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문자 그대로 하루가 삭제된 뒤였고, 나머지 기간에도 출입증에 기록된 전음을 재생하고 마나 탐지기로 확인하느라 바빴다.(마나 탐지기로 전음 전후를 일일이 비교하는 작업은 예상보다 더 신물 나는 과정이었다..) 그래도 두 도구에 잡힌 마나의 진동 양상이 비슷한 걸 확인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더 고무적인 건 흑룡이나 용 대표가 보냈던 전음 내용을 출입증으로 흉내 내 본 결과 양쪽의 마나 진동도 비슷했다는 거다. 용들의 전음을 직접 기록하지 않더라도 전음 자료를 확보할 수 있는 거다. 앞으로 전음을 쓰면서 그 의미와 전음이 마나를 진동시키는 행태를 꾸준히 기록만 하면, 용의 전음을 보다 수월하게 알아들을 길이 열리겠다!
다만 그날의, 온유하면서도 서글픈 기색이 비쳤던 흑룡의 태도는 줄곧 마음에 걸렸다. 그 뒤 별다른 일은 없었고 그는 한결같이 친절했지만, 뭐랄까, 건드려선 안 될 영역을 건드려 버렸다는 직감은 확실했기 때문이다. 괜히 물었다. 그 용과의 일에 대해 안다고 뭘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사과하고 싶었으나 뒤늦게 끄집어내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바삐 몰두할 거리나 찾았다. 눈치 주는 이가 없는데 눈치는 보이는 거북한 상황을 피하려면 달리 수가 없었으니까. 다행히 전음 자료 수집 말고도 할 건 많았다. <카다로스 제국사>를 필사하거나, 여기저기 편지를 쓰거나.... 수습 기간이 한정된 이상 최대한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으니 겸사겸사였다. (특히나 전음 연구는 출입증이 없으면 지독하게 힘들어질 터라 마음이 더 급했다. 이제 남은 수습 기간은 20일쯤. 그 안에 가능한 한 많은 데이터를 모아야 했다.) 그 사이 용의 대표가 뭔가 눈치라도 챈 것처럼 찾아와 줘서 그와 마주하는 부담이 좀 덜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은, 어쩐지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고작 일주일(하루 꼬박 자 버린 걸 고려하면 엿새) 만에 진이 빠진 걸까. 전음 연구 방향이 그럭저럭 잡히고 <카다로스 제국사>도 앞으로 내가 밝힐 내용이 거짓이나 망상이 아님을 방증할 정도로는 필사를 해내서 마음이 놓인 걸까. 아니면, 오늘은 대표가 그를 데리고 외출한 덕에 긴장이 풀어진 걸까. 모르겠다. 차라리 이불 뒤집어쓰고 자 버리고도 싶은데 마음은 급해 책상머리를 떠나지 못하는, 그렇다고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는, 답답하리만치 무기력한 상태였다.
커피라도 마시면 좀 나아질까? 한숨과 함께 일어선 순간, 정령들이 둘러앉은 게 눈에 띄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심심해 죽겠다는 얼굴이면서도(불 정령의 도마뱀 같은 얼굴에도 표정이 또렷이 어린 게 특히 놀라웠다.) 레아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이 몇 미터 떨어진 데 자리 잡은 채였다. 여태 기척도 없이 저러고 있었던 걸까. 미안한 마음에 그들과 눈높이 차이라도 줄여 보고자 쪼그려 앉았다.
"혹시 책 읽는 거 좋아해요?"
- 응!
"같이 읽을까요? 읽고 싶은 거 골라 올래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령들은 제각기 책을 고르기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테이블엔 책이 잔뜩 쌓였다. 저거 읽으면 하루 다 가겠네. 정령들도 거리를 완전히 좁혀서 레아의 머리와 어깨는 이미 만석(?)이었고, 몇몇 정령은 레아가 테이블 앞에 앉자 양팔에 기대앉았다. 나머지도 테이블에 올라서는 책이 보일 법한 위치를 골라 앉았다. 조카들에게 책을 읽어 줄 때가 떠올랐다. (아직 책을 골라 올 만큼 큰 애는 둘뿐이라) 레아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으면 각각 왼쪽 오른쪽을 차지하곤 하는데, 더 꼬꼬마들까지 크면 이렇게 복작거리려나? 싱거운 웃음을 흘리며 제일 위쪽의 책을 집었다. <세상에서 가장 잘 웃는 용>이라니 귀엽잖아. 알록달록한 꽃을 내뿜는, 순박하게 생긴 녹색 용이 그려진 표지도 인상적이었다. 레아는 책을 펼치고는 조카들에게 읽어 줄 때처럼, 한 구절 한 구절 감정을 실어 가며 구연하기 시작했다.
// 정령왕님이 방문할 예정이라고 하셔서 정령들과 복작거리는 내용으로 작성해 봤습니다😅 생각해 보니 일주일 스킵이면 누님이 유희를 막 정리한 참일 테니 대빵님과 얘기할 게 많을 만도 하네요😌 무슨 얘길 했으려나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