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팔꿈치 기대고 턱 괴며 짓는 미소가 제법 짓궂다. 딴소리는 아니라지만 꼴랑 한 문장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소리다. 시답잖은 용건으로 집적거리는 짓에 막 불 붙이려던 그는 상대방의 부탁에 웬일로 순순히 비켜주었다. …정정한다. 비켜'는' 주었다고 해야 맞겠다. 비켜는 줬어도 귀찮게 할 생각은 여전한 모양인지 남학생이 담 넘으려 한다면 린은 그 옆에 붙어서 계속해서 종알거리는 것이다.
"어디 가게? 학교 째는 애들은 pc방 가서 노는 게 보통이던데… 아, 여기는 pc방이 아니라 넷 카페라고 했나? 어쨌든 집에 가는 건 아닐 거 아냐."
그걸 알아서 뭐하게, 라는 답이 돌아와도 할 말 없는 참견이지만 얼굴에 깐 철판 두꺼우신 도깨비님은 상관 안 한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면서 괜히 친한 척하며 말 건네는 행태가, 많이 해 본 모양인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가미즈나 고등학교에 입학하려면 인성면접이 필요했었나 고민해봅니다. 같은 반의 와타누키 씨도, 몇 반인지는 모르는 같은 학년의 디자이너 지망생 씨도, 옆 반의 키리나즈메 씨도, 그리고 지금 복도에서 부닺친 선배님도 하나같이 상냥합니다! 이러다가 다같이 불량한 학생들에게 끌려가있는 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선생님들이 힘내서 불량 학생들을 막아주어야 합니다!
“네. 심부름 중입니다.”
주워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질 못 해서, 부딪혀서 죄송하다고 사과도 못 드려서 염치가 없습니다. 공책을 더 들고 있지라도 않게 해야겠어요!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공책들을 건네받기 위해 잠시 공책들을 한 팔로 안고 남은 팔을 뻗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되게 손을 잡고 일어나라는 것처럼 보여요! 말해야 합니다!
“주세요.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유치원생 아니에요.”
선배님의 말을 듣고 눈으로 대강 공책을 세어보았습니다. 내지 않은 학생을 제외하고 몇 권의 공책이 있어야하는지 까먹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이게 바로 선배님의 노련미일까요? 또 작은 도움을 하나 받아버렸습니다.
>>181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쉽게도 아직 전파를 타고 다니는 사이버귀신은 못 돼서 그건 안 되겠지만... MZ한 신이니까 악플 자료 모아서 보내 주는 것까지는 가능할 것 같은데??? 아ㅏ아니 우리 애 계정에 악플을 달다니 인생의 쓴맛을 좀 봐야겠구만~~!!!!!하고 말이지~😈
꽤나 후배님이 화가 난 상태인 것 같다. 케이는 후배님이 씩씩하게 일어나 손을 내미는 것에 자연히 잡고 일어나라는 뜻인 줄 알고 손을 내밀었으나 이내 이어지는 말에 멋쩍어졌다. 흠. 괜히 심술이 나서 공책을 주지 않고 뻗은 손 그대로 잡고 일어났다. 무게를 실은 것이 아니라서 그냥 손만 잡고 혼자 일어선 것에 가깝지만 말이다. 혹시나 오해할까 싶어 손은 담백하게 바로 놓아주었다.
“수학 수업이었던 건가요? 아하, 이 선생님 매번 공책에 문제풀이를 적어오는 숙제를 내줬던 것이 기억나네요.”
후배님의 말을 무시한 채 딴 소리를 하며 이내 걸음을 교무실로 향했다. 꽤나 후배를 괴롭히는 모양새지만 그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단 말이지. 감히 신인 자신을 속인 죄값이라는 것이다. 그것치고는 너무 사소한 심술이긴 하지만 말이다.
" 음 - 나 누군지 알 것 같기도 한데. 으음- 지금 머릿속에 조금 떠오르는 코멘트 있던 것 같아. "
꾸준히 활동하고 있어서 구독자수도 늘고 있는 추세였고 매일 코멘트라던가 많이 달리고 있었다. 매일매일 자기 전에 새로 달린 것들이 없나 확인해보고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으로 읽었다. 여러 번 달아주고 예쁜 말만 해주는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리오는 그 중에 눈에 띄는 닉네임도 있었던 것 같아서 내일 중으로 밝혀내겠다고 장난스레 말했다.
