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으로 치기에도 너무 빈약한 소리지 않나. 하지만 뭐 어때. 웃음 많은 거 사실이기도 하고 어차피 이런 말도 다 장난인데 말이다. 그래도 눈치 보는 시늉은 하려는지 슬쩍 상체 조금 기울고서는 "마음 상했어?"라고 묻는다. 그러다 눈이 마주친다면 보란듯이 씨익 웃고 말 것이다. 놀라 봤자 처음처럼 빽 소리 지르는 정도 반응이 돌아오지 않을까 했는데, 안즈가 갑자기 기운을 잃고 시들시들해지니 린도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곧바로 제 행동에서 좋은 의미를 찾아서 조잘거리는 모습에 전심전력으로 유치하게 굴던 그는 어쩐지 할 말이 없어졌다. 나 원, 이렇게 밝고 긍정적인 사람은 그와 같은 족속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면이 있다. 조심 좀 하란 장난스런 타박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몇 번 해 봤다고 경험이 생긴 것 같단 말이지. 봐, 저것도 아직 멀쩡하잖아."
'아직'이라는 말은 즉 안즈가 오지 않았다면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뜻 아닌가? 이쪽도 단 한 치도 찔리는 구석 없다는 듯 팔짱 끼고 선 그 풍모 의기양양하고 당당하다. 끼리끼리 잘 맞아서 다행이랄지…….
"난 뭐든지 먼저 가야 기분이 좋더라. 분발하시죠, 안즈 선배님!"
방금까지는 대신 해달라고까지 했던 자진신고 하는 게 뭐 그리 좋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말은 그렇게 해도 정말 저 혼자 가버리면 의미가 없으니 결국 속도를 맞춰 걸어가게 되었지만서도. 머지 않아 도착한 교무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아,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있다. 어제 문고리 부숴먹었다는 말이 사실인지 문고리가 덜렁 떨어져서 제대로 닫지 못한 문이 손가락 반 뼘 정도로 열려 있었다. 아직 수리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린은 그 문을 천천히 열며 틈새로 머리만 빼꼼 내밀어 안쪽 눈치를 살폈다. 조용히 탐색만 하려고 했건만 해먹은 게 문고리 부분만이 아니었는지 문을 건드리자 삐걱 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버렸다. 쳇, 글렀군. 곧바로 벌컥 떠들썩하게 열고 들어간 린이 씩씩하게 외쳤다.
"자진 납세 하러 왔습니다~"
반응속도가 빠른 선생 몇 명이 그 얼굴 확인하자마자 이마를 짚으며 난감한 표정이 된 것은 분명 착각이 아니리라.
체육관 문 방향을 보면, 수수한 여자아이가 서있다. 아, 어디서 본 듯도 한데,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누구지. 찾아올 정도로 친한 사람이었나? 긴가민가 하면서도 일단 통통 튀는 걸음으로 가본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작다. 여자애들이란 신기하지.
"으음~ 미안. 나 농구부 활동중이라~ 복잡한 용건이면 같이 하교하면서 이야기해보는 건 어때? 간단한 거면 여기서 얘기해도 되구." "아, 그, 그러면...! 기다릴게요."
아~ 또 일을 저질러버리셨군요 코리야마 유즈루씨. 이 죄 많은 남자...☆ 오늘 구슬땀을 흘리며 훈련하는 나... 좀..ㅋㅋ ✨멋있다?✨
ㅇㅈㄹ로 즐겁게 훈련을 마친 유즈루는 가방을 빙글빙글 돌리며 체육관을 나섰다. 다행이도 오늘은 청소 당번도 아녔고 말야. 이었더래도 튀었을 테지만. 어느새 시각은 오후 6시, 봄철의 짧은 해가 지기 시작하는 무렵이다. 저...! 라며 성급히 구는 소녀의 말을 끊는다. 우리 좀 걸을까? 따위의 짧은 말로.
저벅, 저벅, 어느새 교문을 나서고,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고, 상점가까지 말없이 어슬렁거리며 걷는다. 그리고 유즈루가 먼저 입을 뗀다. "그래, 사귀자."
네!? 당황하는 소녀에게, "아까 웅얼거렸잖아? 좋아한다고." 라며 태연하게 말하면 정말요? 하는 말이 나온다. "당연히 거짓말이지~ 유이쨩 보기보다...ㅋㅋㅋㅋㅋ 순진하구나? 왜 그래, 좋아할 리가 없잖아. 그치~?"
...네. 풀죽은 대답. 그리고 이별은 짧았다. 사실 성가셔서 싫어하거든, 이런 거. 악명이 쌓이지 않게 하되 거절은 확실해야 하고... 피어싱 빠진 자리를 긁적거리던 유즈루는, 골목길 자판기로 다가가 주머니의 동전을 마구잡이로 꺼낸다.
