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미안해. 차마 뱉지 못한 뒷말은 식도 너머로 쭉 삼킨다. 정말 친구한테 이런 걸 시켜도 되는 걸까. 리오가 싫어하면 어떡하지? 눈치 본 게 무색하듯 리오의 태도는 참 의연했다. 어느덧 리오 대신 다시 나타난 아리스는, ······주머니에 넣었던 마스크를 다시 턱에 걸쳐 쓴다? 이 아이,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건 리오는커녕 아리스도 아니다. 이건··· 얼음 공주님? 언제 그랬냐는 듯 날카로워진 눈빛에 미야나기는 입을 쩍 벌렸다. 게다가 이내 그녀에게 쏟아지는 건 이전의 다정한 말들 대신에 차가운 비수들이다. 으악, 어쩌지! 리오 진짜 짜증났나 봐, 어떡해. 역시 괜한 걸 시켰어. 휙 돌아 주방에 들어가면서도 중얼중얼, 욕지기를 뱉는 걸 보며 미야나기는 울상지었다. 그리고 째릿- 짜증스러운 눈빛에 몸을 한 번 움찔. 차갑다. 정말 얼음 공주님이네. 당당하게 오픈된 구조의 주방에서 웍을 꺼내 밥을 볶는 리오의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게 지켜보던 미야나기는 문득 리오와 눈이 마주치고, 험상궂게 구겨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작게 히익! 하고 놀랐다. 훔쳐보던 거 들켜버렸다—! 집에 가고 싶어! 숨 죽이며 고개를 숙이고 있자 리오가 곧 오므라이스를 가져왔다. 근데 잠깐, 케찹으로 써져 있는 글씨는······ ‘죽어’? 무서워, 리오!
“미안, 리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리스 양. 화났구나······. 아리스 양한테 인센 돌아갈 거라 생각헤서 주문한 건데 되려 성가시게 만들서 정말 미안해.”
당황한 미야나기가 사과의 표현들을 횡설수설 읊는다. 짜증나, 귀찮아, 아 정말 짜증나네, 그리고······ 응? 리오에게 매도 당하며 연거푸 고개를 숙이다 말고 미야나기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리오, 자세히 들어보니까 이거 비난이 아니라 걱정의 말이야. 밥이 뜨겁다는 걸 경고해주고 어떻게 먹어야 예쁘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건지 알려주고 있잖아. 리, 리오—! 미야나기는 고개를 번쩍 들고 감동 받은 눈빛을 발사······ 하려고 했으나.
- 우효, 아리스 쨩! 정말이지 너무 귀엽다~! - 굉장해! 어이어이! 저거, 얼음 공주의 악의와 정성이 담긴 수제 철판 오므라이스잖냐~! 오늘은 공짜로 이런 구경을 다 하고, 초 럭키 데이! - 저 여자 녀석, 감히 아리스 짱의 [매도]를 당하다니······. 용서 못 해! 다음에는 반드시 이 내가~!
뭐, 뭐야 이거! 일부러 저 아저씨들, 피해서 죽 떨어진 구석 바 테이블로 온 건데 주목 받고 있어! ······게다가 머리 벗겨진 저 아저씨, 날 견제하고 있다—!! 엄청 견제 중이야! 벌벌 떨리는 손으로 스푼을 겨우 잡고 한 숟가락 뜨려는 와중에, 이번에는 리오의 차가운 눈빛이 총알처럼 비수를 꽂는다. 으으, 이런 걸 하라고? 저 아저씨들 잔뜩 쳐다보고 있는데? 미야나기는 금세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손으로 하트를 만든다.
리오는 쿠키를 받았고 눈을 빛내며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이리저리 사진을 잔뜩 찍었다. 그리곤 그것이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손에 꼭 쥐고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응! 응!'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 정말 들어가야할 시간이었다. 시계를 보고 미야를 보고 시계를 보고 무대를 보고 시계를 보고 자신이 들어가야할 대기실을 보았다. 리오는 금새 또 울상이 될 것만 같은 얼굴로 미야를 바라보다가 슬며시 손을 꼭 잡았다.
" 들어가기 싫어. 그냥 미야랑 놀러갈까.. 아. 아니야. 미야가 보러 와줬으니까 열심히 해야해. 전부 불사르고 올게 꼭 봐줘야해! 하나라도 놓치면 안된다? "
사진도 제대로 찍었겠다 이제 정말 집중할 시간이야. 리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따가 보자고 말하곤 도도도도 뛰어서 대기실로 들어갔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에도 고개를 내밀고 미야를 보곤 손을 흔들어주었다. 공연이라고 해봐야 단독 콘서트도 아니고 오프닝 무대의 조금을 받았을 뿐인데도 사람이 많았고 개 중에는 정말 오프닝 무대의 조금을 받았을 뿐인 이 인디밴드를 봐주러 온 사람들도 있었다.
무대의 불이 꺼지고 본격적으로 조용해졌다. 긴장감에 심장이 아플 지경이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하나의 조명이 들어왔다. 보컬을 맡고있는 리오보다 세 살이 많은 여자는 마이크를 잡고 조명이 비추자 눈이 부신지 '아, 눈부시네요.' 하고 한 마디를 했다. 그 모습이 재밌는지 아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오자 리오는 안심했다.
『오늘은 오프닝 무대를 맡게 됐습니다. 체리 블라썸 펀치입니다!』
첫 곡부터 이벤트성이라고 사전에 회의를 나눴다. 보컬의 언니는 기타를 잡고 능숙하게 메고는 딩-딩- 하고 몇 번인가 소리를 내보고는 다시 마이크로 돌아왔다.
『첫 곡부터 이벤트로 준비했습니다. 제대로 소리지르고 덤벼보라고 너희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무대의 조명이 꺼졌다. 예정대로구나. 리오는 심장이 쿵쾅거려 터질 것 같은 것을 꼭 참고 천천히 아까의 그 보컬이 서 있던 자리로 나섰다. 다시 팟-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들어오고 마이크 스탠드 앞에는 리오가 서 있었다. 기타를 메고 마이크를 꼭 쥐고 긴장감에 상기되어 숨쉬기가 힘들어질 정도였다. 무대에 불이 전부 들어오고 리오는 습-하- 하고 심호흡 했다.
" 와. 기절,할 것 같아. 사람, 많아요. "
리오는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미야를 찾았다. 온다고 했었는데 어디있는 걸까. 아까 분명 문 앞까지 같이 왔었는데. 리오는 '어라?' 하고 한 마디를 뱉었고 그 소리는 마이크를 타고 스피커를 타고 크게 울려버렸다. 왜 안보이는거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 되기 바로 직전에 리오는 미야를 찾았고 저깄구나. 하는 안도감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관객도 무대도 완벽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