" 특별한 일이 없으면 계속하고 싶어.. 아니, 특별한 일이 있어도 계속하고 싶어. 나는 음악을 직업으로 할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두, 즐거우니까. 즐거운 일은 계속하고 싶어. 미야랑 있는것도 즐거우니까 계속 하고싶고 "
노래는 잘 모르겠지만. 리오는 그렇게 생각하며 에헤헤 하고 웃었다. 정식으로 배운 것도 없이 혼자서 기타를 쳤을 뿐이다. 그게 너무나도 즐거워서 이걸 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 걱정도 없이 살아있는 것 같다는 마음과 자유까지 느껴져서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있다. 즐거운 일은 계속하고 싶다. 음악이라던가 친구와 함께 있는 것이라던가 영원히 이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너무나도 우울해져서 견딜 수 없어지곤 했다. 그래도 지금은 고개를 돌리면 바로 옆에 미야가 있으니까.
" 고평가네- 앗, 그래도 나 귀엽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응. 자기 입으로 귀엽다고 말하면 좀 그렇잖아. 독특하다는 건 칭찬이겠지? 미야가 하는 말이니까 칭찬일거야- 그래도 미야, 어른스럽네. 나는 세계를 공유한다거나 그런 어려운 말은 잘 몰라서. "
리오가 사람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의 심상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존중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넓혀나간다-와 같이 어렵고 거창한 것은 없었다. 애초에 새로운 사람을 대하는 것도 어려워하는 주제에 그런 것들까지 신경 쓸 여유라곤 없었다. 심상세계라. 리오는 그 말을 혀 끝에서 한 번 굴려보곤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모든 곳에 집 주인의 기운이 묻어있다.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닐지도.
" 그럼 반대로 내가 말해줄 차례인가- 으응, 그렇네. 미야미야- "
리오는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대뜸 다가와서 피어스가 예쁘다고 말해주던 아이. 처음 만났을 때 너무나도 밝아서 눈이 부셨고 감히 자신 같은 사람이 다가설 수 없다고 생각할만큼 밝았었던 아이. 리오는 그랬던 사람이 이렇게나 친해져서는, 없으면 안될 정도까지 되었다고 생각하니 신기하면서도 재밌어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 미야, 엄청 밝았지. 응. 갑자기 다가와선 피어스가 예쁘다고 말해줬고 계속 마주쳤었으니까. 응. 메이드카페에도 와줬었구 "
2년 전의 일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사람을 대하는 것을 어려워해서 계속 밀어냈더니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 시간을 온전히 삼키면서 리오는 천천히 천천히 다가가 이렇게까지 깊은 관계가 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 응. 그렇네. 처음에는 좀 거북..했어. 불편했달까. 아, 아니! 물론 처음에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절대절대절대 아니니까! 처음에만 그랬구,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미야, 둘 도 없는 친구니까. 미야가 없으면 나 죽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응. "
혹시라도 오해할까 리오는 순간 말이 빨라지고 이래저래 사족을 덧붙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레이니어 체리 -> 이노리 선물:흰 바탕에 옥색과 푸른빛의 잎사귀 모양으로 디자인 된 후로시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손잡이와 겉면이 옥색으로 칠해진 새하얀 센스(쥘부채)
사진을 봤을 때 옥색과 흰색이 잘 어울릴 것 같았지 뭐야. 센스는 조금 이른 감이 있으려나? 몰라! 곧 여름이니 사용해주면 기뻐! ps. 편지랑 선물 봤어! 우와, 엄청 기뻐. 내가 마니또인데 마니또가 생겨버린 기분이야 (*´▽`*)너무 맛있어서 홀라당 다 먹어버렸지 뭐야. 초코베이비 통은 깨끗이 세척해서 유용하게 잘 쓰도록 할게, 고마워! (❁´▽`❁)*✲゚*
2.라무네 -> 오구치 선물:벚꽃 무늬가 새겨진 티백 텀블러와 어린잎 차 티백
별래무양하신지요, 라무네입니다.
