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이런. 사과도 받아주지 않을 정도로 후배님이 화가 난 모양이다. 게다가 손을 잡고 일어난 것에 대해서도 꽤 화가 난 것일까. 하지만 작은 인간이 화를 내 보았자 그렇게 무섭지 않다. 아, 그거다. 화를 내면 낼 수록 더 괴롭히고 싶은 그런 것 말이다. 마치 말티즈가 으르렁거리는 것을 즐기는 보호자 같은 느낌이려나.
“도둑?”
도둑이라고 하니 아ㅡ주 옛날에 제 신물을 훔쳐간 도둑이 생각이 났다. 흔하게 있는 일은 아닐테지만 가끔은 도둑질로 이어지는 연도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후배님의 모습에 걸음을 멈추었다가 이내 장난스럽게 눈을 접으며 웃는다.
“그저 심부름을 도와주려는 것이었는데 말이에요.”
후배님은 양 손으로 공책을 들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케이는 장난을 담아 후배님의 정수리 위에 공책 하나를 올렸다.
“공책을 떨어뜨리지 않고 뒷걸음질로 5걸음 걸으면 나머지 공책을 돌려드리죠.”
장난치지 말고 돌려달라고 한다면 정말 돌려주겠으나, 진짜로 뒷걸음질을 치다가 공책이 떨어지려고 한다면 손을 뻗어 공책을 잡아주었을 것이었다.
게다가 생각보다도 더 엄청난 실패! 안타깝게도 처참한 사치의 연기력으로는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교사를 속여넘기기란 애초에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거짓말이면 너도 혼날 줄 알라는 소리에 안 그래도 파리한 안색이 한 층 더 파리해진 것만 같다. 저벅, 저벅, 부스럭, 툭, 이제는 낡은 실내를 바쁘게 진동시키는 발걸음과 물건을 뒤지는 따위의 소리들만이. 선생의 포위망은 점점 소년이 숨어들어갔던 곳을 중심으로 좁혀져만 가고.
마치 제 목이 죄이는 것만 같은 묘한 압박감같은 것을 느끼며, 사치는 불안한 눈길을 차마 감출 수가 없었다. 이윽고 잡동사니 뒤를 흘깃거리는 제 시선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선생이 상자를 들어내고 말았을 때. 거기에는 틀림없이 검푸릇한 머리가,
"....어."
......없다?
어어어어없다~~~!!!~!??!?!? 멀리서 봐도, 믿을 수 없어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봐도 역시 아무도 없다. 대번에 머쓱한 얼굴을 한 선생이 어질러놓은 물건들을 본래대로 복구하고 창고를 나설 때까지, 얼떨떨한 기분으로 사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환상이라도 본 건지 어딘가 어벙벙해진 얼굴은 덤이다. 뭐, 뭐지? 이상한 거라도 본 건가? 설마... 귀신? 기분 탓인지 공기가 으슬으슬해지는 것 같은 것을 애써 무시하고, 피, 피곤했나 봐, 환각 따위로 치부하고 소년이 숨어있었던 상자에서 막 시선을 떼었을 때. 또 다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
나, 나, 나낫, 나, 나왔다~~~~~!!!!~!~!!!! 역시 사람이 아닌가 봐~~~!!!!! 게다가 이쪽으로 온다~~~~!!! 마음 속으로 온갖 비명이란 비명은 다 질러대는 사치였지만, 현실은.... 그저 얼굴만 파리하게 질린 채 소년이 흔드는 대로 팔만 덜렁덜렁 흔들릴 뿐.
"어, 어어, 어떻게...."
아니, 사, 사람? 아니면 귀, 귀, 귀신이세요? 잡혔던 손이 떨어지자마자 뒤로 두 발짝, 탁탁, 물러난다.
