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부원이 되고서 후회하는 일들은 그리 많지 않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부실도 아늑하고, 학교 신문을 만드는 건 월간지라 부담되지도 않으면서 나름 재미있고, 신문부원으로써 여기저기 돌아다닐 권리가 생기는 건 꽤 짜릿한 경험이다. 또래 애들이 흔히 겪지 못할만한 일들을 자주 겪게 되는 것은, 나 같은 사람에 있어서는 모험심을 충족시켜주는 좋은 일이니까. 다만, 많지 않은 신문부원이 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는 일 중 하나는...
'마 감 지 옥'
단 네 글자. 심지어 적나라하게 지옥이라고 써붙여진 저 현수막은 매 월말마다 걸리게 된다. 이 때엔 평소 모험심과 여유가 넘치는 신문부원들이 순식간에 좀비가 되어 학업과 마감작업을 병행하며 카페인과 타우린에 의존하여 목숨만 부지하고 있게 된다. 당연하지만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쩌면 가장 심했다.
처음 신문부에 들어온 후배가 없는 게 아니라서, 올해 들어 선배로써는 처음으로 마감 작업을 하게 되었다. 후배를 가르치는 것과 내 마감을 하는 것은 동시에 하기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죽...여...줘..."
신체는 그럭저럭 버틸 만 했지만 정신적으로 따라잡질 못했다. 갑갑하고 고통스러우며 쫄린다. 지금 여기서 내가 콧김 한번이라도 잘못 뿜으면 모든 것이 박살이 날 것 같은 기분이다. 일단 내 작업은 막바지에 다다라서, 조금만 더 있으면 끝장이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다. 끽해봐야 별거 없는 학교나 마을의 괴소문 정도는 적당적당히 쓴다고 해도, 올해에 있을 것들과 작년에 있던 것들을 총망라해서 적어야 할 다른 부원들의 파트는 처절하기 짝이 없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이 마감지옥의 한가운데에서, 무엇인가 명분 하나라도 있으면 바로 집으로 떠나버릴텐데...!
그런데 돌연 정신사납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여우 셔터를 누를 때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완전 난리가 난다
"..."
갤러리를 본 미카는 할 말을 잃었다 이 녀석 사실 사람 아닐까 귀여운 사진을 망하게 하려는 저 못된 심보... 스마트폰을 다시 집어넣고 나서야 얌전해지는 녀석 거기다 왠지 잘난체하는 거 같다 여우는 역시 영악한 동물이라는 말이 맞는 거 같다 그래도 귀엽지만? 미카는 결국 사진 찍기를 포기하고 다시 녀석을 만지려고 한다 이번에 공략할 곳은 턱 고양이 다루는 것마냥 살살 긁어줄 거다
"...밥 줄까?"
근데 계속 만지고만 있으니 녀석이 굶주린 건 아닐지 걱정이 된다 미카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소리내어 말해본다 누가 키우던 여우였으면 사람 말을 알아들을 수도 있으니까
슬슬 물리는 걸⋯⋯. 「사랑 100%」라고 적힌 만화책을 내려놓자 드러난 얼굴이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게, 일주일 내내 로맨스 영화, 순정 만화, 로맨스 웹툰을 로테이션으로 주야장천 시청하니 누텔라 잼을 한통 다 먹은 듯한 느글거림이 뱃속에서부터 올라왔던 탓이다. 만화책을 아무렇게나 책상 안쪽에 집어넣고는 그 위로 엎드렸다. 교차한 팔 아래에선 손가락이 고심을 담고 탁탁, 매끈한 갈색 책상을 두들겼다. 그러다 머리 위로 전구가 켜진 듯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선생님의 타박이 흘러들어온 것은 덤이었다. 무쿠루마는 실없이 웃어넘기곤 몰래 핸드폰 전원을 키고 호러 책자를 펼쳤다. 거기에는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으로 유명한 근처 심령 스폿의 장소와 분신사바를 행하는 방법이 적혀있었다. 아하, 그렇단 말이지⋯⋯. 알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폼이 무척 수상했다.