어느덧 사흘 차에 들어섰으나 들뜸은 쉬이 가라앉지 않으니 이것이 청춘임을 느낍니다. 변덕스러운 겨울의 잔바람 남아있으나 곧 그마저도 지고 벚꽃이 무성하게 드리울 시기가 다가오니, 꽃놀이도 머잖았습니다. 운하를 가득히 채우는 분홍색 화우(花雨)가 내릴 적엔 그 사이에 몸을 뉘고 잠을 청해보고 싶단 공상을 해봅니다. 손끝으로 문지르기만 해도 그 포근한 감각이 느껴지는데, 가득 쌓인 꽃잎 사이는 얼마나 부드럽고 아늑할까요. 향긋함 속에서 눈 감으면 좋은 꿈을 꾸겠지요. 귀하께서는 분홍잎 만발할 때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단순한 것이라도 이야기를 들어 하나하나 알아갈 수 있다면 무엇보다 귀히 새겨듣겠지만, 부담이 된다면 답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움튼 어린잎 속에서, 라무네.
3.아카사 -> 미후유 선물:이미지와 비슷한 모양의 왁스 타블렛 방향제. 향은 박하향같기도 하며 나무의 그을음이 어렴풋하게 드는 것 같은 아련한 먹의 향을 담은 것 같다. https://ibb.co/cb03WMN
먹도, 그 먹으로 쓴 글씨도 잘 관리하면 천년이 넘도록 남아있다고 하네요. 진짜 먹 대신 먹과 닮은 향의 방향제이지만. 한번쯤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
4.⎛⎝(•‿•)⎠⎞⎛⎝(•‿•)⎠⎞⎛⎝(•‿•)⎠⎞⎛⎝(•‿•)⎠⎞ -> 쿄스케 선물:15개입들이 밀크티 한 팩
5.돼지고기 반근 감자 양파 -> 안즈 선물:30ml 섬유향수. 부드럽고 포근한, 그리고 살짝 달콤한 꽃향기가 가볍게 난다.
향기는 취향을 타서 어렵지만 침구같은데 뿌리면 잠들 때 포근하고 향기롭게 좋은 꿈을 꿀 수 있을테니까
6.팝콘 -> 리오 선물:연필이나 펜 뒤에 꽂아 달아놓을 수 있는 회색 고양이모양 지우개
지나가는 길에 있는 가게에서 눈에 띄길래 샀어요. 회색 고양이와 닮은 것 같아서요. 고양이는 늘 나른하고 행복해 보이더라고요. 고양이 같은 하루 보내길 바라요 :)
7.오마모리 -> 린 선물:장난감 수리검 세트.
그때 갑자기 닌자가 나타났다는 말을 아시나요? 일이 단단히 꼬여서 복잡한 상황에 닌자가 나타나 모두를 도륙 내버리는 속 시원한 인터넷 밈이랍니다. 어떻게 보면 만병통치약인 거죠. (닌자 = 만병통치약) 어떤가요, 남궁씨. 이것이라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는 자신감이 차오르지 않습니까? 넘치는 자신감으로 뭐든 해내기를 바라며 선물 보냅니다.
+) 선물로는 돈 주고 사기 아까운 것이 주는 게 최고라는데 괜히 쓸데없는 선물을 준비한 걸까요?
8.시미즈 -> 사야카 선물:병 안에 담긴 벚꽃 모양 다과 그리고 목련, 산수유, 민들레, 개나리 등 봄 꽃차 4종
팔찌는 마음에 드셨는지요? 당신에게 들킬까, 멀리서도 바라보지 못하니 마음에 들어 하셨을지 몰라, 걱정이 듭니다. 바라건대 후에 당신과 마주하였을 때 마음에 들었다고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봄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 아니라 향으로도 맛으로도 즐길 수 있는 차와 다과를 보냅니다.
9.해상 표류어선 -> 미유키 선물:접이식 양산과 딸기 한 팩
이번 봄도 햇빛이 너무 따사로와요. 나무를 심으면 세상이 행복해지리라고 믿고 싶네요. 좋은 꿈만 꾸고, 즐거운 하루만 보내시길.
10.해피해피 스마일 -> 케이 선물:도레이× 사의 안경닦이 (남색)
안녕, 친구! 어제 하루는 어땠어? 최고로 멋진 하루였어? 오늘은 그보다도 조금 더 다정하고 따듯한 날이었길 바라. 이번 선물은 좀 실용적인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골라봤어.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p.s. 있잖아, 실용적인 선물이라는 건 그만큼 일상에서 쓸 일도 많다는 소리다? 쓰는 동안 내 생각 많이 해줬으면 좋겠네. 나는 누구일까, 맞출 수 있어?
