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한 답변이라는듯 그녀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사람은 누구나 신념을 따르기 마련이니까... 그것이 강대한 것이든 약소한 것이든, 중대한 것이든 하찮은 것이든, 모두를 위해서든 지극히 개인을 위해서든... 물론 그 신념이란게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꺾일 수도 있다만 그건 그 사람의 문제다.
그렇다면 그녀의 경우에는? 결단코 꺾이지 않는 신념이었으나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로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와, 무슨 담당일진인 것마냥 얘기하네. 혹시 왕년에 삥 좀 뜯으셨어요? ...생긴거 봐선 범생이 같은데..."
갑작스레 기울어진 화면, 당혹스러운듯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소위 말하는 '그렇게 안 봤는데...' 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물론 외모만 가지고선 판단할 수 없겠다만, 최소한 그녀의 시선에선 '문제아' 같은 이미지는 느껴지지 않았음이 확실했다.
"그래봤자 극적으로 작은건 또 아니라지만요~ 오, 슬슬 보이려나?"
이미 해는 들어간지 좀 되었으니 어둑어둑한 하늘에 빛나는 것은 별가루와 환한 달이었다. 세상은 요지경이어도 달은 여전히 아름답구나, 그녀는 먼 우주로부터 반사된 빛을 담아내려는듯 그쪽으로 휴대폰을 들어보였다.
임무 후, 모두가 복귀한 직후 그가 찾아왔다. 유토의 개인실 앞에 서 닫힌 문을 두어번 노크하고선 가만 서 있는다. 초인종이 모종의 이유로 있었더라도 노크를 했을 것이다. 도구는 [하남자]의 것…
난전이 있었던 것 치고, 그는 매우 멀끔한 차림새였다. 육안으로 그를 보자면 전투의 여파는 마비액에 젖었다 마른 무복과 그의 허리춤에서 위태로이 달랑이는 신칼에 달라붙어 마른 피 정도밖에 없었으니, 다른 이들에 비해서는 양반을 넘어서 귀족 꼴에 가까울 지경이다. 까마귀는 소환 해제한 지 오래, 동행인(묘)는 그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는 고양이 뿐이었다.
“유토님, 계시나요?” “그 돔 내부의 실험실에서 발견한 것이 있던지라, 관심 내의 것이신지 여쭤 보려 왔습니다.”
아직 옷을 갈아입지도, 씻지도 않은 것인지. 그에게서는 불 특유의 연기 내음과 더불어 피의 내음과 젖었다 마른 옷의 퀘퀘함도 조금 날 터. 그는 이것을 눈치 못 챘는지, 아니면 별 신경 안 쓰는지 모르겠다.
그녀가 들어와. 라고 말한 시점은 세이메이가 유토님. 까지 말한 시점이었다. 전부터 느낄 수 있던거지만 그녀는 참 애매하게 마음이 넓었다. 기분이 좋을때의 그녀는, 정말 역린을 건드리는거 외에는 상당히 관대해지는데. 이게 어디까지인진 알수가 없으니 오히려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곤란한것이다.
아무튼 세이메이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면 의자에 앉아서 ㅡ 솔직히 회장님 의자에 앉아있는 어린애 꼴이다만 ㅡ 주스를 마시고 있는 그녀가 보일것이다. 책상은 보이지 않는데, 아마 책상이 있었다면 그녀의 얼굴만 간신히 보였을것이니 이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묘하게 거만스러운 말투다 다만 '내가 이렇게 돈이 많다'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어필하려한다기 보다는 이런 태도자체가 몸에 배어든 듯 싶었다 그런 사실과는 별개로, 시구레는 조금 놀랐다 정말로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있구나 싶은 것이 놀랍게 다가오는 것은 매한가지였기 때문에
"그게, 그쪽 길로 가로 질러가면 집이 가깝거든요. 시간을 아끼려다가 그만."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은 주로 있는 일인데다다, 집(아발란치)이 거기에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무릇 거짓이라는 것은 수습도 불가능 할 허무맹랑한 말들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진실을 섞고 본질을 기피하는 것이 훨씬 잘 들어먹히는 법이다 나 자신이 연기나 거짓말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마들렌은 집어 들었다. 너무 단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 입 베어물고는, 옅게 입으로 미소지으며 눈 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맛있네요."
비록 거짓을 연기하고 있었으나. 과자만큼은 확실하게 양품이었다 디저트에는 문외한인 시구레조차도 그렇게 생각할만큼, 마들렌 특유의 부드러운 풍미가 입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런 다과를 먹어 본 적이 얼마만인지'가 아니라, 시구레에게는 그런 사실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마들렌만큼은, 더욱 와닿는 맛이었다
'들어와.' 그 한 마디가 들리고 반 박자 후,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그가 들어왔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성인이 저리 키가 작을수 있던가,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잠시. 그녀의 기분이 좋아보임에도 그가 긴장을 늦추는 꼴은 보이질 않았다. 그는 이 사실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건지, 한쪽 손을 주먹쥐어 장갑의 가죽 부분을 모아 움켜잡았다.
"아하하, 정말 그랬다간 제 목이 뜯겨나갈 것 같은데요?"
고깔모자 아랫부근을 가르켰다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떨구더니 손가락을 위로 했다. "꽥!" 하는 의미불명의 의성어와 함께하니 글로 묘사를 읽기만 한다면 편해진 듯한 그였다만, 실제로는 묘한 위화감이 감돌고 있었다. 어쩔수 없지 않은가? 호오가 어디에서 갈리는지 영 애매한 당신이니, 지금 그는 목 앞에 칼이 들이밀어진 기분일 테다. 그런 면에서 그는 당신과 닮았다고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돔 내부에 실험실이 있더라군요. 책이나 문서 같은 것은 살피진 못했지만, 자폭 버튼 옆에 이걸 찾았습니다."
고양이는 어깨에서 뛰어내려, 공중에서 소환이 해제되었다. 때문에 자욱해진 연기를 한 손으로 대충 날리더니, 그 안에서 떨어져 나온 USB 하나를 낚아챈다.
전투 시작 직전에 대원 한 명의 목을 뽑았던 건 시야의 구석에서 봤다. 이 짧은 웃음소리가 내포하는 의미는 '눼가 얼뫄나 우리 애둘을 얘뀌눈데~' 정도의 비아냥 및 부정이려나. 세상 맑은 웃음소리 끝에 들려오는 말은 더 없었다. 그는 당신 쪽으로 다가가 USB를 당신의 손에 조심스레 놓아주었다.
"'상' 이라 하신다면..."
그는 애초에 그녀와 길게 대화를 나눌 의도는 없었다. 깡이 있는 편이라고 자부하는 그지만, 죽을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상황은 그 확률이 제아무리 낮더라도 꺼려졌다. 다만 그녀가 상을 내리거나 한 전적은 그의 기억 내엔 없었다. 그럼 왜? 어째서 자신에게? 그는 본래 이것을 넘기고 방을 빠져 나가려 했지만, 치기어린 젊은 피는 생각보다 강렬했다. 이 USB의 내용은 그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라 예상되니, 호기심이 그를 뒤따르는 건 당연한 수순.
"그 '상'이 뭔지 너무나도 궁금하지만, 저도 아직 어린가 봅니다." "주제넘은 궁금증도 하나 생겨서 말이지요."