켰다. 인연이라거나 하늘이라거나, 한 쪽은 자신이 그걸 끊어내는 입장이고 다른 한쪽에게서는 그것이 두렵게 여겨진 모양인지 일찍이 세계의 이면으로 내쳐졌었다. 그러니 어느쪽이든 멀게만 느껴지는 말이었을텐데. 그것이 실로 그런가 그렇지 않은 가는 둘째치고서라도 살아있는 인간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되니 어쩐지 감회가 새롭다. 그런 그녀는 과연 이나바의 신관이었다. 후루토의 맹하고 가라앉은 눈이 그 소녀를 향해있었다.
"―인번국의 이름을 가진 필멸자여......"
얼마 지나지 않아서 후루토는 다시 한 번 당신의 이름을 불렀다. ...사실 이름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나, 겨우 색이나 외모로만 당신을 구분하던 전에 비해서는 확실한 발전이었다.
"그럼... 제가 이곳을 걸을 수 있게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뒤를 따라, 당신에게 건네진 것은 한 가지 요청이었다.
"실은, 꽤 오랜 시간 이 모래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만.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되어서... 곤혹을 치르고 있던 차였기 때문에......."
그렇다면 역시 결국 길을 잃고만 것이지 않은가... 사신은 펼친 제 손 끝을 서로 띄엄띄엄 마주치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미 교내에서도 당신의 도움을 받아 겨우 도서관을 찾아갔었던 그녀다. 계단과 복도를 오가면 될 뿐인 그런 간단한 건물조차 헤매는데 겁도 없이 이런 인파 한 가운데에 떨어지다니, 겁도 없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당신에게 첨언하길.
"......도와주지 않으면 방금같은 사냥꾼들이 또 올지도 몰라요..."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건 또 다른 종류의 협박도 아니고... 후루토는 그렇게 말할 뿐으로, 멍하니 서서 당신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청포도 주스 한 잔에, 체리콕 하나. 미야나기는 재빨리 머릿속으로 지불할 값을 계산하며 작은 버킷백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미처 지갑을 꺼내는 사이에 순식간에 일이 벌어져버렸다! “어? 아니에요! 제가-” 그녀가 말릴 틈도 없이 케이는 결제를 마쳤다.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는 절차를 밟을 그녀보다 비교적 간단한 제스처로 동전을 꺼냈으니 속도에서 밀린 것이다······. 애플페이 되면 더 빨리 낼 수 있었는데! 미야나기는 멋쪅은 얼굴로 얼른 고개 숙여 인사했다.
“선배한테는 매번 신세만 지게 되네요. 안 사주셔도 괜찮은데······. 감사합니다.”
주문과 동시에 곧장 과일 가는 소리로 가게는 온통 소란스럽다. 기다리는 동안 스몰 토크를 하며 보낼 심산인지 문득 걸어오는 말에 그녀는 곰곰히 생각하는 투로 대답을 술술 나열했다.
“공연이라고 하면······ 무용 콩쿠르는 여름이 피크니까 사실 지금도 이렇게 놀고 있으면 안 되겠죠? 일단 이번 달은 도쿄에서 한 번. 예무제는 웬만하면 전부 가을에 올려요. 우리 학교는 9월에 해요!”
즐겁게 말하던 표정이 순간 복잡해져 약간 어두워 보였다. 괜히 품에 들고 있던 엄한 모자나 손가락으로 잡아당기다 말고, 그녀는 은근슬쩍 화제를 케이에게 돌리려 시도했다.
“별일······ 아. 선배는 요즘 별다른 일 없으셨고요? 그러고 보니 선배는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듣고 싶어요!”
별 것 아니라는 듯 말을 받았다. 실제로 그 때는 부스에서 이야기하다가 헤어지긴 했지만, 그 이후로 혼자 축제 구경도 하고 꽃도 하나 사서 신에게 올리며 인사 및 소원도 빌었으니 거기까지 편하게 간 셈이었다. 그런 걸로 치면 케이에게는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었고 더 잘된 셈이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공연 일정을 머릿속으로 기억해두었다. 열심히 하네. 하는 생각을 하며 “기대할게요.”하는 말을 건넨다.
별일은 있었으나 말할 만한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서로 속 이야기를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으니. 공연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일이라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하는 건 좀 정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