11.오렌지 테러 -> 토아 선물:프리저브드 플라워 무드등
【편지칼이 있다면 예쁘게 뜯어주세요】 안녕 :D... 몇 번째지 세 번째 인가? 오늘 준비한 물건은 무드등이야. 안에 꽃이 들어있지? 꽃말이라던가 조금 공부해서 좋은 꽃을 골라보려고 했는데 잘 모르겠어서 예쁜 걸로 골라봤어. 점원하고 상의를 좀 오래해서 고른 녀석이니까 더 보기 좋을거라고 생각해. 꽃말을 좀 공부해서 골라볼 걸 그랬네. 아쉬움이 조금 남는 것 같아.
슬슬 너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다.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하늘을 보면서 뭘 떠올렸는지 뭐 그런 간단하면서도 가벼운 것들. 이게 끝나는 날이 되면 내가 너를 찾아가 볼까? 후후. 만나게 되면 재밌을지도 모르겠네.
글이 너무 길면 보기 힘들테니까 이 쯤에서 줄이도록 할게. 어제보다 더 행복하고 내일보단 덜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D
12.사이트에서 광고를 허용해 주세요😭 -> 치요 선물:가공하지 않은 아쿠아마린 원석을 금속 줄에 매단 간단한 네클리스
수업만 한 시간 빠지려고 했을 뿐 학교 째려는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비슷하게 일탈 중이라면 반가운 처지 맞다. 그렇게 멋대로 생각하는 건 둘째치고, 이 흐름은 꼭 성가시게 들려붙으려는 거머리의 전조처럼 들리지 않는가. 과연 그는 저 역시 담 한쪽을 슬쩍 붙잡고는 뻔뻔스럽게 이런 소리를 한다.
"에이, 매정하네. 볼일은 이제부터 만들면 안 되나?"
이 1학년, 참 질척거린다……. 짐짓 너무한 소리 들었다는 듯 시무룩한 표정 짓지만 물론 상대에게 이 장단에 맞추어 주어야 할 의무는 없다. 그것을 알아 혹시라도 남학생이 가 버린다면 손해볼 것은 자신이니, 린은 그대로 바닥을 박차고 훌쩍 뛰어 저 먼저 담벼락 꼭대기까지 순식간에 올라가 가지 말라는 듯 버티고 앉았다. 이래 봤자 다른 쪽 담으로 가면 뚫릴 텐데 괜한 짓 아닌지. 한쪽 다리만 책상다리 한 그는 몸을 앞으로 슬쩍 숙여가며 말한다. 중요한 대담이라도 한다는 양 슬쩍 한쪽 손 입가에 세우고 조심스레 속닥거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인데, 너 가는 데 나 좀 끼워주면 안 돼? 말 거는 거 싫으면 입 다물고 있을게."
오늘 학교에서 받아온, 난생 처음으로 받아보는 마니또 선물을 들고 노아는 이 마니또 행사라는 것이 사실 신들끼리의 친목을 다지는 교류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받은 이 선물은 필멸자로서는 구할 수 없고, 손을 대어서도 안 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신사의 다른 이들과 나누지는 못하겠지만, 그 또한 나 혼자 즐기라는 뜻이겠지. 짓궂은 비밀친구로고.'
하고 속으로 되뇌이며 노아는 웃었다. 자신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는 듯한 상대방의 메시지로 미루어보건대, 노아는 어쩌면 자신도 상대방을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소녀는 티백 상자를 책상 위에 조심스레 올려두고는 좀더 격식을 차린 옛날 옷을 꺼내입기로 했다. 이런 종류의 차를 흠향하는 데에는 그만한 준비가 필요한 법이다. 교복을 벗어두고 원래라면 명절이나 축제 때에만 꺼내어입는 새하얀 우치카케를 고이 차려입고 나서, 노아는 옷자락을 소리없이 끌며 티백 상자를 들고 대청마루로 나섰다.
"게 누구 있느냐. 따뜻한 물과 찻주전자를 가져오너라." "차는 무엇으로 가져다드리면 되겠습니까?" "차는 내 가져온 것이 있으니 찻주전자와 온수만 가져다다오." "알겠습니다─ 노아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예복 차림을 하시고..." "그만한 까닭이 있느니라.
