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노라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서당 월강에서 만 점을 맞은 시험지를 부모님께 내미는 꼬마같은 표정입니다. 새노라는 가만히 있어도 자신의 위엄이 지켜질 것을, 꼭 뭔가 행동해서 와르르 무너뜨려버립니다. 옷도 잘 입고, 얼굴도 환하고, 자기 분야에서 천하제일을 논할 만할 능력도 있습니다. 근엄한 표정을 짓고 말을 아껴서 하면 새노라가 그렇게나 원하는 위엄이 자연스레 설 터이지만....
"오호호! 새노라님의 위대함을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챰으로 다행인 것이와요! '아는 요괴'가 보니 더욱 피부로 느껴지시는가보와요?"
꼭 방정맞은 주둥이와 절조 없는 몸짓이 다 된 밥상을 엎어버립니다. 타고나길 재능이 없어 재단사의 길을 포기한 누군가가 새노라를 본다면, 왜 저딴 놈이 저런 피를 가지고 태어났냐고 그날 밤 내내 술을 풀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새노라의 천성이 그런가보죠. 그래도 자아만 비대하고 무능한 처지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금은보화는 백사장 모래알처럼 챵고에 쌓여있지만서두~ 딱히 마다할 이유는 없사와요! 금은보화의 식상함은 역사와 젼통의 신뢰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겠사와요?"
누구에게나 통한다는 게 가장 뛰어난 점입니다. 텐구만 좋아하는 물건을 가지고 인간과 거래가 되겠습니까? 새노라가 장사하면서 참으로 곤란했던 부류의 인요가 바로.. 희귀 문서라는둥 낡은 책 같은 애매한 물건을 가지고 오는 경우입니다. 물론 그 책이 천금과도 같은 보물일 가능성도 존재합니다만. 그 진위를 누가 보증할 것이며, 다른 인요와의 거래에 사용할 때 또 얼마나 많은 수고가 들겠습니까? 이 책의 가치를 이해시키기 위해서요.
금은보화는 보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긴 것부터 나는 값지오 소리를 치지 않습니까. 이 새노라님의 자태처럼!
산에 발을 들이민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가 무언가를 느낄만한 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같이 지냈던 동족인만큼 그들의 기운만큼은 익숙하니 말이다. 그리고 곧장 내 앞에 나타난 누군가를 보고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 나는 딱히 반갑지 않습니다만. "
흰색의 머리카락과 솟은 늑대 귀. 이런 형태를 환상향에서 묻는다면 누구나 하쿠로텐구를 말할 것이다. 거기에 농황색의 그것은 내가 아직 사회에서 활동할때의 것보다 더 높은 직위를 의미했다. 아마도 어딘가의 부대장쯤 되지 않을까. 물론 나는 표면적으로만 부대에 속해있었으니 연이 별로 없었지만.
" 쫓겨난 텐구가 어째서 요괴의 산에 발을 들이밀었냐 묻는다면 첫번째는 가문을 잠시 보기 위함이요, 둘째는 가문에서 겸사겸사 몇가지 물건을 챙길까 하여 온 것입니다. "
물론 두번째 이유는 거짓말이다. 가문에서는 진즉에 내 물건을 다 정리해버렸을테니. 그들 입장에서 나는 가문의 수치나 다름 없지 않은가.
>>148 생원 죽음의 기운이 그득한 이곳은 꽃으로 들어찼으니, 진달래의 향은 진동하며 석산에서는 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는 생원이 가진 지식과 꼭 동일합니다.
그러나 이것이고 저것이고 시기를 한참 비껴갔군요. 늦겨울인데도, 때아닌 진달래요 때아닌 석산입니다. 향이 어리지 않고 진득히 남은 듯하니, 짐작건대 이것들은 사시사철 이렇듯 피어있던 것이 아닌 걸까요? 그렇다면 주머니속 진달래꽃만큼이나 신비롭되 기이한 분위기가 될 텝니다.
죽은 듯한 흙냄새와 숲의 향기가 진동합니다만, 생원의 후각은 한쪽 멀리서 왜인지 모를 물의 향까지 감지해냈습니다. 이 정도의 향이면 그냥 물도 아니고 아주 큰 물이 될 텝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물과는 결을 달리하는, 하지만 분명히 물과 같은 느낌의 냄새.
"후후흣. 물론이죠! 기억하고 있어요, 하지만... 끔찍스럽고 나쁜 존재에게 이름이 불린다는 것은... 더욱히 불쾌한 일이 될 수 있죠? 그렇지 않나요?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중요하거든요. 허나, 정녕 그랬다면 이름조차 말해주지 않으셨으려나요? 그럼, 혹여나... 원하신다면 이름으로 불러드릴까요?"
아리스는 여나의 그 말에 웃음과 함께 미소를 한번 지어 보이고는 살짝 장난스럽게 억양을 띄고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몇번이고 아리스를 향해서 불쾌함을 표한 여나에 언급에에 맞춘 대답 이였습니다. 지금까지 상황을 고려해보면 이렇게 물어본들... 그리 '올바른'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뭐라도 될 수 있기에 가능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155 새노라 아는 요괴라. 그 소리를 듣고 소녀가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는데, 딱히 어떤 첨언은 얹지 아니하는군요. 금은보화에 관한 짧은 논설에 "다행이네. 복잡하게 굴 필요 없겠어." 하며 목각 인형을 날려 보내고, 목각 인형이 당신의 앞으로 보석함을 대령할 뿐이었습니다. 소녀가 공중에 보이지 않은 소파가 있듯 자세를 편히 고치며 자개함을 걸어 닫았습니다. 내려다보며 "이제 이 옷은 주인이 생기겠지." 하며 새삼스럽게 중얼거리는데, 그렇죠. 아무렴... 아주 인형과 같은 주인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수고했어. 값은 지불했으니 더 이상 마주볼 이유는 없어보이네. 먼저 가도록 해. 제멋대로 군 것은 네가 먼저니 이제는 내 제멋대로인 짓을 감당해. 그 정도는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가능하지?"
>>162 아키히요 "우선 뜻을 표하자면, 몹시나 유감스럽다는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겠습니다."
술식이라도 걸린 양 흠 없는 무표정으로, 아키히요의 주장을 끝까지 들은 백랑이 덤덤하게 대답합니다.
"첫째, 낙마落魔가 된 이상 더는 텐구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텐구인 가문과는 더 이상 혈연이 있으려야 있을 수 없죠. 해당 발언은 크나큰 어폐를 포함한다는 말씀입니다."
아하, 그랬었지요. 아키히요와 같은 퇴출된 외톨이를 텐구 사회에서는 '낙마落魔'라고 부르더랍니다. 이름조차 달리하여 경계선을 긋는다니... 과연 아키히요가 잘 아는 텐구라는 족속들이 맞다고나 할지요.
"둘째, 낙마落魔를 포함한 외부인에게는 물건을 챙기기는 고사하고 발을 들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도 한때는 텐구이셨을 텐데, 설마 이런 기초적인 규율까지 가르쳐드려야 하는지는 몰랐습니다. 이것은 저의 불찰이군요. 앞으로는 상대해드릴 때 주의토록 하겠습니다."
말씀드렸으니 이제 물러가면 안전하실 테지만, 만일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이성적인 선까지는 경청해드릴 수 있습니다. 라며 백랑이 말을 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