팔로우를 수락하며 훑은 리오의 피드는 그저 제 또래다운 사진들로 꾸며져있다. 어느 날의 ootd, 간직하고 싶은 기억과 일상적인 장면들······. 그런 무던함이 상황과 대조되어 현재를 비현실로 만든다. 미야나기는 마주쳐오는 흐린 눈동자를 저도 모르게 휙 피해버렸다.
“왜 리오는 친구가 생기자마자 멀어질 것부터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어.”
리오는 농담이 아니라는 말을 강조하듯 세 번씩이나 거듭했다. 물론 그녀 또한 불안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어떤 형식의 인연이든 이별은 언제나 두렵다. 차마 끈을 놓기 버거워 외면해버린 적도 수없다. 이 상황이 극단적이지만 않았다면 백 번이고 공감했을 테지만, 여기서 ‘그건 그래’라고 대답해버리면 멘헤라가 두 명이 되어버린다! 멘헤라 과포화 상태에 이르러버려. 나, 그냥 리오랑 평범하게 친구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왜 먼 훗날의 헤어짐까지 대비해야 하는 거지. 젠장! 아, 타지에서 친구 한 명 사귀기 정말 힘들다~. 조상님 책임져! 이럴 줄 알았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독일로 도망갈걸······. 물론 지금의 대화는 충분히 부담스럽고 좀 놀랐지만, 그래도 불쾌한 건 아니었다. 단지 어떻게 해야 그녀를 안심시킬 수 있을지 고민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리오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지도 못 해. 들어도 관심 없고. 확실한 건 적어도 지금은 리오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 거리 두려고 하지 않았어.“
식은땀으로 젖어 제 손이 차갑게 식어있었기 때문일까, 맞잡아온 손에서 전해지는 열기가 뜨겁다. 미야나기는 조금 고민하다가, 이내 리오의 손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듯 엄지로 훑는다.
“리오가 말했듯이 친구가 죽는 거 싫어. 당연하지. 친구잖아!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리오가 죽는 게 싫고, 리오랑 멀어지려고 하지도 않아······.“
//헐 진짜 너무 늦어서 미안해 리오주!!! ༼;´༎ຶ ༎ຶ༽ 연휴 이후로 밀린 일들 은근슬쩍 회피하다가 한 번에 업보빔 맞고 수습하다 왔어 😱 캡틴한테만 말해놓고 생각해보니까 리오주한테 말 안 한 거 있지 ⸝⸝o̴̶̷᷄ o̴̶̷̥᷅⸝⸝ 다시 한 번 진짜 미안하고!!! 흐름 끊겨서 내키지 않으면 여기서 끊어도 됩니닷…!!! 참 아인슈패너 님도 선물 짱 고마워요 전부 확인 완료입니다 감동 받아버렸어 ㅠ0ㅠ~~~~
저녁 때가 되도록 학교 뒷마당에서 낮잠을 자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고 미카가 졸린 눈을 비비며 누운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도 이렇게 의미없는 하루를 보내버렸다 집에 가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미카는 천천히 교문을 나선다 왠일로 군말 없이 귀가길을 가나 싶다가도 상점가가 나오자 잠깐 발걸음을 멈춘다 그러더니 주변 눈치 보며 인적 드문 골목으로 들어가는데 역시 불량하게 쪼그려앉은 미카의 주머니에서 담배갑이 튀어나온다 저번에 교무실에서 슬쩍해온 게 아직 남아있어서리
치익, 라이터에 불을 켜는데 골목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제 또래의 남녀가 얘기하는 모양인데 남자 쪽은 어쩐지 들어본 목소리다 누구였더라? 어쩌다 보니 엿듣게 된 대화의 내용은 상당히 터무니없었다 사귀자고 대답해놓고 거짓말이라니...
곧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제서야 미카는 떠올릴 수 있었다 저번에 페브리즈 뿌려진 후배 그렇지만 부러 아는 척은 하지 않는다 그저 불 붙인 담배를 물고 연기를 내뱉을 뿐 담배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사실 이번에 받은 선물은 째깍대는 소리가 나는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시계라고 하면 째깍대는 초침 소리를 연상하기 마련이었다.
바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이 작은 탁상시계를 침대 옆에 둔다. 협탁을 과연 언제 쓰나 싶었는데, 오늘 이렇게 쓰는군. 알람을 아침 등교 시간 이전으로 잘 맞추어 두고, 침대에 누워 상념에 잠긴다.