유즈루는 계속해서 괜찮다며 애써 안심시키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천진하게 웃는 친절한 얼굴을 보면 볼수록 작은 덩어리같은 것이 턱, 턱, 하고 가슴 한 켠에 쌓여가는 기분이 든다. 눈이 나쁘다는 점이 이렇게까지 맘에 들지 않았던 적이 없다. 그 후로도 몇 분,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반짝거리는 덩어리 비슷한 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어쩌면 하수구 틈새로 떨어졌거나, 까마귀같은 것이 벌써 물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음같아서는 찾을 때까지 몇 시간이라도 있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더 이상 소년을 옆에 세워 두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다 싶어 그만두기로 했다. 어디까지나 아직 주변에 떨어져 있다는 전제 하에서지만, 피어싱은 소년과 헤어진 뒤에라도 다시 와서 찾아보면 될 일이다. 그래, 지금은 유즈루의 말마따나 고기만두를 사기로 했으니까. 일단은 이렇게라도 괜찮아진다면. 소년이 이끄는 방향대로 가볍게 이끌리며, 묘하게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 대신에 조용히 마음 속으로 다짐하는 것이다.
"..대신에, 2개, 먹어도 괜찮아요!"
하고. 앗, 그걸로 배가 차지 않으면 3개라도..! 아마 이 때를 위해서 조용히 용돈을 모아 왔던 거라고 사치는 생각했다! 머릿속으로는 아마 진열된 만두를 다 털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이왕이면 피어싱 값 만큼의 간식거리를? 그런 생각들을 진지하게 해 대며, 언제 그랬냐는 듯 사치는 한 손에 지갑을 그러쥐고 편의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듣고보니 그건 그렇다 어쩌면 제겐 그런 재능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예의 그 양아치들과 같은 폭력적인 태도를 남에게 보일 용기가 없으니 아무래도 미움받는 건 싫으니까 그래서 물러터진 거겠지 역시 재능 따위 없는 제게 걸맞다고 할까
"...생각해볼게."
미카가 느릿히 답하지만 이는 예의상의 입발린 말에 가까운 대답일 테다 이 후배의 말들이 결코 빈말이 아니래도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매진하기엔 너무 지쳐버렸다 매캐한 연기가 공기 속으로 흐릿하게 퍼져나간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미카는 다 태우고 얼마 남지 않은 꽁초를 뱉어내고 비벼 끈다 숨을 내쉬자 독한 향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신경 써줘서 고맙네."
미카는 제 옷을 탈탈 털며 후배를 흘겨본다 무신경하게 툭 내뱉는 말이지만 그 속내만큼은 진심이었을까
요즘은 편지를 받으면 기대감에 속이 바글거립니다. 탄산을 처음 마셨을 때 딱 이런 기분이었으니, 탄산이 빠졌다는 표현은 겸손이 과하셨던 겁니다.
꽃 압화라는 게 꽤 시간이 드는 과정이라 들었습니다. 책 사이에 꽃을 끼워놓고 한 번 닫으면 완전히 마를 때까지 다시 열어볼 수 없다죠. 찰나를 영원 속에 담기 위한 과정이지만 여전히 야속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다행히도 나는 좋은 벗을 두어서, 노력 없이 찰나를 간직하게 되었군요. 기분 아주 좋습니다.
추신. 어제는 봄의 시작을 보내시더니 오늘은 봄의 한창을 보내시는군요. 내일은 봄의 끝을 보내시고 저무는 꽃처럼 사라지실까 두렵습니다. 농담이에요.
단호하고도 즉각적인 반응에 그는 배를 붙잡고 웃었다. 눈 가늘게 뜨며 입꼬리 씨익 끌어올리는 표정이 무척이나 얄밉다. 놀리기라도 하듯 흐르지도 않은 눈물 닦는 시늉 하더니, 자판기에 비스듬히 기대며 팔짱 끼고 말한다.
"당연히 농담이지. 내가 지금까지 이걸 얼마나 때렸는데, 그게 진짜면 오늘밤에 자판기 귀신이 나 죽이려고 찾아올걸? 내일도 내가 살아 있으면 귀신은 없는 걸로 치자."
농담의 연장이기도 하지만 결국 확실한 부정은 아니지 않은가. 저주라니, 맹랑하기도 하지. 무서워하면서 던질 원망이 실제로 해봤자 얼마나 아프겠냐마는, 그는 초등학생을 상대할 때도 진심으로 나올 정도로 유치한 신인 관계로 이것을 사소한 보복 쯤으로 치기로 했다. 어린 여자아이 장난 정도는 귀엽게 봐줘도 되는 것을 참.