그리고 방과 후. 흥이 올랐는지 작게 허밍 하며 경쾌한 발걸음 소리를 내었다. 그에 따라 곱슬한 끄트머리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신문부실이었는데 그곳에는 제 '호러 메이트(라고 멋대로 붙인)' 우루하 쿄스케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나기 전 아무나 붙잡고 '같이 가자!'를 외쳤는데 갖가지 사유로 모조리 거절당했다. 쪼오끔 상처였지만, 뭐, 보증 수표(우루하 쿄스케)가 있으니 상관 없지!─하고 생각했다.
무쿠루마는 명랑하게 신문부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안녕하세요! 신문 군을 데리러 왔는데요─!"라는 창피를 모르는 외침과 함께. 그리곤 빵긋 웃은 채로 얼음 땡 놀이를 하다가 얼음을 외친 아이처럼 온 몸을 굳혔다. 무쿠루마의 머리가 돌아갔다. 우와아⋯⋯, 엄청 바빠보여. 신문 군을 어떻게 빼내지? 사실대로 말하면 곧장 기각당할 것 같은데⋯⋯. 아, 그래! 그 변명이 좋겠다.
"신문 군과 오늘까지 해야 하는 과제가 있어서요!"
선언 뒤, 우루하 쿄스케를 향해 눈을 찡그리거나 입매를 움찔이는 등 안면근육으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의미는⋯⋯ '어서 나와!'.
당신의 배려에 그녀는 살짝 시선을 낮게 깔고 중얼거리더니, 짐짓 고민하는 얼굴을 짓다가 별안간 다시 말을 흘려내었다.
"...하지만 눈을 감을 필요는 없어요... 당초, 제가 눈을 사용할 필요가 생긴 건 필멸자를 본뜬 모습을 하게 되었기 때문일테니까요. 이 모습은, 확실히 제약은 많습니다만... 필멸자들 사이에 섞여 지내기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필멸자들의 인세로 내려왔다면 결국 그들의 방식에 익숙해지는 것이... 앞으로를 생각하면 제일 좋은 방법이겠죠."
그것은 여태까지 중에서 가장 길고 가장 붕뜬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사뭇 진지해보인다. 밤에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발간 입술 사이로 느릿하지만 꾸준하게 자신만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점이 으스스해보이기도 하고, 범인과는 완전히 궤가 다른 인물이라고 짐작케하기도 하는 것이다. 당신이 무녀였기에 망정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무서워져서라도 그녀를 떼어놓고 갔을테니...
"게다가...... 필멸자와 뛰노는 생령들의 사이에서 눈을 감고 생활해야 할 만큼 저는 무르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그렇다는 걸 방금 떠올렸어요."
그렇다고는 해도, 괜스럽게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당신과 이 기묘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제 나름의 어떠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인가, 그녀의 자색 눈은 여전히 멍한 그대로였지만 그 깊은 안쪽에는 확신의 빛이 묻어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짓눌려 반쯤 엎드려 있던 중에, 뜬금없이 들려온 신문 군을 데리러 왔다는 외침을 듣자마자 척수반사적으로 반박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게, 이 녀석은 매번 날 신문부원이라는 이유에서인지 '신문 군'이라고 불러대곤 하니까. 그보다... 이런 무거운 공기를 뚫고 저렇게 난리통을 부릴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한 수준이다.
"어, 어... 네. 과제... 과제를 또 하기로 제가 약속을 해 가지고 지금..."
반도 다르지만 어쨌든 아무튼 그렇다! 과연 이런 소리에 속아넘어가 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의외로 편집장 아니 부장은 다크서클이 역력한 얼굴로 대답마저 귀찮다는 듯 그냥 손을 저어서 빨리 가라는 시늉을 하셨다. 방해받는 것 보단, 그냥 줄 거 줘버리는게 낫다고 판단하신거겠지. 내 경우엔 남아서 더이상 의미있게 할만한 것도 없기도 하고...
짐을 챙겨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곤 재빨리 무쿠루마를 데리고 부실 밖으로 나선다. 그리고 잠깐 일언반구도 없이 그대로 조금 복도를 경보로 걸어 현장을 벗어나서는, 코너를 돌고 나서야 겨우 참았던 걸 토해내듯 입을 열었다.
"너... 생명의 은인인건 고마운데 진짜 뜬금없고 무모하다. 그래서, 오늘은 또 뭐야?"
