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 맞춰줄 정도로 궁금한 건 아닌 모양이지. 찌르면 찌르는대로 놀림 당해주던 누구와는 달리 이쪽은 가만히만 있어서 흥미가 떨어지도록 하는 유형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포기할 수는 없다. 상대가 반응하는 주제의 선부터 건드려 보는 수밖에. 고작해야 시시한 장난질 받아달라고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아무튼 그는 진지했다. 의욕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아주 활활 타오르고 있을 거다. ……아, 일단은 빵부터 챙기고. 그렇게 자리를 비웠던 그는 아주 으리으리한 상을 차리다시피한 꼴로 돌아왔다. 디저트 전 메뉴 ×5는 다 들고 오기에 자리가 부족해서 한 판 다 처리하면 그때그때 새로 받아오기로 했다. 그런데도 트레이가 아주 묵직하다. 그것을 조심성도 없이 한 손에 달랑 들고와서는 남은 손으로 미카 몫의 카페라떼를 탁 내려놓았다. 카운터에 다녀오는 그 잠깐 사이 테이블 위로 올라온 고양이에 시선이 닿자 표정에 '그럼 그렇지'하는 빛이 스친다. 그는 고양이가 깔고 앉은 자리에 슬금슬금 손을 집어넣어 냥궁둥이 치우려 했다. "야야, 궁디 물리라." 이 부분은 잠깐 한국어다. 고양이가 불만스레 꼬리만 탁탁 칠 뿐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는 별 수 없이 구석자리에 트레이를 놓고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등받이에 기대 제대로 앉은 채로, 서두도 없이 갑자기 이런 소리 한다.
"고양이 좋아하는 거 맞으면서. 남들 눈 신경 안 쓰고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게 부끄러운 거야? 너만 그러는 게 아니라 나 아는 여자애도 그러던데."
철벽 무너뜨리기 계획의 일환이 아닌 개인적인 호기심이기도 했다. 번민과 고뇌, 복합적인 감정의 작용, 그러한 종류의 심사(深思)와 감수성이 부족한 그로서는 무어 그리 어렵게 생각하면서 사는가 싶으니. 묻고는 커피 한 모음 홀짝거린다. 음, 그럭저럭 마실 만한 품질이다.
이쪽을 향하는 발소리가 들리자 미카는 재빨리 고양이 뱃살에서 손을 뗀다 그 손길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던 녀석도 사냥감이 사라지자 어리둥절한 듯 눈을 둥그렇게 뜬다 곧 남궁 후배가 산만한 트레이를 들고 돌아오는데... 저 위에 올려진 디저트들만 봐도 속이 메슥거리는 느낌이다 저걸 정말 다 먹을수 있긴 한걸까 미카는 조용히 제 몫의 커피를 가져온다
"...뭔 상관이야."
뒤이은 묻는 말엔 대답할 생각은 않고 그저 가시돋친 말을 내뱉는다 헌데 정곡을 찔려서 부끄러운 걸까 미카의 귀 끝이 살짝 달아오른다 그걸 드러내기 싫은 모양인지 잠자코 커피 들이킬 뿐이다 애꿎은 빨대가 입 안에서 잘근잘근 씹힌다
>>517 회사에서 무슨 일이.......? 수고 많았어, 이제 주말이니까 푹 쉬자. 🥲 선레는 조금 천천히 써올 것 같아! ☺️ 그리고 하네가 디엠 주고 받은 직후부터 열심히 하야토를 피해다녔을 것 같으니까, 하야토가 진작에 저 애가 자길 피해다닌다는 걸 눈치챘어도 괜찮아!
사령술사는 무슨... 뭔가 퍽 진지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내심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물론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만, 역시나 내가 그간 직접 겪어온 바로는 그것이 '없다'에 좀 더 신빙성이 있었다.
"글쎄..."
이걸 뭐라고 거절해야 할지도 고민이다. 당당하게 '그런거 없는데 무슨 상관이야.' 라고 할수도 없는 노릇이고. 시선을 피했다가 뒷통수를 긁적였다. 아, 이거 진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다고 순순히 내 장르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아니, 솔직히. 뭐 위험한 스포츠 같은것도 아니고 귀신 이야기 같은거 더 파면 위험하니까 그만두라는것도 좀 우스운 이야기다. 세상에 귀신이 어딨어?
"뭐 별 일이야 있겠어? 여태 아무 일도 없었는데."