린은 안즈가 제 화려한 사고 경력에 말을 잇지 못하자 한손을 들고 브이자를 만들어 보였다. 자랑할 일 아닌데도 표정이 참 뿌듯하다.
"일부러는 아니야! 그건… 그, 뭐냐. 어쩔 수 없는 필연이고 비극이었지."
장난치다 실수했다는 소리를 참 번지르르하게도 한다. 그래도 앞으로는 조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아무리 실수라고 해도 앞으로도 계속 이 빈도로 사달을 냈다가는 조만간 크게 징계 받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놀랍게도 그는 학교생활에 나름의 책임의식을 가지고는 있었다. 어찌되었든 애 학교생활 도와주려 온 건데, 정작 처벌 같은 것 받느라고 제대로 못 붙어 있으면 큰일이지 않은가. 그러니만큼 같이 가서 이야기해 주겠다는 안즈의 호의는 참 중요했다.
"선배님은 참 마음씨가 좋네. 그럼 지금 갈까?"
속으로는 웬만한 학생들 모두 한창때 어린애라 생각하는 주제에 선배라고는 잘도 부른다.
"이름이라면 어느 쪽이든 상관 없는데……. 그럼 공평하게 상으로 하자. 나는 안즈 씨가 더 마음에 들거든."
어감으로 시작해서 어감으로 대충 끝나는 호칭 정리, 이렇게 날로 먹어도 되나 싶지만 둘 모두 신경쓰지 않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조합이다 싶다. 아무튼간에 안 되는 기계 더 붙들고 있어봤자 소득은 없을 테다. 린은 습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먼저 쌩하니 사라지려다, 다시 후다닥 돌아와 조금 떨어진 저편에서 손짓하며 씩씩하게 외쳤다.
평범한 오해와 착각이었다면 심약한 소녀의 호들갑 정도로 그칠 상황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소년은 이매망량이 맞다! 심지어 신성한 귀신이기까지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학교에서 가장 먼저 그의 정체를 알아챈 사람인 셈이다. 비량이라 해도 말하지 않은 생각까지 읽어내는 재주는 없으니 상대가 정확히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무슨 의심을 하는지는 표정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손 붙잡고 신나게 흔들던 동작이 어떻게 했냐는 질문을 듣자마자 뚝 멈추고 만다. 그러나 웃는 얼굴만은 여전한 채, 그는 속으로 머리를 굴려 보았다. 이런, 저 여아가 가까이까지 와서 확인하지만 않았다면 안에 숨은 공간이 더 있었느니 하는 식으로 둘러댈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상대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봐 버린 시점에서 골몰해 봤자 이 의심을 논리적으로 파훼할 만한 핑곗거리는 달리 없으리라.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자고로 찔리는 게 있을수록 뻔뻔하게 나가야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을 수 있는 법이랬다! 그는 여학생의 손을 놓고 제 턱 매만지다 검지를 척 세웠다. 명랑한 음성이 창고 안에 울려퍼졌다.
"아하, 그건 말이지! ……알면 다쳐."
이딴 게…… 설득? 린은 단 한 치의 주저 없이 당당하게 배를 쨌다. 그래도 목소리는 농담하듯 가벼워 장난스레 들리는 투다. 문제가 있다면 그가 상대 여학생의 성격이 대범함과는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를 아직 모르고 있다는 건데. 그리고 일순 그 말에 호응하듯 창고의 조명이 가늘게 떨리며 깜빡거렸다. 그가 손쓴 건 아니다. 오래된 등이 때마침 맛이 가려는 모양인데, 하필이면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다. 입만 빙긋한 얼굴로 푸른 시선이 녹색빛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 평소에는 그리도 입 다물지 않고 종알종알 떠들어대곤 하던 주제에 그는 그대로 말이 없었다. 이미 뻔뻔하게 밀어붙이기로 한 거, 상대가 넘어가줄 때까지 더 변명 않고 부담스럽게 쳐다보기로 한 것이다. 뜬금없고도 괴상하며 어색한 정적이 어둑한 공간에 켜켜이 쌓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