이런 종류의 차는 우리는 데 오래 걸린다. 찻주전자에 온수를 따르고 티백을 넣고 뚜껑을 닫은 뒤에, 노아는 대청마루에 마련되어 있던 제단 앞에 소반과 방석을 가져다놓고는, 문을 열고 안의 향로에 새 향을 꽂았다. 성냥을 그어 향 끄트머리에 별똥을 튀기자 청아한 향기가 피어난다. 그제서야 방석 위에 착석하고, 차가 우러나길 기다려 눈을 감고 가만히 참선한다. 그리고 제단에 찻잔을 올려두고, 차를 따랐다. 별 없는 밤하늘 아래의 강물을 떠올리게 하는 맑은 색이었다.
그대. 용서받지 못한 이여. 그대가 가야만 할 곳으로 돌아가 영혼에서 죄를 씻어내고, 마땅한 업보를 치르고 공덕을 쌓아 다시 윤회의 바퀴 속에서 마침내 행복하기를.
선배님이 사과하실 일은 하나도 없는데 사과받아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거절해요. 정신을 빼놓고 걷던 것도, 조심해야 했던 쪽도, 도움을 받고 있는 것도 전부 저입니다. 오히려 아무 잘못하지 않은 선배님이 사과를 함으로써 제가 죄책감을 크게 느끼길 바라는 걸까요? 그런 거라면 성공했을 지도 모릅니다.
“손이 아니라 공책을 달라고 했어요.”
놀란 티가 나지 않았길 바랍니다! 애써 표정을 관리한 것 같아요. 눈을 많이 깜빡거리지도 않았고, 잔뜩 굳어버린 것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에요. 다행인지 선배님은 다른 이야기만 하십니다. 아니, 아예 움직이고 계세요! 어디로 가시는 걸까요? 설마 교무실일까요?
“도둑이에요?”
선배님을 뒤쫓아갑니다. 아니, 앞질러 가서 마주 보고 섰습니다. 그래야 더 앞으로 갈 수 없습니다. 공책을 교무실에 가져다주는 도둑이라니, 그런 도둑이 어딨을까요. 못된 도둑은 접니다! 선배님의 쉬는 시간 도둑이요!
빽 소리 지르다시피 답한 안즈는 몸서리를 쳤다. 매우 크고 즉각적인 반응이다. 진짜, 엄청, 싫어! 다시 한번 한마디 한마디 꾹꾹 눌러 강조하며 말했다.
"그런 걸 들어버리면 혼자 있을 때 무섭단 말야!"
그런 부류의 이야기는 평온하던 일상에 '#공포'라는 태그를 붙이고 만다. 예를 들어 홀로 샤워를 하다 거울과 눈이 마주칠 때라든가, 아니면 그냥 갑자기 주위가 너무 조용한 것처럼 느껴질 때라든가, 그것도 아니면 밤에 잠에서 문득 깨어났을 때라든가! 심지어 한 번 생각이 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아무리 다른 생각으로 돌리려고 노력해도 등 뒤의 섬찟함은 잊기 어렵다. 그러니까, 정말 싫다 이 말이다!
"그러니까 금지야, 금지! 거기서 더 말하면 무서워질 때마다 저주해버릴 줄 알아!"
원망할 거야! 두 손을 꼭 쥐고 소리친다. 상대가 신, 그것도 도깨비 신이라는 걸 감안하면 심히 귀여운 협박이다. 분명 그 사실을 모르니 던질 수 있는 말이겠지.
"어어..."
천하의 안즈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마 이런 것까지 예상하진 못했겠지. 창문 깬 정도야 들어봤을지 몰라도 나머지는... 비품 담당 선생님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 갈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가끔가다 있는 일도 아니고 최근 일주일 사이의 일이라니! 잠시 어버버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던 안즈는 잠시 후에야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고의는 아니지? 힘이 그냥 엄청 센 거야? 세상에, 농구대 철판 휘었단 소리는 또 처음 듣네!"
많이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깜박인다. 하지만 놀랐다 뿐이지, 생각이 크게 바뀌진 않은 모양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말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다.
"그럼, 후배님 잘못은 아니니까 괜찮을 거라구! 나도 같이 가줄 거고!!"
안즈는 해맑게 웃었다. 어디서 선생님 복장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둘과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말이다.
"그럼 린 상? 아니면 린 군? 어떻게 불러주는 게 좋아?"
후배님 편한 쪽으로 부를게! 그렇게 말하는 안즈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린의 다소 뻔뻔한 부탁에도, 단순해 보일 정도의 태도로 흔쾌히 승낙했다.
"참, 그리고 그러면 나도 이름으로 불러 줘! 어차피 크게 신경 안 쓰기도 하고... 나만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좀 이상한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