워낙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서 나도 모르게 조금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만... 그거야 화자의 말투 때문에 그런거겠지. 여지껏 아무 일도 없었다. 귀신이 존재한다거나 하는 징조조차도 하나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귀신 자체가 존재한다는 이론보다는 그게 더 믿겨지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타카나시 하네입니다. 요즘은 학교에서 숨바꼭질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아니에요, 숨어있는다기보다는 피해다니는 것이니 술래잡기입니다. 정말 누가 잡으러 오는 건 아니지만 열심히 누군가를 피해 다니고 있어요. 실수로 디엠을 시작해서 어쩌다보니 수제로 만든 옷을 선물 받게 된 디자이너 지망생 씨를 피하고 있습니다. 같은 학교에 같은 학년인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미안한 일이지만, 디자이너 지망생 씨는 절 못 알아보겠지만 저만 제 발 저려서 그 날 이후로 피해 다니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도입니다.
‘디자이너 지망생 씨가 앞에?!’
잘못하면 마주칠 것만 같아서, 급하게 계단으로 내려갔습니다. 둘, 넷, 여섯, 여덟하고 열, 발을 크게 크게 딛어서 뛰어내려가다시피 계단을 내려왔어요. 이만큼 내려와서 있으면 아마 그냥 지나쳐갈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혼자 공포 영화라도 찍는 기분입니다. 디자이너 지망생 씨는 귀신이나 괴물, 그 어떤 것도 아닌데 죄송할 따름이에요.
‘열 정도만 세면....’
벽에 기대고 서서 숫자를 셉니다. 손가락 열 개만 접으면 충분히 엇갈릴 것 같았어요. 하나씩 접히는 손가락을 내려다봅니다. 하나당 1초, 아마 10초 정도일 거에요. 모자를 것 같기도 합니다. 긴가민가하지만 살금살금 계단을 다시 올라가서 확인해보면 되니까요.
"어어, 그냥 궁금해서. 딱 봐도 나랑은 반대잖아? 너처럼 부끄럼 타는 애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가 싶었지."
한창 민감한 시기에 있을 청소년의 심리를 '부끄럼 탄다' 정도로 요약해 버리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마지막 한 입이 끝났다. 그 짧은 말이 오가는 동안에 샌드위치 한 덩어리를 해치운 것이다. 이 녀석, 음식을 마시고 있다……. 아니, 마시는 것이라 해도 이 정도 속도라면 사레 들리고도 남는다. 그러고 보면 커피도 벌써 반절은 넘게 줄어든 채고, 서술하는 동안에는 머핀을 전부 한입컷 했으니 다음 트레이 가져오기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듯했다. 순식간에 이것저것 해치운 그는 선배님을 따라 고양이 엉덩이를 툭툭 건드려 보았다. ……손길이 닿기가 무섭게 무겁던 엉덩이가 가뿐하게 들려서는 제대로 된 고양이 애호가─미카─의 무릎에 뛰어들어 버렸다. 왜인지는 몰라도 남궁 씨는 고양이의 마음에 못 들어버린 모양이다. 하기야 고양이는 시끄럽고 동작이 큰 인간을 싫어하니까. 미움 받았는데도 뭐가 좋은지 린은 으하학, 경박한 웃음소리 내며 눈짓으로 재촉을 해댄다.
하야토에게는 최근 좋은 일이 일어났다. 팔로워가 만 명이 넘는 모델분이 친히 자신의 옷을 입어주어서 SNS에 올려주고 태그까지 해주었다. 그 덕에 많은 팔로워는 아니지만 약 300명이 넘는 팔로워가 늘었다. 요즘 반장일과 학교생활에 적응하느라 힘들지만 삶의 활력소가 되어줬다고 할까.
하야토는 어떤 면에서는 생각보다 둔감했다. 하네가 최근 자신을 피하고 다니지만 하야토는 아직 눈치를 못 챘다. 학교에서는 순전히 자신의 반 만을 신경쓰다 보니깐 다른 반의 학우들을 인식할 틈도 없었던 것.
계단에서 본 하네는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서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지만, 하야토에게는 그저 급한 일이 있는 다른 반의 학우로 보일 뿐이었다. 하야토가 받은 사진의 모델과 체형이 비슷하지만 누가 자신의 옷을 입어준 모델이 이 학교의 학생이라고 상상하겠는가?
"응?"