이전까지만 해도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서 뭔가... 기묘한 일이 잦아진듯 하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자주 꾸는 악몽은 내게 피로를 더했고, 당연하게도 안그래도 고통스러운 아침이... 훨씬 더 고통스러워지고 말았다. 이전까지는 으악, 아침이다. 짜증난다. 그 정도였지만, 요새는 할머니께서 날 깨우지 않으면 일어나기가 힘들다.
어쩌면, 저 너머의 세계를 너무 들쑤시고 다닌 탓에 노한 유령의 소행인가?
"에이.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탁상시계의 위쪽을 톡톡 두드리고선, 자리에 눕는다. 내일 아침을 잘 부탁한다. 작은 친구.
고급 양갱과 오마모리, 닌자가 나타났다 세트와 담요, 직접 만든 펠트 인형……. 누구인지 모를 익명의 비밀 친구는 꽤나 정성스러운 편지와 선물을 매일같이 보내 주고 있었다. 그저 선물 받고는 와, 선물! …이라는 감상이 전부였던 그는, 최근 주변의 몇몇 학생들이 마니또에게 마주 편지를 쓰며 이야기 주고 받는다는 소식에 뒤늦게서야 깨달음을 얻었다. 젠장, 그런 방법도 있었구나! 하기야 아직 정체가 안 밝혀졌다 해도 편지를 나누면 밀담하는 기분도 들 테니 서로 더 특별한 느낌이겠지. 이런 일에 뒤처질 수는 없었기에 그는 괜히 소매 걷으면서 의욕에 불 좀 지펴보려 했으나…… 오래지 않아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종이를 앞에 두고 생각하자니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하나 더. 아직은 생판 모를 상대에게 받은 만큼 정성스럽고 멋들어진 감사 인사를 돌려주기엔, 그가 썩 감각적이지 못해서 말이다. 결국 펜으로 뒷머리나 긁적거리다 격의 없는 구절로 첫 획을 떼었다.
「선물들은 잘 받았어. 양갱은 벌써 다 먹었는데 맛있더라. 나머지도 잘 쓰고 있고. 고맙고, 매일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 정도밖에 못 쓰겠네. 그래서 물어보는 건데, 넌 노력에 요행이 조금도 섞여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야? 몸이 아파서 힘들었던 적은?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일이 꼬여버린 적 있어?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늦게라도 널 알아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해 줘. 이걸 왜 물어봤는지는…… 아마 나중에, 직접 만날 때에 알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때까지, 앞으로도 잘 부탁해.」
좀 더 뜻깊고 의미가 분명한 내용이 쓰였더라면 좋겠지만, 영 돼먹지 못한 신이라 어쩔 수 없다. 그는 영문 모를 소리만 길게 쓰인 종이를 가지런히 접어 늘 선물이 놓이던 자리 한켠에 붙여 두었다. 답장 확실히 해 달라는 첨언도 잊지 않고 쭈욱 기지개 켜더니, 금세 우당탕 딴짓이나 하러 어디론가 뛰어나간다. 또 어디선가 선생님의 고함이 들려오며 편지나 마니또 생각은 그새 쓸려가 버렸다…….
역시 봤 구 나... 눈을 질끈 한 번 감고는,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긴 하지. 객관적으로 얼굴 괜찮고(아니, 사실 잘생겼다고 생각해.) 키 크고 성격 좋으니까. 게다가 약간의 날티까지, 이거 완전히 MSG거든요. 같은 자만은 차마 입으로 내지 않았다.
"뭐, 그렇죠. 방금... 누구였더라, 하여튼 그 애는 전혀 취향이 아니었어여. 전 저를 과감하게 차줄 수 있거나 바람맞히는 타입이 좋거든요. 빨리 끝나잖아여, 평판도 안 상하고 말이져♪"
뒷골목을 빠져나온 유즈루는 한 번 뒤를 쳐다본다. 뒤돌아보면 선배가 졸졸 따라나와 있다. 약간 되는대로 준 과자 더 먹고 싶어서 따라나온, 세상물정 모르는 고양이같다는 생각이 더 강해졌다.
이것도 나름 팩트 기반이지, 저 눈매를 좀 봐, 나랑은 아예 궤가 다르거든요. 나름 수요는 있게 생겼는데...
"선배님은요? 여자애들한테 인기 있어요? 그렇게 생기기야 했는데~ 제가 여자라면은, 고백까지는 쫌 무서워서 무리랄까. 역시 인기 없죠? 없지? ㅋㅋㅋㅋㅋㅋ 좀 웃고 살아요, 장밋빛 사랑이 굴러들어와도 못 잡겠슴다, 지금으로선."
아, 밥집은 저기 어때여? 하며 가리킨 곳은, 1층의 야트막한 가게. 천장이 낮고 공간이 협소해 유즈루같은 운동부는 단체회식을 꿈도 못 꾸는 그런 곳. 주된 음식은 경양식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