평소에 이 녀석이랑 얽히면 재미는 있긴 있는데, 생각보다 많이 피곤해진다. 그래도 오늘은 다행이다. 저기에 내가 조금이라도 더 틀어박혀 있었으면 '피곤'으로는 끝나지 않았을테니까. 마치 감옥에서라도 탈출한 사람 마냥, 낮은 각도로 비추는 햇빛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켰다.
여우는 영악하지만 영리하기도 한 동물이다 당장 지금도 미카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주변을 맴돌며 냄새를 맡고 있지 않는가 미카는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넣는다 이윽고 꺼내든 건 비닐봉지에 둘둘 감싸둔, 점심 급식으로 나왔었던 사과 한 조각이다 누가 베어먹은 이빨 자국도 없고 깨끗하다 시간이 꽤 지나서인지 표면이 누렇게 갈변되었지만 상큼한 냄새를 맡아보면 아직 신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먹어봐."
미카는 비닐에 감싸인 사과를 꺼내서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먹을까? 안 먹을까? 여우를 바라보는 시선이 왠지 부담스럽다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거 같기도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흘러나오는 암울함, 무쿠루마조차도 살풋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마감 지옥의 광경.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 느글함에 콜라 일 리터 같은 호러를 제 입에 콸콸 넣어줘야 살 것 같았다. 이쪽도 나름 지옥이라구! 그때, 우중충한 공기 사이를 신문 군의 타박이 뚫고 오려다 힘을 잃었다. 아무래도 마감에 쫓기는 자들 사이에서 함부로 소리칠 자신까지는 없었던 것 아닐까? 나야, 다른 동아리니까 상관없지만. 어쩐지 자그마한 승리감에 몰래 에헤, 웃고 말았다. 못 봤겠지? 봐도 상관없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중요한 것은 신문 군을 빼돌리기에 성공했다는 거다. 야호! 마음속에 피어난 성취감을 눈빛으로 뽐내며 지어지는 웃음을 숨기려 허리를 구십 도로 숙여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아─!"
그리고는 탁. 신문부실의 문은 닫혔고 이곳은 밖인데 탈환한 신문 군이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걸었기에 걸음을 따라잡으려 종종걸음으로 재빨리 뒤따라갈 뿐이었다. 그러다 코너를 돌 때엔 등에 코를 박을 뻔해 으얏,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급정거는 경고음 필수! 하는 속마음과는 달리 무쿠루마는 활짝 웃으면서 기지개를 켜는 신문 군의 눈앞에 호러 책자를 불쑥 가져다 대었다. 가미즈나 고교 뒷산⋯⋯ 뒤에 있는 뒷산에 관한 정보였는데, 갑자기 바람이 분다거나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거나 흙으로 이루어진 땅을 파보면 핏물이 묻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혹자는, 누군가 이곳에서 분신사바를 하다가 나타난 귀신에게 잡혀먹었다고도 말했다고 덧붙여있었다.
"가미즈나 고교 뒷산의 뒷산! 가자! 분신사바 재료는 내가 전부 챙겨놨어."
잘했지?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툭툭, 하고 크로스백을 쳤다.
"신문 군은 기삿거리 쟁취, 나는 그냥 즐겁고! 일석이조!"
. . .
"그렇게 해서 가미즈나 고교 뒷산의 뒷산에 왔습니다!"─무쿠루마는 자신이 취재진이라도 되는 양 신나서 외쳤다. 봄의 방과 후는 밤이 오는 게 느린 편이 아니라서 스멀스멀 푸른 기가 올라와 어둑했다. 우거진 숲의 나뭇잎들이 서로를 비벼대며 바스락 대는 소리를 연신 울려댔다.
>>177 그러니 앞으로 이 카와이이한 선배님에게 우마이한 공물을 많이많이 바치도록 하세요!! 큨ㅋㅋㅋㅋㅋㅋ ....죄송합니다 🙄 >>175 >>179 맞아요 뭔가 잔잔하고 무해한 모습이 닮았어. 아무튼 미야쨩의 멘트가 들릴까욬ㅋㅋㅋㅋ 스산한 기운에 뭔가 엄청 머릿속으로 아부나이를 외칠테야..! >>181 거기에서도 A, B, C 세 반이 있으니까 이 무슨 멋진 확률 🥰 ..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어요 힣ㅎㅎㅎㅎ 마니또 공지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