그런데..그 여학생. 너무 급하게 가버린 나머지 지갑을 떨구고 갔다. 하야토는 주워서 가져다줘야겠다는 생각으로 계단을 내려왔고, 마침 벽에 기대고 있는 그 여학생을 볼 수 있었다.
받은 선물 정리해놓고 눈을 감으니, 나는 이미 화우 속에 있는데요. 손에 잡히는 꽃잎은 없어도 손끝이 간질간질하답니다. 일장춘몽이 남기고 간 감각일까요.
이제와 말하지만 나는 사실 봄보다는 겨울이 익숙한 사람이랍니다. 분홍잎 만발할 때면 함박눈이 내리는 날을 떠올리고는 합니다. 다만, 떨어진 꽃잎은 녹을 일이 없으니 하나 둘 헤아려보는 재미가 있더군요. 그렇게 정신없이 꽃잎을 세다보면, 불쑥 여름이 다가오기 마련이지요. 그렇게 봄에게 준비없이 안녕을 고하는 일이 자꾸만 생겨납니다. 조금만 더 곁에 있어줬으면 하건만, 여름이 기다리니 오래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여름에게도 나름의 멋이 있으니 아쉽지만은 않습니다.
마찬가지랍니다. 꽃잎 헤아리듯 편지를 읽다보니 어느덧 금요일입니다. 이틀 후면 감춰진 비밀이 드러나겠죠. 모르는 척 늦장부려볼까, 비밀 친구 붙잡아다 매일매일 편지를 쓰게할까, 덩쿨처럼 못된 마음이 불쑥 튀어나옵니다. 이틀동안 그 못된 마음 잘 다듬어 손에 걸리는 것 없이 부드럽게 만들어볼까 합니다. 얼굴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것에도 나름의 재미가 있으니 아쉽지만은 않겠습니다.
소리 지르면 안 됩니다! 절대로, 절대로 소리 지르면 안 돼요.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티내서도, 무슨 말을 해서도 안 돼요. 숨을 참아버리는 편이 좋습니다. 경직하는 편이 나아요. 숫자 열을 다 세는 순간에, 고개를 들려던 찰나에 열심히 도망쳐온 디자이너 지망생 씨가 눈 앞에서 말을 걸었지만 절대 그래선 안 돼요. 실례이고, 민폐이고, 모두가 바라보고 말 거에요. 그런 일은 절대 안 됩니다.
‘도망갈 수가 없어요!’
디자이너 지망생 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머릿속이 백지입니다. 너무 놀라버린 탓이에요. 제대로 듣지도 못 한 겁니다. 아무런 반응도 못 하고 얼마나 굳어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이마 길지는 않겠지만, 디자이너 지망생 씨가 느끼기에 무시하고 있다고 느껴지기는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디자이너 지망생 씨는 지갑을 내밀고 있습니다. .........제 지갑입니다! 왜 디자이너 지망생 씨가 갖고 있는 걸까요? 하지만 전 도망가고 싶습니다!
“제 지갑 아니에요.”
.........모르겠습니다. 지갑은, 지갑은 새로 사면 되니까요.
“잘못 보셨습니다.”
거짓말만 늘어서 큰일입니다......... 그래도 이러면, 디자이너 지망생 씨가 그냥 갈 거 같으니까요. 교무실에 지갑을 가져다주고, 갈 길을 가고, 저도 지갑을 찾은 다음에 다시 갈 길을 가면 모두가 행복하고 완벽합니다.
미카는 후배가 디저트들을 순식간에 흡입하는 걸 지켜본다 어떻게 저리 복스럽게 먹을 수 있는지... 커피를 홀짝이며 여전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문득 무릎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고양이는 아예 미카의 무릎 위에서 웅크리고 식빵을 구워버린다 묘하게 세상 다 산 거 같은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녀석 미카는 고양이와 남궁 후배를 번갈아가며 빤히 바라보다가... 결국 본능에 져버리고 만다
"..."
입을 꾹 다물고서 고양이에게 손을 대는 미카 느리게 궁디팡팡을 해주자 녀석은 엉덩이를 천천히 들며 꼬리를 부르르 떨어댄다 어지간히도 기분 좋은 모양
"...너 이거 어디 가서 말하지 마."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경고(?)한다 혹시 이 경박한 후배가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닐까 싶어 하는 말이다 맨날 수업 빼먹고 싸움질 하고 다니는 양아치가 사실 고양이를 좋아한다니! 역시 그런 소문이 도는 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