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하네 아르바이트 하는 거 보고 싶은데 딱 이렇다할 상황이 떠오르지 않아서 아쉽네 흑흑. 하네가 선생님 심부름으로 수행평가 공책 같은 걸 혼자 옮기고 있는 걸 도와주는 게 무난할 것 같기도 해~ 두개를 합쳐서 공책을 들고 가는 하네와 모퉁이에서 부딪히는 바람에 쏟아진 공책을 같이 주워주고 옮기는 걸 도와준다거나~
"아서세요. 케이군. 유(遊)를 즐기는 것은 좋지만, 누구를 돌보는 것은 더 고려하고 정하길 바라요. 이것은 제 조언이에요."
낮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한 일족의 시작을, 끝을 바라본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조언. 미유키는 매서워진 눈으로 너를 바라본다. 인연생인연멸(因緣生因緣滅)이라지만 애정하는 것들의 죽음 앞에서 너는 초연 할 수 있을까. 얽매이고 나면 아무리 깨달은 도인이라 하여도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봄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오는 것처럼 자연의 순리라 할 것이라도. 제 문제로 다가올 때는 고개를 돌리며,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으니.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지켜보며 허무만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미련으로, 집착으로 남을 수도 있는 것이다. 미유키의 시선은 네게서 멀어져 점점 제 발치로 내려가다, 짐짓 평이해진 얼굴로 다시 고개를 들어 널 본다.
하는 미유키의 눈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유순하게 풀어져 있다. 이어지는 말에는 널 따라 후후, 웃음소리를 낸다. 괜히 네가 악연의 가부키 사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터니. 예상이 가는 것이었을까. 미유키는 네가 시작 하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초를 치는 종소리에 눈가를 살짝 구겨낸다. 뒷짐 지며 서는 널 아쉽다는 표정으로 보다가는 고개를 내젓는다.
"그래요. 언제 같이 보러 가죠. 그때 못 다한 이야기도 다 해주시길."
하며 못내 아쉬운 것인지. 널 물끄레 바라보다가 돌아 멀어졌다 돌아온다. 네게 역사책을 건네며 한번 더 확인하듯 묻는다.
두려워 말라. 익히 천사의 첫 마디라고 하면 떠올리는 문장이다. 사실 그럴만도 하다. 천사들은 원전에 따르면 수많은 눈과 날개가 뭉쳐진듯한 무시무시한 꼴을 하고 있다고 하니까. 그런 와중에 집채만한 눈깔괴물이 공중에서 갑자기 나타나면 누구든지 벌벌 떨 것이다. 그렇기에 말했을 것이다. 두려워 말라.
"천사답다고 해야하나..."
상당히 뭐라 부르기 힘든 별명을 사용한 마니또가 내게 준 것은 열 다섯개의 치즈맛 우마이봉이었다. 천사의 은총 치고는 뭔가 굉장히 빈티지하다고 해야할지. 물론 실망을 했다고 하면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소소하게.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의미가 깊은 선물. 천사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천사가 전해준 일상적인 향기가 참 가슴 깊이 다가왔다.
우마이봉 하나의 포장을 뜯고, 아삭 하고 한 입 베어물었다. 방에서 홀로 우마이봉 하나를 우물우물 씹으며,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흠, 악령이 사람들을 홀리거나 습격한다는게 그건가보군. 원혼이라고 해야 할지. 하긴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뭔가 안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원혼의 짓이라고들 하니까. 악의를 품은 영혼의 습격 같은 심령현상들에 대해서도 대비가 된 그런 설정인걸. 여러모로, 자신만의 세계에 엄청나게 몰입해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조금 걱정이 될 정도로.
"...사령술사? 내가?"
음, 세계관 확장 내지는 편입을 시도하려고 하는 거 같군. 오컬트는 좋아하긴 하지만 스스로 그런걸 자칭할 생각은 없다. 내가 그런걸 시도해봤자 뭔가가 진짜 일어난 경우도 없었고. 매번 시도해보고,'그런 거 없다'라는 결론이 도출되었고, 그걸 토대로 기사를 쓴다. 당연히 혹평 투성이었다. 믿는 사람들은 나보고 엉터리라고 뭐라 했고, 안 믿는 사람들은 그런 애들 장난을 굳이 해봐야 아냐며 뭐라 했다. 언론이란 그런것이다. 진실을 말하면 어디서든 두들겨 맞는 법.
"그럴리가. 난 그냥 고등학생이야. 오컬트 좀 좋아하고, 떠들어대는거 좀 좋아하고. 뭐, 사령술이라 말하는 의식 같은걸 검증삼아 해보긴 했는데 당연히 하나같이 소용없더라고."
아직 그럴 생각도 없었다는 듯 웃음지으며 답한다. 하기야 그와 같은 사람이 한 일족을 돌본다는 것이 잘 연상되지는 않는다. 무언가에 과한 관심을 기울이고 계속하여 지켜보고 하는 그런 일이라는 것이 말이다. 생각해보면 미유키는 일족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으니 이에 대해 조심해서 말하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미유키의 표정을 살피며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인간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꺼낸 터라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주어진 시간이 짧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이후로 미뤄야 더 재미있어지지 않겠는가.
흔쾌히 약속에 동의하고 역사책을 건네며 하는 말에 케이가 작게 웃었다.
“그럼요. 재미있는 가부키 극을 한 번 찾아 놓겠습니다. 교과서는 깨끗이 쓰고 바로 돌려드릴게요.”
케이는 역사책을 받으며 가볍게 인사한 뒤 반으로 돌아갔다. 공연 일정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막레!!! 미유키주 같이 일상 돌려줘서 재미있었어~! 교과서는 깨끗이 쓰고 바로 돌려줬을 거야~
안녕하세요, 타카나시 하네입니다.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공책을 배달하고 있습니다. 수행평가에 반영되니까 조심히 잘 옮겨야 합니다. 선생님이 제게 맡겨주신 것이기도 하고, 같은 반 학생들의 점수가 걸려 있어요. 벌써 2학년이니까 교무실이 어딘지는 잘 압니다. 그래서 방심했던 것 같습니다. 자만은 금물인데, 자만해버린 죄입니다...
“어?”
공책들을 차곡차곡 잘 쌓아서 옮기고 있었는데, 계단에서 벗어나 모퉁이를 꺾을 때 누군가가 시야에 아주 가깝게 들어왔습니다. 부딪치고 말 거에요! 뒤로 피하려고 했는데, 피하려다 보니까 공책들도 쏟아지려 합니다! 제가 조금만 더 빠르고 날쌔게 움직였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텐데, 결국은 둘 다 실패했습니다. 뒤로 가려던 발은 오히려 꼬였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사이 모르는 학생과 부딪혀 넘어졌습니다. 공책들은 크게 쏟아졌습니다. 부딪친 분은 다치시진 않으셨을까요? 크게 넘어지셨으면 큰일입니다! 공책들은 찢어지거나 구겨지고, 상한 페이지가 생기면 안 되는데 이것도 큰일이에요!
“그, 저기요, 안 다쳤어요?”
정신이 없습니다! 아야—하는 소리가 나올 뻔한 걸 집어삼켜요. 제가 넘어진 걸 신경쓰기에는 신경써야할 부분이 너무 많아요. 넘어지는 소리에 복도의 다른 학생들이 쳐다보는 것 같아서 민망해집니다. 일단 가까이 있는 공책부터 하나 집어들어 품에 안습니다. 다른 손으로 만지작거려보니 교복 주머니에 반창고가 있습니다. 다치셨다고 하면, 온전히 제 잘못들이라 보건실에 데려다드려야할 것 같습니다. 몸이 두개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